장편야설

(로맨스야설) 홍다분교 여교사 - 6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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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면 잠자리 까는 섬 생활에서 K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밖으로 나가자니 음험한 이장의 번지르르한 기름 덩이를 볼 것 같아 차마 집에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박 선생 집에 가자니 늙은 총각의 당황함이 눈에 거슬렸다. 도회 처녀 K의 저녁 시간은 그렇게 우두커니 방에 앉아 책을 보는 것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전기가 있어, 밝은 조명도 아니었다.

시커먼 연기가 알라딘의 램프처럼 끝없이 천장을 향해 날 아 오르는 희미한 호롱불만이 그 방을 비춰주는 유일한 조명이었다.


[선생님.]


밖에서 길선이 K의 방문을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엄니가 강냉이 드시라고..... ]


K가 방문을 열자 길선과 길선 어머니가 마루에 옥수수를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웬 강냉이예요?]

[섬은 강냉이가 많지요. 이놈은 어디다 뿌려봐도 쑥쑥 큰다니까.]


길선 엄니가 먹음직스러운 놈을 골라 K에 건넸다.


[근데, 길선 어머니, 길선이 중학 안 보낼 건가요?]

[....글씨요. 뭐 먹을 게 있어야 보내든지 할 건데....이 년이 가진 거가 넙덕치(주 - 엉덩이의 전라도 사투리라고 하네요.) 뿐인데. 뭐로 보낸대요?]

[그래도 사내 녀석을 공부시켜야죠.]

[내가 그걸 왜 모르겠소. 나도 일자무식이라 한이 남는데... 하지만 제 팔자 지라. 내 다리 밑으로 나온 것도 제 팔자 아니겠어요?]


K는 더 할 말이 없었다. 길선은 아무 말 없이 옥수수만 먹고 있었다. 오후에 미역을 땄다더니 손이 불어 있었다.


[근데, 이장 말인데요. 그 사람 어떤 사람이에요?]

[이장이요? 아주 징글징글한 사람이지요. 참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빌붙어 먹고는 삽니다만, 징글징글한 것은 징글징글한 것이지요.]

[원래 부자였나요?]

[지주인 거 뺏었지요. 원래 그 집 머슴이었소. 힘이 장사였지요. 원주인은 좋았다고 하던 디. 주인이 멍청하니까 통째로 집어 먹은 거지.

알 사람은 다 알아요. 그 사실을....

이장이 무진장 똑똑한 놈이지. 비록 배운 건 없으시면서도 넣고 빼는 걸 아주 징글징글하게 잘 아는 사람이요.

그 사람이. 그러니까 그 재산을 쓱싹 집어넣었지..... 우리 같은 사람은 그렇게 하라고 해도 못 할 것이고 만.]

[그럼. 그 주인은 어디 갔나요?]

[글씨요. 처음 뺏겼을 때는 미친놈처럼 이리저리 휘휘 다니더니만, 어느 날 갑자기 없어져 버려 다고 헙디다. 상어 밥이 됐는지 어찌 알겠소.]

[아니. 아무리 멍청하다고 어떻게 그렇게 뺏겼지요?]

[내가 그 속사정을 어찌 다 알겠소. 일정(日政) 때라 그럴 수도 있겠지. 인공(人共) 때 굳어졌을 것이고.]

[아,예]

[그러니까 아무리 멍청해도 자기 재산 다 뺏겼으니 홧병이 안 났겠소? 그러니까 완전히 미친놈이 되어 버린 거지.]

[마을 사람들은 그 이장을 인정했나요?]

[아, 인정하지 않으면 어쩔 거요? 나라에서도 다 인정한 일인데, 자기가 인정하지 않는다고 누가 자기한테 밥 준답디까? 

다 그렇게 되어가는 것이 세상 이치 아니겠소.]


옆을 보니 길선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강냉이를 씹다 말고 조는 모습이 귀여웠다. 길선어 머니가 그런 길선을 툭 쳤다.


[아따. 자려면 방에 가서 자라.]


길선이 삼복더위에 미친년처럼 멍한 표정으로 방으로 들어갔다.

섬의 밤은 지칠 줄 모르고 흐르고 있었다. 이미 어두워지면 그것이 그것 같은 밤의 한 가운데에 서 이렇듯 아낙과 강냉이를 앞에 놓고 마루에 있으려니

그냥 잠깐 시골에 쉬러 온 기분이 들었다. 포근한 아낙의 품이 엄마를 생각나게 했다.


[그런데. 그 깐 건 뭐 때문에 묻는대요?]

[아. 그냥요. 남편분 사고 나신 거, 얼마나 됐나요?.]


아낙이 남편 얘기를 꺼내자 수선스럽게 마루를 훔쳤다. 더 이상 물어 보아서는 안될 얘깃거리 같았다.

아낙은 아직 남편의 부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상태인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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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옆방에서는 또다시 기침 소리가 심해지고 아버지는 분명 더운 피를 토하고 계실 게다.

벌써 사람의 인적이 끊긴 지 오래된 집이지만, 고독에 찬 집안의 분위기가 늘 애숙을 홀로 선 아이로 만들었다.

이미 익숙한 일이지만, 그리고 아버지의 병이 더 이상 진척될 수 없는 사탄의 선물이지만 애숙에게는 늘 견딜 수 없는 고독감에 시달려야 했다.


홀로 지낸다는 것, 남들이 자신을 멀리한다는 생각이 늘 애숙을 괴롭혔다. 폐병 환자의 자식은 그 자신도 폐병 환자였다.

이미 도회에서 쫓겨날 때부터 애숙은 철저히 공부에만 매달리기로 작정했다. 아직 어린 나이지만,

그리고 이제 겨우 국민학생이지만, 애숙에게 그것이 아무 생각 없이 살아야 한다는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애숙은 이미 정서적으로 성숙으로 가고 있었다. 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가팔아 갈 때,

그리고 어머니의 슬픈 소프라노가 깊어져 갈 때 애숙의 감성은 커져만 갔다.

이미 이 섬으로 유배 아닌 유배가 됐을 때부터 애숙의 어린 마음은 사춘기의 감성으로 변해 있었다.


[순이야....]


멀리서 순이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자려고 누운 순이에게 그것은 결코 반가울 리 없는 소리였다.


[순이야...]

[이것이 무슨 소리야? 순이 부르는 소리 아닌감?]


아버지가 담뱃대를 딱딱 치며 방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마당에 신발 끄는 소리.....


[누구야?]

[안녕하세요. 어르신. 석층인데요.]

[네가 뭔 일이냐? 이 밤중에....]

[순이한테 뭐 물어볼 것이 있었어요. 순이 잔대요?]

[글씨... 모르겠는데. 낯에 물으면 안 되겠느냐?]

[중요한데...이]

[그럼 쪼개만 기다려 보아라. 이년이 자는지....]


정말 아버지가 그 아이들을 돌려보내기를 순이는 간절히 바랐다.

이불을 끌어 입술로 깨물며 순이는 정말로 아버지가 석충이를 혼쭐내 쫓아내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하지만.....


[순이. 안 자면, 나가 보아라..... 아이고, 허리가 또 결리는구나.] 


아버지가 방문을 닫는 소리를 들으며 순이는 정말로 자는 척 아무 인기척을 내지 않으려 입을 꼭 다물고 밖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 순이를 찾는 이는 석충이가 아닐 것이다. 석충이는 이에 순이를 찾을 만큼 급박한 볼 일이 없을 것이다.

석충이는 이 밤에 순이를 부를 만큼 배포가 크지도 않는 아이이다. 순이는 말봉을 생각하며 또다시 진저리 처지는 자신을 느꼈다.


순이야. 안 나올 거야?]


말봉이 목소리였다. 여기가 어디라고 말봉은 순이의 방문 앞에서 변성된 저음으로 순이를 불렀다.


[안 나오면 내가 들어간다. 나, 지금 단단히 열나서 눈에 뵈는 게 없으니까]


말봉의 목소리를 들으며 순이는 긴장의 힘줄이 허벅지를 관통함을 느낀다. 더 이상 말봉에 밀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이미 말봉의 목소리가 앗아갔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벗어나느냐 하는 생각만이 온 뇌를 괴롭혔다.

더 이상의 이상한 상황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나, 네 아버지한테 불어버릴 거야. 너 그럼 어떻게 되는지 알지? 네 아버지한테 들어간다.]


옆방의 식구들이 있는지 알면서도 이미 순이는 자신이 혼자서 풀어야 할 숙제임을 느꼈다.

결코 자유스럽지 못한 일이었기에, 여자아이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이었기에.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 할 수 없는 수치스러움으로 순이는 결국 말봉의 말을 따를 것이다.


순이는 정말로 문고 리를 잡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주눅을 주는 말봉의 목소리가 순이를 문을 열게 만들었다.

순이 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말봉이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뭔 일인데...]


순이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억지로 끌어냈다.


[잠깐이면 돼. 따라 와.]


말봉이 순이의 의사도 묻지 않고 앞장서 나갔다. 쭈뼛쭈뼛 말봉을 따라 사립문을 나서며 순이는 속절없는 두려움이 자신의 뒤꽁무니를 잡아당김을 느꼈다.


[너, 이제 가도 돼]


석충을 보며 말봉이 말했다. 석충은 말봉과 순이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말봉은 아무 말 없이 걷기 시작했다.

순이는 말봉을 따라갔다. 어디 가는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이미 정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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