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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야설) 홍다 분교 여교사 -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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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는 난생처음 집을 떠나 잠을 청했다. 정말 단 한 번도 외박을 해 보지 않은 K였다.

너무나 완고한 집안 분위기를 떠나 그 시절 여인네의 외박이 어디 상상이나 될 일인가?

대학을 나온 그녀였지만, 외박은 꿈도 꾸지 못할 만큼 너무나 여성에게 엄격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지금 누구나 인정하는 외박임에도 K는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내일은 새로운 섬 생활이 시작된다. 답답한 설레임이 K를 감쌌다. 다음 날 아침 K는 아낙이 차려준 아침을 들고 방문을 나섰다.

이런 섬에서의 식사치고는 비교적 깔끔한 아낙의 음식솜씨가 좋았다.

방을 나서자 박 선생이 마당에 서 있다 희멀건 미소를 얼굴 가득 안고서 그녀를 맞아주었다.


[어마. 선생님이 벌써 나와계신 줄 알았으면 먼저 나오는 건데요.]

[아닙니다. 늦지도 않았는데, 천천히 드시라고 인기척을 안 했습니다. 자, 가시지요.]

[예, 선생님 아침은....]

[홀아비 생활 십수 년입니다. 웬만한 여자보다 더 나을 걸요, 하하하]


박 선생의 너털웃음이 K에 시원하게 다가왔다. K는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학교 일도 있고 해서 4학년까지 맡을 테니, 선생님이 나머지를 맡으시면 어떨까요?]


앞만 보고 가는 K에 박 선생이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어린아이들보다야 대가리 큰 애들을 다루기가 쉽겠지요?]

[예, 박 선생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반은 어떻게 나누어져 있나요?]

[1학년부터 4학년까지 한 반이고요, 나머지가 한 반입니다. 아무래도 학습 난이도가 비슷한 학년끼리 나누었습니다.]

[그럼 지금까지 두 학급을 왔다 갔다 하면서 수업하셨겠네요?]

[그렇지요, 어떤 땐 헷갈릴 정도였습니다. 하하하....]

[아,예. 힘드셨겠어요.]

[어쩌겠습니까? 아무도 부임을 하려 하지 않으니 나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지요.]

[근데, 선생님은 어떻게 이 섬까지 오셨어요?]

[글쎄요....오지의 아이들에 대한 스승으로서의 의무감이 아닐까요? 제가 아니면 이 아이들은 목포까지 나가 공부해야 하는데,

그 학비를 감당할 학부모가 이 섬에는 없을 겁니다. 그럼 이 아이들은 영원히 글씨도 못 읽는 사람이 되겠지요.

도시에서 편안히 아이들의 존경을 받으며 선생질해도 좋지만,

그런 것 보단 이런 데서 정말 교육의 참모습을 실천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젊은 시절의 그런 객기가 이렇듯 비참한 노총각으로 남았지만요, 하하하]


박 선생의 말에 괜히 K의 얼굴이 민망했다. 단순히 연애의 도피처로 이 섬을 선택한 자신은 어쩌면 교사의 길에 어울리지 않는 것만 같았다.

박 선생이 학교에 가자마자 종을 쳤다. 아이들이 우르르 운동장으로 나왔다. 그게 이 학교의 법칙인가 보았다.

해맑은 어린아이들의 모습이 K의 얼굴에 미소를 번지게 했다.

조그마한 아이부터 이미 어른의 키에 이르는 큰애까지 다양한 크기의 아이들이 우르르 운동장으로 몰려갔다.

한 20여 명쯤 될까? 아이들은 나름의 질서대로 줄을 서며 계속 자기들끼리 지껄였다.

K에 눈을 고정한 채 떠드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아이들에게 그녀는 크나큰 흥밋거리일 것이다.


[자, 여러분 여길 주목해 보세요.]


박 선생이 소리치자 아이들이 일제히 박 선생을 보았다.


[여기 K 선생님을 소개할게요. K 선생님은 광주 K 대학을 나와 T 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시다가 이렇듯 뜻한 바가 있어

우리 신안초등학교 홍다 분교에 부임하셨습니다. 여러분 K 선생님을 박수로 환영합시다.]


아이들이 와 하며 일제히 손뼉을 쳤다.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그녀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여러분 만나서 반가워요. 잘 지내도록 해요.]

[자, 그럼 선생님 5, 6학년 아이들 인솔 부탁하겠습니다. 바로 들어가자마자 왼편이 5, 6학년 교실입니다.]


K가 제법 큰애들에게 손짓하자 아이들이 그녀를 일제히 쳐다보았다. 그사이 낯익은 길선의 모습도 보였다. K가 길선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길선이 얼굴이 벌게져서 머리를 숙였다.


아이들은 비교적 나이가 많아서인지 그리 시끄럽지 않게 K를 따라 교실에 들어왔다. 이미 K 키보다 큰 애들도 몇 있었다.

교단에 서자 8명쯤이나 될까 한 아이들이 자기 자리에 각자 앉았다. 계집애가 셋이고 다섯은 사내아이들이었다.

교단에서 보니 제일 뒷자리에 유달리 크고 제법 근육이 발달한 사내애가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그 아이에게 비하면 길선은 아직 어린아이였다.

그 아이는 아직 사춘기의 풋내나는 얼굴이었지만, 이미 몸집은 어른의 그것처럼 보였다.


[자, 이름부터 부르겠어요. 박영식]


까무잡잡하고 비교적 깡마른 아이가 앞에서 대답했다.


[김 길선]


영식 옆에서 수줍은 듯 길선이 에 하고 조그마하게 소리를 냈다. K가 가벼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최 애숙] 


시골 아이치고는 얼굴이 깨끗하고 예쁘장한 여자아이가 책을 보다 대답했다.


[김 순이]


역시 통통한 몸집의 여자아이가 대답했다. 여자아이들은 벌써 철이 든 듯 조용히 앉아있었다.


[채 말봉]


이름이 이상했지만, 웃음을 참으며 K가 불렀다. 가운데 몸집이 크고 덩치가 비교적 발달한 아이가 변성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이는 정확히 K의 눈을 주시하며 한치의 움직임도 없이 팔짱을 낀 도발적인 자세로 앉아있었다. 눈이 꽤 매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 충석]


말봉이 옆에서 삐딱하게 앉아있던 아이가 예하고 크게 소리쳤다. 조용한 분위기를 깨는 충석의 큰 목소리에 다른 아이들이 킥킥 거리며 웃었다.


[석 충이] 


채 말봉 오른쪽에 앉아 있던 녀석이 코를 후비다가 대답했다. 비교적 지저분한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 말순]


뒷자리에서 한 여자가 모기만 한 소리를 냈다. 그 아이는 아이라고 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나이 들어 보였다. 가슴도 비교적 발달한 게 어른이었다.


[박 말순, 몇 살이에요?]

[저.....]

[부끄러워 말고 말해 봐요. 배우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에요. 오히려 칭찬받을 일입니다.]

[열아홉 살이래요.]


지저분한 석충이가 촐싹거리며 말했다.


[그러는 학생은 몇 살이에요?]

[열세 살 인데요. 충석이는 열네 살. 말봉이 형은 열여섯인데요.]

[석충이 학생이 대변인이군요.]


아이들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자, 좋아요. 음 길선이 나이는 알고. 박영식부터 나이 얘기하기예요. 선생님이 알아야 하니까 이름, 나이, 이렇게 말해보세요.]

[박영식이고요. 열한 살인데요]

[최애숙이에요. 열세 살입니다.]

[애숙이는 비교적 표준말을 쓰는군요. 이곳 출신이 아닌가요?]

[애는요. 서울서 왔는데요. 너희 아버지 매우 아프지?]


충석이가 촐싹거리게 끼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말봉이 옆에 충석이하고 석충이는 촐싹거리는 버릇이 완연하고 장난기가 철철 넘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K가 무시하고 애숙이 뒤편의 여자아이에게 눈을 돌렸다.. 


[김 순이여요. 열네 살 먹었는데....]


통통한 순이가 수숩어 하며 말끝을 흐렸다.


[자, 좋아요. 여기 급장은 누구예요?]


애들이 일제히 말봉쪽을 쳐다보았다. 말봉이 팔짱을 낀 자세 그대로 K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참 매섭게 쳐다보는군. 쟤가 좀 신경 쓰게 하겠는데.`


K는 말봉을 한 번 더 쳐다보았다.


[채 말봉 학생이 급장이에요?]

[예]


변성된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봉이 조용히 말했다. 어린놈이 제일 나이가 많다고 의젓한 척하는 모습이 K의 눈에는 우습게 보였다.


[자, 좋아요.선생님은 여러분을 만나서 반가워요. 비록 외딴섬이지만 여러분 열심히 공부해서 꼭 좋은 중학교에 입학하길 바라요.

물론 6학년에 해당하지만요. 자. 그럼 육학년은 채 말봉, 김 길선, 최 애숙, 박충석, 이렇게 네 사람인가요?]


몇몇 학생만이 조그마하게 예하고 말했다. 확실히 도시의 애들하고는 달랐다. 벌써 먹어 버린 나이가 이 아이들을 조숙하게 하지 않았나 생각되었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뭐랄까. 우울한 잿빛이라고나 할까? 활기가 보이지 않는 그런 공기가 온 교실을 휘감아 돌았다.


`참 힘들겠구나`


K는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처음 순수하리라고 생각했던 섬 아이들이 이미 벅차게 K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중, 고등학생 나이의 아이들에게 국민학교 과정을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이 K를 더욱 무겁게 했다.


[좋아요. 그럼 지금까지 박 선생님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을 것으로 믿어요.

중학교 본고사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 네 사람은 끝나고 자율학습 해도 좋아요. 선생님이 기꺼이 도와 줄 거에요.]

[말봉이 형하고 애숙이 빼놓고는 중학교 안 갈 건데요...]


충석이가 또 촐싹거리며 끼어들었다.


[마, 나도 안 가.]


말봉이가 처음으로 말을 했다. 저놈도 말을 할 줄 아는 놈이구나, 새삼 K가 말봉에게 눈이 한 번 더 갔다.


[형 아버지가 가만두질 않을 거구먼.]

[시끄러워 인마. 아버지 말 안 들은 지 오래됐어...]

[그럼. 또 도망가려고...?]

[이 자식이 죽으려고...]


말봉이 충석이를 때리려는 자세로 주먹을 쥐었다. 순간 K가 당황스러워졌다.

처음 부임한 선생님 앞에서 말봉은 금방이라도 폭력을 행사할 것 같은 자세로 충석을 노려보았다.

충석이 애처로울 정도로 고개를 바싹 숙이고 말봉을 쳐다보았다. 일제히 애들이 불안한 눈길을 말봉에게 주었다.

말봉의 눈빛이 날카롭게 공기 중에 빛났다. 애숙은 여전히 주위의 사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히 책을 보고 있었다.


[됐어요. 채 말봉 학생. 선생님 앞에서 그게 무슨 버릇이에요. 그렇게 배웠어요?]


말봉이 K를 힐끔 보고 주먹을 거두었다. 말봉의 우악함이 앞으로 K의 주목 대상이 될 것이다.

방금 전체 아이들의 말봉을 향한 눈빛에서 K는 아이들이 말봉에게 크나큰 주눅이 들어 있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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