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야설

(환타지야설) 선택 - 1. 숙제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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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밍키넷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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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숙제란 성가신 것이고, 그걸 해결해야만 휴식이 주어진다는 것은 누구나가 잘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오늘 일은 쫌 그랬다. 한동안 일을 쉬고 있던 나에게 내려진 그 분의 지시사항은 다른 때와 달리 독특한 구석이 있었다.

이번 이벤트에서 멀찌감치 물러나 앉아있던 나에게 일이 돌아온 순서도 탐탁지 않았을뿐더러, 감정이나, 자신의 판단이 가미되지 않던 지난 사례들과 비추어 볼 때, 이번 건수는 좀 묘한 구석이 있었기에 말이다.


‘뭐 별것이 있겠어? 이벤트를 마무리하다 보면, 의례 확인된 테두리에서 튕겨 나가는 돌발 건수 들이 종종 있지 않겠소?’


‘아니, 이번 것은 좀 느낌이 달라.’


‘그 분께서 내린 결정에 대해 지금까지 별다른 일은 없었다오!’


‘설마……. 이벤트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그럴 수도 있지. 워낙 방대한 영역이라, 혹여 그럴 수 있지. 그렇지만 말이야, 다른 지역에서는 이미 이벤트의 종료까지 거의 시간 재기 정도로 소일하고 있는 걸로 봐서, 이제 막바지라는 느낌이 아주 강하거든? 밀어붙이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하질 않나? 에구구, 내 정신 좀 봐. 우리의 업무지침 몰라? 내가 괜한 소릴 했나 싶네.’


‘내가 왜 모르겠어? 현업에서 어느 정도 손을 뗐다고 그것까지 잊을까?

첫째, 절대로 왜냐고 묻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건 이미 정해진 수순이 진행될 따름이니까.

둘째, 절대로 자신이 스스로 판단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심부름꾼에 불과하니까.

셋째, 절대로 거역하거나 배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도망칠 길은 없으니까.

넷째, 절대로 실패는 없다. 왜냐하면, 실패는 상대방 측을 돕는 결과가 되니까.

다섯째, 절대로 배반은 없다. 왜냐하면, 그 즉시로 우리의 존재는 의미를 상실하니까.

이래도? 어때, 이만하면? 그런대로 잘 숙지하고 있지?’


‘그것만 봐선 알 수 없지. 하루에도 수만 건씩 내려오는 새로운 업무지침 중에서 겨우 다섯 개 외우고 있는 걸 가지고, 그렇게 야단법석을 떠남?’


‘현업에서 물러나 앉았다고 재주가 녹스는 건 아닌데…. 난 불만 같은 건 없었지만, 왜 번번이 중요한 이벤트에서 내가 빠지었는지, 이해가 안 갈 때가 많았어.’


‘의심은 금물이야.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 사고, 결정까지도,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언제나 그러셨잖아?’


그건 그랬다. 하지만, 이번 이벤트는 유달리 세인의 관심을 끌어온 것이기에 모두가 그 안에서 주어질 자신의 역할에 잔뜩 기대를 한 것은 분명했다.

명예로운 자리로 승격된다든가 하는 사치스러운 기대를 하지 않더라도, 자못 의미심장할 정도로 팽팽한 긴장감이 수반됨과 동시에, 임무가 주어지는 순간은 마치, 월계수를 쓰는 것 같은 심정을 곁에서도 확실히 느낄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그건 그렇고, 예전처럼 또 그렇게 우악스럽게 일 처리 할 셈이야? 자넨 다 좋은데, 너무 감정에 치우치는 느낌이 있단 말이야. 거 있잖아? 우리들끼리 하는 얘기로, 자네의 스타일은, 뭐랄까? 손에 피 묻히는 것을 너무 밝히는 것 같은 그런 스타일 이라고나 할까?’


‘난 단호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도 좋지만, 반드시 그 마무리를 보고 느끼는 자들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고리타분한 종자 라니깐?’


‘그저 슬쩍 스치면 될 걸 가지고, 꼭 겁을 주고, 주변이 소스라치게 저지르고 오는 건, 그래도 좀…..’


‘혹시 모르지, 그런 나의 스타일 때문에 여태껏 일선에서 물러나게 하셨는지도…..그분의 하시는 일이란 게 그렇잖아?’


‘이번엔 잘 하라고! 나 그만 가!’


나도 가야만 했다. 벌써부터 나를 부르는 신호가 오고 있었고, 천천히 내 전신이 긴장되어 오고 있었으며, 등 쪽은 벌써 탱탱하게 뭉쳐가는 것이 곧 무엇이 일어날 것만 같은 느낌이 엄습했기 때문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사실 실제로 얘기하면 이런 대화는 겉으로 들리질 않는다. 단지, 그분의 말씀이 공중을 타고 내 뇌리에 전해질 뿐, 그 어떤 누구도, 그분의 음성을 가로챌 수도, 엿들을 수도 없었기에……


‘오랜만이네….’


‘네….’


‘이벤트의 마무리 시기가 임박한 것은 잘 알고 있지?’


‘네.’


‘그래서 말인데, 아직도 이벤트의 마무리를 위해서, 선택돼야 할 대상들에 대한, 정확한 집계가 흔들리고 있어서 말이지….’


‘정확히 어떤 의미이신지….’


‘자네를 비롯한 마지막 판정관들이 지금 현장으로 급파될 예정이지…. 자네도 잘 알 거야.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는 자네 같은 일꾼들이 현장으로 파송되는 일은 드물지. 다 자기가 하기 나름이겠지만, 한 사람이라도 억울함이 있어서는 안 되겠기에….’


‘물론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 건 수는 예전처럼 경중을 따져서 마무리하라는 것이 아니고, 판정관으로서의 임무에만 충실해 달라는 것일세.’


‘정확히 무슨 말씀이신지?’


‘자네가 가장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라고 판단해서, 이벤트에 속할 수 있는 인물인지, 아닌지를 최종적으로…..정말 최종적으로 가려서, 급전을 띄워 달라는 것이야. 뭐 어려운 것은 아니고, 자네의 판단에 따라, 아니, 자네와 같이 파송되는 다른 지역의 판정관들도, 자네처럼 보내어질 결과가 도착한 후, 접수되는 대로 이벤트가 연이어 시작될 예정이라서 말이야.’


‘그렇다면 이번에는 그들이 제가 보기에, 과연 이벤트에 적정한 수준을 유지하는지, 어떤지를 가늠만 해보라는 말씀이신지요?’


‘그렇지, 바로 그거야….역시 관록 있는 명성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먼! 부탁하네….별로 어려운 임무는 아니라고 보는데, 어떻겠나? 해 볼 텐가? 그런데, 한가지 문제점은 단 하루밖에 남질 않았다는 점이야. 하루라는 시간 속에서 객관적인 판단이 성실하게 도출될는지, 정확히 판단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자네 같은 관록이라면, 충분히 임무를 수행해 줄 거라고 믿고 부른 거지.’


‘하겠습니다. 저희들의 판단이 이벤트의 마무리이자, 도화선이 될 터인데,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기회가 있을 수 있을는지요!’


‘그런가? 암튼 고마워. 보살핌이 있기를 기원하네.’


그분의 브리핑이 끝났다. 항상 브리핑의 수순 속에서는 속속들이 이루어질 앞으로의 임무에 대한 세세한 계획이 같이 전달되는 것이 특징이었다.

꾸며진 이야기가 영상으로 흐르듯이 우리에게는 찾아가야 할 대상과 그간의 스토리가 빠짐없이 전해지고, 우리는 그것을 따라 몸을 맡기면 그뿐 이었다.

자, 이제 가야 할 시간이었다. 등이 뻐근하게 긴장됐다. 시간은 너무 짧았고, 해야 할 일은 산처럼 쌓여 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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