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야설

남자들의 상상 - 상편 28장

작성자 정보

  • 밍키넷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영권이 눈을 떴을 때는 언젠가 한번쯤 상상해보았던 그대로 의자에 묶인 채였다.

입은 녹색의 테이프로 봉해져있었고 손은 의자 뒤로 꺾여서 무언가에 의해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물론 다리도 녹색 테이프로 의자 다리에 꽁꽁 감겨있었고 몸통도 지나칠 정도로 많이 반복되어 테이프로 붙어 있었다.

영권은 좌우로 고개만 약간 돌릴 수 있었는데 곰곰히 생각해보지 않아도 거기가 어디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곳은 전에 들른 적이 있는 동수의 자취방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지난 밤에 동수와 술을 마시던 생각이 났다.


"그런데 왜 이런 짓을?"


영권은 거칠어진 파도처럼 밀려오는 황당무개함과 그로 인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온몸을 흔들어보았지만 

제자리에서 뒤뚱거리기만 할 뿐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시간을 알 수 없는 어두침침함이 방안을 적시고 있었다.

대략 짐작에 새벽녁쯤 된 것 같았고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고 있지 않았다.

방은 텅텅 빈 상태였다. 의자와 거기에 묶인 영권을 제외하면 아무 것도 없었다.

아니,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방의 일부처럼 기원을 알 수 없이 매달려 있는 기다란 거울 하나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안의 남자는 정말 처참한 모습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영권은 다시 한번 피가 끓는 것을 느끼며 온몸의 근육들을 쥐어짰다.

결과는 더 비참했는데 뒤뚱거리던 의자는, 영권은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져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유년시절에 의자를 뒤로 젖히고 건방지게 앉아있다가 삐끗해서 뒤로 넘어박히듯이, 

그러나 그때와는 달리 자유롭지 못한 팔 다리때문에 모든 충격을 등뼈와 머리통으로 느껴야만 했다.


뒤통수를 바닥에 부딛힌 영권은 잠깐 동안의 몽롱함때문에 분노를 잊을 뻔했지만 금새 동수의 얼굴을 기억해냈고 

다시 만나면 그를 지금의 자기와 똑같이 묶어놓고 늘씬하게 패줄 각오를 했다.

아침 운동을 해서인지 코가 시원해졌고 턱에 힘이 바짝 들어가 이를 갈고 싶어졌다.


부드득거리며 이를 갈고 있는데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려 했지만 몸에 가려 보이지가 않았다.

누군가 분명히 방안에 들어왔는데 조롱하듯이 모습을 보이지 않고 사각에 서있었다.

영권은 당연하게도 그게 동수라고 생각했고 허파에서 맴도는 고함을 지르며 경기를 하자 그가 다가와 영권을 내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영권의 눈에는 핏발이 터질듯이 부풀어올랐고 동수는 술에 취한 듯한 몽롱한 눈으로 응시하다가 

영권의 어깨를 잡고 의자를, 영권을 일으켜 세웠다.

세워진 영권은 한 차례 길게 발악을 했지만 동수는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불쌍한 인간."


가끔씩 마주치는 동수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왜? 뭐가? 무슨 짓이야?"


영권은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간절한 울림이 닫힌 입안으로 흩어질 뿐 소리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한동안 발작처럼 몸을 움찔거리던 영권은 억울함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흐느낌은 그런대로 언어가 되어 우울하고 검은 방안을 울려댔다.

동수의 발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그가 신고 있는 양말이 보였을 것이다.

그 녹색은 눈물에 번져 흐릿하게 눈속을 메웠고 새로운 의지를 충전한 영권은 고개를 들어 동수를 노려보았다.

동수는 영권의 입을 두르고 있는 조금은 젖어있고 느슨해진 테이프의 끝을 찾아 풀기 시작했다.

테이프에 붙은 머리카락들이 찌익 찌익 하는 소리를 내면서 함께 떨어졌고 마지막으로 입을 가로막고 있던 부분이 떨어지자

 엄청한 욕설이 토물처럼 쏟아졌다.


"야! 이 개새끼야!"


철썩, 소리와 동시에 날아든 동수의 손바닥이 스위치를 잠그듯이 영권의 목소리를 멈추었다.


"시끄러워. 뭘 잘 했다고 큰 소리야?"


동수는 예전이나 어제와 같은 예의 바른 아르바이트생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의 목소리는 너무 차분해서 저 깊은 우물의 바닥에서 울리는 것과도 같은 음산함을 담고 있었다.

손바닥과 목소리에 놀란 영권은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었다.


"도, 도, 도, 도대체 이, 이, 이게 무슨 짓이야?"


그러나 질문에 돌아온 것은 또 한번의 손바닥이었고 모욕이었으며 돌아버린 억지였다.


"무슨 짓이냐고? 도대체 넌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줄이나 알고 그러는 거야? 정신 못 차리지?"


분을 이기지 못했는지 급기야 동수는 이번에는 발바닥으로 영권의 가슴을 걷어찼다.

뒤로 일 미터쯤 밀려나면서 나동그라진 영권은 충격으로 힘든 숨을 몰아쉬었다.

영권은 눈도 뜨지 못한 상태에서 여전히 동수가 미친 이유가 궁금했지만 도저히 알 수는 없었다.


"그래. 내가 잘못했다고 치고 이유나 알고 맞자."


일으켜주지도 않는 동수에게 영권은 담배 연기가 찌든 것 처럼 누렇게 뜬 천장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어떻게든 이 미친 시간을 벗어나야 할텐데 말이다.

영권은 다시 한번 그 이유를 물었다.

동수가 보이지도 않았지만 그의 귓구멍에 자신의 목소리가 박히고 있고 그래서 조금만 참으면 어떤 소리라도, 

그게 대답이든 욕지거리든 입밖으로 기어나올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슬금슬금 기어나오는데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결국 동수는 입을 열었던 것이다.


"선화씨한테 그러면 어떡해?"


그래, 이제 이런 미친 짓거리를 하는 이유가 나오는구나.

그런데 선화씨라니, 내 마누라를 두고 하는 말이렸다. 그런데 선화씨라니, 

사모님도 아니고 아주머니도 아니고 선화씨라니. 그건 너무 가깝거나 먼 표현이 아닐까. 그러나 영권은 기다렸다.


"어떻게 선화씨를 두고 다른 여자와 놀아날 수가 있냐고."


영권은 순간 동수가 자신의 전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직감했고 다시 한번 선화가 원망스러웠다.


"어린 녀석과도 놀아난 거냐."

"아냐, 그 여자가 다른."


거기까지 말하는데 갑자기 나타난 동수의 발바닥이 영권의 목을 짓눌렀고 그 이상은 말하지 못했다.


"조용히 해. 어디서 변명을 하려고. 그런 거짓에 내가 속을 줄 알아?"

"거짓말이 아냐. 우린 이혼하기로 했어. 그래서 따로 살고 있는 거야."


영권은 사력을 다해 마지막 해명을 꺼내놓았다.

입을 막으려던 동수는 그 말을 듣자 몇 프로는 납득이 간다는 듯이 발을 치우고 뭔가 생각 하는 듯 했다.

그러다가 의자에 묶인 영권을 일으켜 세웠다. 여전히 어떻게 할지 생각하고 있는 눈빛을 보며 영권은 물었다.


"그런데 넌 나를 욕하면서 어떻게 남의 여자를, 그것도 사장의 아내를 탐할 수 있는 거지? 불공평하지 않아?"


동수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납치된 주제에 까불지 말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난 당신과 달라. 난 선화씨를 사랑했지만 섹스같은 건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제부턴 그녀의 모든 걸 사랑해도 되겠어. 

그렇지? 당신과 헤어졌다니 말이야. 하긴 당신에겐 어울리지 않는 여자야, 과분한 줄 알았어야지. 그녀는 이제 나만을 위한 순수한 여자가 될 수 있어."


동수는 기대에 찬 아이마냥 들뜨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모양새가 영권의 눈에도 확연히 들어왔고 영권은 실소가 났다.

키득키득 새어나오던 웃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를 기가 막히게 속아넘겼을 때의 통쾌함이랄까.


그런 감정이 왜 느껴졌는지는 몰랐다. 신경 어디가 끊어지거나 고장났을 수도 있겠지.

영권은 웃음이 멈추지 않아서 미칠 지경이 되었고 어의 없는 동수는 영권의 머리를 난타했지만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침을 질질 흘리며 눈물, 콧물까지 조롱하듯 흘리며 웃는 영권을 두들겨 패던 동수는 마지막 수단으로 

녹색 테이프를 풀어 입에서 뒷통수를 돌아 다시 입으로, 영권을 칭칭 감아버렸다.


"역시 제정신이 아니군. 어쩌다 그렇게 된 거야? 사는 게 그렇게 심심했나."


동수는 입이 가려지자 조용해진 영권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영권은 속으로 계속 웃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겉으로는 고개를 떨군 채 얌전히 있으면서 동수가 사라지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럴 수 있다면 다시는 보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동수가 돌아오지 않거나 스스로 그 방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마침내 동수가 밖에서 문을 잠그며 사라지자 영권은 근육을 재가동해서 끈적끈적하게 몸을 감고 있는 테이프를 풀어보려고 노력했지만 

한 줄도 만만하게 끊어지지가 않았다.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느슨하게 되거나 그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기에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고개를 돌려 거울을 보았더니 얼굴에는 멍과 핏자국이 그럴싸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일단은 좀 쉬어야겠다. 담배라도 한 대 피우면 좋겠지만, 지금은 숨쉬기도 쉽지가 않다.

잘못해서 콧구멍이라도 막힌다면 그대로 가는 거다.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해보자. 그 방법대로 성공해서 여기를 나간다면 그때 담배를 피우기로 하자.

두 개를 피울수도 있는 여유가 있을 거야. 얼마나 좋으냐, 그때를 기다리면서 조금만 참고 빨리 생각해보자.

그렇지만 방법이 떠오르는 대신 동수의 말들이 생각났다.

선화를 집착하고 있는 것 같아서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았던 것이다.

지금 상태에서는 모른 채 하고 있어도 욕을 먹지는 않겠지만 동수의 넋이 나간 듯한 얼굴을 본 뒤라서 그런지 걱정이 이어졌다.


"대체 처신을 어떻게 했길래 저런 녀석까지 나타나서 일을 벌이는 거야!"


걱정은 노여움으로 바뀌고 분노는 혈압이 오르게 했다.

높은 혈압으로도 풀리지 않는 포박, 영권은 퍼뜩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자 허기가 과장되게 느껴졌다.


선화는 며칠이나마 가슴의 짐을 덜어놓고 지낼 수 있었다.

영권이 상호간에 얽혀있던 실타래를 깨끗이 자르고 떠나간 후로는 가슴을 조리며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었다.

마치 수술을 받아 혹을 떼어낸 것처럼 일시적인 고통이 따랐지만 앞으로 시간이 흐르고 상처가 아물면 한결 괜찮을 것이다.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말할 순 없어도 힘든 기간이었음은 틀림이 없었다.


처음 경험한 사건과 감정들,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

선화는 자신이 성인이라는 사실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또 사는 동안 새롭고 충격적이고 어려운 일은 얼마든지 일어나겠지.

욕심낼 필요가 있을까, 집착할 필요가 있을까.


이젠 더 원하는 게 생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 평화로움이 계속해서 유지될 수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세상을 사는 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새로운 자극이 생기고 열등감이 생기고 욕심이 생긴다면 스스로도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법이겠지.

그래도, 힘든 업무를 끝낸 후처럼이라도 당분간의 여유가 허락되기를 빌뿐이다.


그렇게 바라던 오후 중에 하나처럼 평범하고 한가로운, 늦은 오후였다.

창문을 조금 열어놓아도 그리 춥지 않을 만큼 봄이 가까이 있었고 바람마저 향기롭게 피부를 스치며 흐르고 있는 좋은 날.

선화는 집에서 영권의 남은 짐을 분리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었지만 지난 날의 기억도 함께 정리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기는 했다.

벨소리가 울렸다. 늦은 오후의 방문자는 누구일까. 병희가 병원 문을 일찍 닫고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누군가 물건을 팔기위해 초인종을 눌렀을 수도 있다.


문도 열어주지 말고 거절해 버려야지. 그런 귀찮음을 허락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한 때가 아니니까.

선화는 현관문 앞으로 갔다.

그리고 누구냐고 물었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어 어안렌즈를 통해 밖을 보았으나 너무 가까이 서있는 사람이 보이자 않았다.

관심을 꺼버릴까 생각했지만 선화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다시 한번 외치듯 물었다.


"누구세요!"


그러자 밖으로부터의 음성이 철문을 뚫고 집 안으로 전달되었다.


"저예요, 누나. 동수."


처음에 선화는 금방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동수라는 이름을 잊고 지낸지가 오래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이름이 누구의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지금 그 사람의 방문이 어떤 위험성을 갖는 다는 것을 느꼈을 때 

선화는 잡상인을 회피하는 것보다 강도 높은 방법을 써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망설이고 있을 때 밖에서 다시 들려왔다.


"저 휴가 나왔어요. 잠깐 누나 얼굴 좀 보려고 찾아왔어요."


모범장병 같은 목소리로 바르게 말하는 동수, 휴가를 나온 그가 자기를 보고 싶어서 잠깐 들렀단다.

힘든 군생활을 하다가 나온 사람을 매정하게 돌려보내야 하는 걸까.

선화는 측은한 마음이 생겼고 동수는 잠깐 동안의 추억을 간직한 좋은 동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마치 오래 걸리지만 예정되어 있는 일처럼 선화는 천천히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우당탕 하는 소리를 내며 우악스럽게 문을 밀고 들어왔다면, 그랬다면 당장에 동수를 쫓아버렸을 것이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하지만 그는 조용히 문 근처에 서있었고 차분한 표정으로 선화를 보고 웃었다.



전체 1,808/ 1 페이지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