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야설

청춘예찬 35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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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밍키넷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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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역에서 올라오자마자, 날씨는 춥지만 꽤나 햇빛이 쨍쨍한, 그리고 그 쌀쌀한 날씨를 이기기 위해서 라는듯 서로 손을 꼭 쥔 커플들이 길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다행히 약속장소에는 채윤이 없었다. 그녀가 먼저와서 이 추운날씨에 기다린다면, 왠지 모르게 미안할것만 같았다.

그의 성격상 그녀에게 미안한 일이 되어버리느니 차라리 자신이 벌벌떠는게 훨씬 편한것이기 때문이다.



'근데..무슨영화를 보지? 아무래도 공포영화를 보는것이...'



고등학교때 방구석에 쳐박혀 있던-정확히 말하자면 형준이 사다준-잡지에는 시시껄렁한 연애공략이 적혀 있었는데, 연인끼리의 공포영화는 필수라는 기사를 승민도 본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겨울이 다가오는 시즌이었고, 안그래도 추운데 공포영화를 개봉하는 골빈 감독이나 멍청한 배급사가 있을리 없었다. 

역시나 이 시즌에 개봉하는 로멘틱 코메디를 보는것이 가장좋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승민은, 어느 한지점에 눈길이 갔다가 눈이 등잔만큼 커져버렸다.




'저...저 아이가..'


 

승민은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사람은 많아도 숨을곳은 없었다.

한참이나 당황스럽게 허둥대던 승민은 별수 없이 건물안쪽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문이 투명하니 완전히 숨었다고는 볼수 없지만, 유리문이라도 앞에 있으니 덜 눈에 띌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은이....'



그녀였다.자신에게 선물했던 목도리와 똑같은 목도리를 두른, 그녀가 플룻이 들어있음이 확실한 가방을 하나 메고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예전과 똑같은 동그랗고 이쁜눈. 반짝이는 입술과 롱스커트를 좋아하는 취향역시 그대로였다.

하나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어깨를 넘을 정도로 길었던 그녀의 머리가 목부분을 살짝 덮을 정도로 짧은 단발머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때문일까.'



심경변화로 머리를 자른것일까.

승민은 무표정한 얼굴로 걷고 있지만 그녀가 왠지 슬퍼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 번화가는 예전에 하은과 데이트했던 장소였다.

승민은 가슴속깊이 자신의 무심함을 탓해야 했다.

채윤을 만난다는 설렘에 그런것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눈앞으로 지나가자 승민은 건물에서 나와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하은아. 나 지금 너무 행복해.'



승민의 눈으로 어떤 남학생 하나가 열심히 하은을 쫒아가며 말을 거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그녀가 가르치는 학원의 제자일 것이다.

제 3자인 승민이 봐도 상당히 귀찮게 조잘대며 말을 거는데, 착한 하은은 일일이 웃으며 다 받아주는 모습이었다.



'너도...꼭 좋은 사람 만났음 좋겠다.'


 

승민의 생각은 진심이었다. 비록 사랑이라고는 할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녀는 누구보다도 착했고 따뜻한 마음씨를갖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보여준 사랑이, 승민은 너무나 고마웠다.

그는 새삼스레 자신의 목걸이에 걸려있는, 그리고 하은의 왼쪽 네번째 손가락에 끼워져 것과 똑같은 반지를 살짝 움켜쥐었다.



"오빠."


"으악!"



누군가가 뒤에서 툭 치는 바람에 승민은 괴성을 지르며 저도 모르게 옆에 있는 건물 벽으로 사사삭하고 붙었다.

자신의 앞에는 연신 수상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한 여인이 있었다.



'이..이쁘다!'


 

밝은색 코트에 스커트. 그리고 그 밑으로 검은 스타킹에 둘러쌓인, 길게 뻗은 다리. 슬쩍 보아도 평소보다 많이 신경쓴 채윤의 모습이었다.

층층이 뻗은 그녀의 머리칼은 하얀 얼굴과 대조되면서 더욱더 빛나 보인다.



"왜 그렇게 놀라요?"


"아..아니 난 다른생각을 좀..."


"무슨생각 했는데요?"


"으..응? 아니뭐....그게..."


 

승민이 머뭇거리자 채윤은 갑자기 뾰로퉁한 표정으로 바뀌며 그의 앞으로 한발짝 다가섰다.

승민은 마치 성적표를 내민 중학생처럼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지만, 차가운 벽의 감촉만 느껴질 뿐이었다.



"뭔데요?"


"아..그게 말이지..그러니까...그래! 조금있으면 회사생활하는데 그거에 대해서 생각을..."


"정말인가요?"

 

"그럼!"


"그럼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해봐요."


"으윽..."



채윤이 양손을 허리에 올린채 상체를 구부려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눈이 아닌 반짝반짝 빛나는 입술에 먼저 눈이 가는건 어쩔수 없었다. 너무나 맑은 채윤의 얼굴을 보자, 늘 그랬던 지병이 도지기 시작한다.



"정말..회사 생각을 했나요?"


"그..그게...그러니까.."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단연컨데 아마도 채윤은 사기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상스럽게도 그녀의 눈을 보면 거짓말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채윤에게 사기칠수 있는 사기꾼은 아마 맹인 사기꾼이 아닌이상 힘들것이다.



"역시...거짓말이었군요."


"거짓말이 아니고...그게..."


"말해봐요. 뭔데요?"


"그게..."



사실 승민은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렇게 이쁜 여자친구 앞에서, 그것도 그 여자도 알고 있는 예전 여친을 훔쳐보고 있었다는것은 입밖에 꺼내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그렇다고 또 한번 거짓말을 할수는 없었다. 예리한 채윤은 다시 눈을 바라보라는 엄청난 명령을 내릴것이 틀림없었다.



"하은이를 봤어. 방금."



채윤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토라졌을거라는 생각에 승민은 괜시리 또 미안해졌다.

앞으로는 채윤의 눈을 보고도 자유자재로 뻥을 구사할수 있는 능력을 반드시 키우고 말아야 겠다는 실없는 다짐을 할때에, 자신의 손을 잡는 그녀의 감촉에 승민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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