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야설

(로맨스야설) 홍다 분교 여교사 - 1부

작성자 정보

  • 밍키넷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갈매기가 보이는 걸 보니 육지가 가까운 모양이었다. 목포에서 배를 띄운 지 벌써 2시간 가까이 지났다.

와작지껄한 시골아낙들의 웃음소리가 왠지 낯설게 다가온다. 이제 올해만 지나면 스물넷, 1962년이라는 기분나쁜 년도도 K의 기억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결코 더 이상 기대할 수도 없는 그런 나날이었다.


[정말 너 그럴 거야?]

[이미 끝난 얘기예요. 우리 이제 각자의 생활에 충실하기도 해요. 당신이야, 그 여자하고 결혼하면 되는 거고요. 나야 내가 하는 일 계속하면 되는 거고요.

이제 당신에게 더 이상 미련, 없어요...]

[왜 그래. 너 정말, 도지사 딸이야. 아버님의 일방적인 생각이야. 사업상 권력과 친해져야 한다는데 난들 어떡하겠어?]

[우리 집안은 아무것도 없어요. 당신 집안에 내세울 것도 없는 한심한 집안이죠. 그러니 내가 깨끗이 당신을 포기하는 거예요.]

[너 왜 이렇게 못나게 굴어. 난 너만 사랑해. 그 여자 나하고는 상관없는 여자야!]

[당신도 이미 아버님 말씀에 기울어지고 있잖아요. 안 그래요?]

[내가 감히 어떻게 아버님 말씀을 거역하겠어? 그래 솔직해지자. 난, 난 말이야 아버님을 거역할 수 없어.....

하지만 너만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변함이 없어.... 아.... 어떻게 해야 하지?]

[....이제 됐어요. 저 갈게요.]


통통배는 K의 기억을 씻기기라도 하듯 출렁이는 바닷물을 용케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래 1년만, 1년만 아무 생각 없이 생활하자.


[아따, 저. 새로 오신 선생님이신가요?]


허름한 몸빼 바지의 제법 몸집이 있는 아낙이 K에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줌마 뒤로는 대여섯 되는 아낙들이 K의 반응을 살피기라도 하려는 듯 귀를 쫑긋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예.]

[아따 내가 맞는다고 그랬지. ]


말을 붙인 아낙이 시험문제 맞춘 어린아이처럼 신나 했다.


[하기야. 그런 아기씨가 뭣 하러 그 오지에 오갔어.]


뒤의 아낙들이 한마디 했다.


[참 얼마만 이여. 선생님 오시는 게....]

[벌써 몇 해 됐지.]

[아이고. 우리 애들 이제 공부 좀 하겠구먼.]

[그것들 공부 안 하고 노는 거 지긋지긋했는데....이제야 글깨나 떼겠구먼.]


아낙들이 왁작지껄 K를 보며 좋아했다. 그런 아낙들이 여전히 어색하게 다가왔다.

어찌 보면 K 입장에서는 이것은 도피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섬 아이들을 이끌겠다는 숭고한 스승 의식 보다는 결혼 실패에 따른 도피나 다름없었다.


애당초 섬 아이들을 이끌겠다는 생각이 없었기에 섬이 주는 의미도 도피 이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K에 아낙들은 오히려 방해되는 훼방꾼들이었다.

바다를 보며 무언가 자신만의 세상 속으로 빠져들고 싶었던 K에 아낙의 수다가 반가울 리 없었다.


[선생님. 이거 한번 드셔보시오.]


처음 몸빼 아낙이 K의 코끝에 삶은 계란을 들이밀었다.


[예? 아니에요]

[아따. 드시오. 못 먹는 거 아니니까.]


아낙이 K의 손에 억지로 계란을 들려주었다. 어물쩍하게 들고 있으려니 뒤에 아낙들이 먹으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참 순박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러지 말고 선생님 여기 좀 앉아 보시오.]


아낙들이 K의 손을 이끌고 자신들이 앉아 있는 자리로 안내했다.

K는 어물쩍 그들 사이에 앉힌 꼴이 되었다. 앉고 보니 아낙들 뒤로 새까만 얼굴을 한 남자 몇 명이 이쪽을 흥미 있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같이 늙어 보여 나이가 몇 살인지 분별하기도 힘들었다. 그들 사이에 끼인 K의 희멀건 얼굴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질 뿐이었다.


[선생님은 뭣 때문에 이런 외딴섬까지 왔는지 모르겠네.]

[아따. 이놈의 여편네 말하는 싹수 좀 보소. 애들 가르치려고 왔겠지, 뭣 하러 왔겠는가? 연애 하려고 온 줄 아남? 안 그래요. 선생님?]

[어마, 여편네야 누구 그걸 모르나. 내 말은 아무도 오지 않는 이런 오지를 왜 자원해서 왔는가 이거야.]


그렇다. 처음 K가 홍다도 분교에 자원했을 때 주위의 반응은 놀라움과 당혹감과 미친 짓이라는 반응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결혼에 실패했기로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내팽개치면 안된다는 반응에는 정말 K도 자포자기 하는 자신을 발견하며 서글픈 패배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대로 그 남자와 한 하늘 아래에 있다가는 미쳐 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당시에는 신교육을 받은 엘리트 여자였지만 이미 소문날 대로 소문난 남자와의 결별은 혼삿길에도 문제가 있었다.


자신의 홍다도 자원에 집안에서는 의외로 담담히 현실로 받아들였다.

어머니의 울음을 빼고는. `그래 잠시 세상이 나를 잊게 하기 위해서는 잠깐의 외유도 괜찮지.`

가족들은 K의 장래 결혼을 위해 그녀의 홍다도 행을 마다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 남자의 욕을 주절주절 늘어놓으며 딸의 무사안일을 빌었다.


K가 말이 없자 아낙들이 자기들끼리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뒤편의 남자들은 계속 K를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끈적거리는 그네들의 눈빛이 K의 마음을 불쾌하게 했다.

별로 보이지도 않는 그녀의 가슴을 힐끔거리는 그 남자들의 두꺼운 입술이 마적단의 그것처럼 헤벌리게 벌어져 있어 K는 얼른 다른 데로 얼굴을 돌렸다.


[아, 다 왔다.]


아낙들이 소리치자 K도 그쪽을 쳐다보았다. 정말로 지도에서만 보던 홍다도가 눈앞에 펼쳐져 보였다.

소담한 초가집이 듬성듬성 자리 잡은 섬 전체의 마을이 한눈에 보였다. 하얀 단층 벽돌 건물이 딱정벌레처럼 언덕배기에 붙어 있었다.

한눈에 학교임을 K는 알았다. 학교의 모습이 의외로 아담하게 마음속으로 다가와 K는 그 건물이 금방 마음에 들었다.


`말로만 듣던 시골 학교가 바로 저런 거구나.`


배가 어귀에 닿자 여러 사람이 나와 있었다. 아이들은 어른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고, 남자들은 담배를 피우며 서로 잡담을 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시커먼 얼굴에 두꺼운 입술을 하고서, 허름한 한복에 까만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밀짚모자는 유니폼처럼 하나씩 머리에 이고 있었다.

공장의 굴뚝처럼 저마다의 입에서는 담배 연기가 몽골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봉초 담배가 이들의 유일한 낙인가 보았다.


광주에서만 살아온 K에 하나같이 낯선 광경들이었다.


[아따, 이장님! 선생님이 오셨구먼요!]


아낙 한 명이 배에서 뛰어내리며 한 중늙은이한테 소리쳤다. 아이들이며, 거기 서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K에 꽂혔다.

풍체가 제법 넉넉하고 얼굴에 살점이 기름지게 흐르는 50대 남자가 앞으로 나오며 그녀를 향해 사람 좋은 미소를 보냈다.


[어따. 이런 데까지 오려고 얼마나 욕봤소.. 반갑소이..]


그러면서 K에 손을 내밀었다. K가 그 큼지막한 손을 잡을까 말까 고민할 시간도 주지 않고 그 이장이라는 사내는 K의 가냘픈 손을 덥석 쥐어 잡았다.

워낙 단단히 잡아 아프기까지 했다.


`상당히 능글스러운 양반이군.`


K는 이장이란 사내를 이렇게 첫인상으로 집어 담았다. 이장 옆에 허름한 사내가 불쑥 튀어나왔다. 유일하게 한복이 아니었다.

비록 빛바랜 하얀색 와이셔츠에 까만 바지였지만, 신선한 도회의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였다.


[어서 오세요. 본교에서 연락받았습니다.]

[아, 박 선생님 이시군요?]

[몇 년 만에 자원한 분이 계시다기에 누구신가 했더니. 의외로 이런 미인이 오시다니 정말 반갑습니다.]

[하이고. 박 선상 얼굴 빨개졌네. 하하하]


옆의 아낙들이 박 선생을 보며 놀렸다. 박 선생은 얼굴이 벌게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이 남자, 순수하군.`


[자, 가시지요.]


박 선생이 앞장서며 K의 가방을 들어 주었다. 아이들이 K의 뒤를 졸졸 따라서 왔다. 마을을 돌아 한참을 올라가자 배에서 본 그 학교가 눈앞에 나타났다.


[선생, 이 섬 생활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을 겁니다.]

[예?]

[생활하시면 알겠지만, 여자이니 조심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내가 힘닿는데 까진 보호해 드리겠지만요.]

[무슨 말씀이신지?]

[.....] 


학교에 들어서자 배에서보다 더 작아 보이는 조그마한 학교였다. 학교 바로 앞에는 허름한 관사가 있었는데 박 선생이 사는 것으로 보였다.

관사에 들어서며 박 선생은 빨랫줄에 널려있는 트렁크 팬티를 잽싸게 치웠다.


[박 선생님. 아직 결혼, 안 하셨어요?]

[....하하하, 누가 여기까지 시집을 와야지요.]

[꽤 나이 드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하하하. 그렇게 됐습니다.]

[그런데, 전 어디서 살지요?]

[글쎄 말입니다. 갑자기 오셔서 숙소가 마땅찮은데요.]


관사는 방이 하나였다. 여기서 남자와 산다는 게 말이 안 되었다. 그렇다고 학교에서 먹고 잘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요 바로 밑에 아주머니가 과부거든요. 그분에게 부탁했습니다.]

[아, 예....]

[아주머니 방이야 두 개뿐이지만, 아직 아들이 어리니까 괜찮을 겁니다.]


박 선생이 과부의 집으로 안내했다. 관사 바로 밑에 있었다. 박 선생과 떨어져 있지 않아 편하겠다 생각되었다.


[이장 집이 방도 많고 좋은데. 제가 거절했습니다.]

[아니 왜요? 불편하게 생활하기 보다 넓은 집이 좋지 않을까요?]

[....그럴 사정이 있습니다.]

[......아,....예..]


과부의 집에 들어서자 열 대여섯쯤 돼 보이는 녀석이 선생들을 보자 얼른 쪽문으로 들어갔다.


[허, 녀석하고는...]

[누구예요?]

[우리 학교 6학년 길선입니다. 저렇게 숙기가 없어서야.]


K는 소년이 숨어 버린 쪽문 쪽을 쳐다보았다. 소년이 이쪽을 보다 K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숨었다. 후후. 절로 웃음이 나왔다.


[저, 아주머니 계세요?]


예의 몸빼 바지를 입은 아낙이 부엌에서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나왔다. 참 인상이 좋은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집은 허름한 초가집이었지만, 주인의 인상을 보니 생활하기는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따, 오셨소? 이런 애기 씨가 어떻게 이런 데서 살꼬. 걱정스럽네.]


아낙이 K를 보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괜찮아요,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요]

[얼른 들어 가시요]


아낙의 방은 정말 말대로 초라했다. 신문지로 대충 발라놓은 곰팡이 내음 나는 방에서 정말 K는 살기가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아따. 길선이 이놈은 어디 갔을꼬? 선생님께 인사라도 할 것이지. 아까 까지는 있었는데....]


두 사람이 방에 들어서는 것을 보며 아낙이 걸레를 들었다. 방을 둘러보며 K가 쭈뼛쭈뼛 서 있자 박 선생이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어디에 앉을까 고민스러울 정도로 방은 앉기도 민망했다.


[여기가 선생님 방이니 좀 보세요]


바로 옆방에서 아낙이 소리를 질렀다. 박 선생이 K의 가방을 들고 앞장섰다. K도 박 선생을 따라가며 비교적 정갈한 마당을 훑어보았다.

아까 그 소년이 쭈뼛거리며 쳐다보다 기둥 뒤로 숨었다. 귀여운 녀석이군. K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돌았다.

K의 방도 아낙의 방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정갈한 도회풍의 도배가 인상적이었다. 여의 곰팡이 내도 도배를 해서 그런지 그리 심하지는 않았다.

좁은 대로 있을 만했다.


[박 선생님이 부랴부랴 도배했지요. 요런 촌에서 요런 이상스러운 도배는 처음 본다니까]


아낙이 수선스럽게 방을 훔치며 K를 찔끔거리며 쳐다보았다.


[됐어요. 아주머니 깨끗한데요.]


K가 어지러워 아줌마를 제지했다. 그제야 아낙이 걸레를 놓으며 허빌레 웃었다.


[근데. 아주머니. 주인아저씨는 안 계시는가요?...]

[글쎄요.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됐을 거만요. 바다 나갔다 안 들어온 지 오래됐으니까... 시체도 못 찾아 헛장사가 벌써 몇번인디.]


아낙이 눈물을 훔쳤다. K는 괜히 물어보았다 싶었다. 민망하여 밖으로 나갔다.

외딴섬의 밤은 너무도 어두웠다. 전기가 아직 무엇인지도 모르는 이런 외딴섬에서 K는 난생처음 호롱불을 맞으며 방에 앉아 있었다.

갑자기 자신의 처지가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 가족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래 여기서 일 년만 쉬었다 가자...`


K는 또다시 자신을 다잡았다. 그때 문 앞에서 무언가 아른거렸다.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바로 옆이 아낙의 방이었지만, 이런 외딴 오지에서 의지할 것은 자신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야?] 


문 앞의 형상이 후다닥거렸다. 얼른 방문을 열자 소년이 마당에 널브러졌다. 어이없었다. 소년이 부끄러운지 마당에서 일어나며 쭈뼛거렸다.


[너, 이리 와 봐...]


K가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소년이 엉거주춤 K 앞에 섰다.


[너 몇 살이니?]

[열 다섯살인디여.]

[그럼 나이가 국민학생이 아닌데?]

[여기는 다 그래요. 학교가 몇 년씩 늦는데요.....]

[그렇구나...]


K는 소년의 머리칼을 매만져 주었다. 소년이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 우리 선생님이 되나요?]

[글쎄. 선생님도 궁금한데. 선생님이 됐으면 좋겠니?]

[......예]


길선이 쑥스럽게 말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길선을 보며 섬 아이들이 궁금했다. 길선처럼 순수한 아이들일까? 어찌 되었건 자신이 맡아야 할 아이들일 것이다. 

학교가 몇 년씩 늦는다는 길선이 말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분명 도시의 국민학생과는 다른 억센 아이들일 것이다.

아니 벌써 중학생의 나이를 먹어버린 아이들을 국민학생이라고 해도 되는 것일까? 아무튼 내일 학교에 가보면 알 것이다.


전체 1,808/ 1 페이지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