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야설

남자들의 상상 - 상편 2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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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밍키넷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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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는 점점 추워지고 있었다.

팬시점에 도착한 선화는 새로 온 아르바이트생에게 금전출납기를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오후 한 시가 되었고 선화는 잠깐 가게를 비우겠다고 말하고 거리로 나갔다.

사람들은 지나간다. 서로를 피해 각자의 갈 곳으로 스쳐 지나갔다.

거리를 걷는 많은 사람들은 실제 존재하는 사람들일까.

택시가 서자 상념에 젖어 있던 선화는 말 없이 요금을 지불하고 내렸다.

애써 찾을 필요도 없이 병희의 정신과 의원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어둡고 눅눅했다.

요즘 이런 병원을 찾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깔끔하지가 못했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자 스테이션에 앉아있던 간호사(간호사 복장을 입고 있지 않다면 절대로 그렇게 보이지 않는 인상이었다.)가 인사를 해왔다.


"어떻게 오셨죠?"


병원에 무슨 일로 왔냐니, 차라리 왜 왔냐고 묻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두 시에 예약했는데요."

"아, 그러세요. 잠깐 앉아서 기다리세요."


아직 두 시가 되려면 십 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선화는 그다지 앉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소파에 엉덩이만 살짝 걸치고 앉았다.

삼분 전 두시. 놀랍게도 진료실 안에서 환자로 보이는 사람이 걸어 나왔다.

간호사는 재빨리 선화에게 들어가라고 말했다.

선화는 가볍게 노크를 하고 진료실 문을 밀고 들어갔다.

안에는 막 진료를 끝낸 듯 차트를 정리하고 있는 병희가 앉아 있었다.

잠깐 고개를 들어 선화를 본 병희는 어서 오라고 말했고 차트를 마저 쓴 다음 밖에 있는 간호사에게 가져다 주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자, 이쪽으로 앉으시죠."


다른 과 병원과는 달리 병희의 진료실은 일반 사무실처럼 되어 있었다.

가운데에 위치한 소파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마주보고 앉았다.

소파는 너무 푹신거려 엉덩이가 깊이 빠졌고 대신 무릎이 올라오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선화는 핸드백을 무릎 위에 올려보았지만 더 어색하게 느껴졌다.

병희는 생각했던 것보다 냉정한 얼굴은 아니었다.

약간은 멍해보이기도 하고 이상한 분위기를 갖고 있는 구석이 있긴 했지만 보통의 평범한 남자였다.

게다가 지위와 매력도 가지고 있는.


"지난번에 찾아갔을 때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는데, 그게 맞았군요."


병희는 선화에게 잠시도 시선을 떼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어디 아픈 데라도 있으세요?"


선화는 요즘들어 통 잠을 자지 못한다는 말을 비롯해 영권이 사라진 얘기까지 모두 병희에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어쩌면 좋겠냐고 물었다.


"약간의 우울증 증세를 보이고 있군요. 약을 조금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을 하더니 병희는 책상으로 가서 차트에 뭔가를 써내려갔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도 호전이 없으면 다시 오라고 했다.

그것 뿐이었다.

영권에 관한 안부를 묻지도 않았고 더 이상의 상담도 없었다.

선화는 약간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남편 동창이라고 찾아왔는데 사라진 친구의 안부조차 묻지 않고 약이나 타가라니.

혼자만의 기대를 한 자신을 탓하며 짧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밖으로 나오자 간호사는 복사기에서 인쇄되어 나온 처방전을 쭉 찢어 건네주었다.

이거나 갖고 꺼지라는 당당한 얼굴이었다.

선화는 신경질적으로 처방전을 채갔다.


"뭐 이런 병원이 다 있어."


상담을 받기로 한 생각은 완벽한 오산이었다.

아니면 대학 동창일 뿐인 병희에게 너무 큰 기대를 한 것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선화의 기분이 만신창이가 된 것만은 분명했다.

서둘러서 눅눅하고 음산한 병원을 빠져나갔다.


병희는 태양을 가리고 있는 블라인드 사이로 선화의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화가 난 뒷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선화는 병원에 다녀온 뒤로 오후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건 완벽한 모멸감이었다.

어쩜 안면도 있는 사람이, 더구나 의사란 사람이 자기를 그런 식으로 대하다니.


선화는 가게를 일찍 정리하고 집으로 향했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 집에 들어온 선화는 집이 예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인지 불이 꺼진 어두운 빈 집은 낯설기만 했던 것이다.

선화가 살림을 게을리한 탓에 집안은 구석구석 어지러져 있었고 먼지가 날릴 것 같기도 했다.

선화는 정장을 벗어서 한 편에 올려 놓고 그대로 소파에 길게 앉았다.


창 밖으로 보이는 불빛들은 외롭게 홀로 빛나고 있었다.

선화는 얼마 전 경험했던 동수와의 사랑을 떠올렸다.

그러자 아랫배가 따뜻해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이내 가슴이 답답해졌다.

방으로 들어온 선화는 컴퓨터를 켜고 채팅 사이트에 접속했다.

낚시에서 입질을 기다리듯 여자 회원의 방문을 조심스럽게 기다리고 있는 남자들의 방들이 빼곡하게 줄지어 있었다.


"낭만친구: 지금 만나실 여자분" 이라는 채팅방에 들어가자 "이랏샤이마세"라는 아이디의 남자가 환영 인사를 해왔다.

어디냐? 무엇 하고 있냐? 상냥한 질문이 이어졌다.

그의 정보를 조회해 보니 자신보다 열 살이나 어렸다.

결혼했다고 올리자 금방 괜찮다고 답변이 왔고 어서 만나자고 했다.

그때 누군가 집으로 찾아와 초인종을 눌렀다.

선화는 깜짝 놀라 거실로 달려나갔다. 최근 한 달동안 누구도 찾아온 적이 없던 집에 누가 방문한 것일까.


"접니다. 병희."


누구냐고 묻자 들려온 것은 뜻밖에도 정신병자 같은 정신과 의사 병희의 목소리였다.

선화는 왜 왔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잠시 기다리라는 말이었고 서둘러 소파 위에 있는 옷을 입었다.


"무슨..."


선화는 무슨 일이냐고 쏘아 붙일 작정이었지만 문을 열자 꽃다발이 먼저 들어왔기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그녀는 다음 행동을 하지 못하고 병희의 얼굴만 바라보고 서있었다.


"들어가도 될까요?"


병희가 묻자 선화는 말없이 먼저 들어갔고 병희가 문을 닫고 들어왔다.


"무슨 일이세요?"

"앉으라는 말도 안 하실겁니까. 아까 낮에는 미안했어요. 선화씨가 정말로 우울증에 걸렸는지 시험해 본 거니까 이제 화 푸세요."

"그게 무슨 말이죠?"

"제가 무례하게 대했죠. 그러면 우울증 환자는 더 심한 우울증에 빠지고 말죠. 하지만 선화씨는 화가 났죠?"


병희는 스스로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선화는 자신이 화가 났었다는 걸 병희가 알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부끄러웠다.


"그렇다면 선화씨는 아직 우울증 환자가 아닙니다. 약 대신 꽃이 필요하겠죠."


병희가 다시 꽃다발을 내밀었고 그제서야 선화는 그걸 받아 들었다.


"그리고 영권이는 어떻게 된 겁니까?"


선화가 앉자 영권이 물었다. 친구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던 게 아닌가.


"낮에 말씀드린 그대로에요. 그날, 병희씨가 우리 집에 왔던 그날 이후로 연락이 끊겼어요."

"그래요? 음... 차라도 한잔 주시겠어요."


생각을 하는 듯하던 병희가 말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술이 있다면 술도 좋습니다."


선화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자신이 병희를 오해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미안한 마음에 와인과 과일을 정성껏 준비하기 시작했다.

선화가 과일이 담긴 쟁반을 들고 거실로 나왔을 때 병희는 보이지 않았다.

반쯤 닫혀있는 방문을 열었을 때 병희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선화는 놀라며 뭐하는 거냐고 물었다.


"아닙니다. 나가시죠."


병희는 당황하는 선화와는 상관없이 웃으며 거실로 나왔다.


"신경쓰지 마세요. 저한테는 아무 것도 숨길 필요가 없으니까. 

저에게 진료를 받는 사람들의 비밀보장은 확실하게 지킵니다. 

그건 의사로서의 의무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선화의 얼굴은 여전히 상기되어 있었다. 선화에게 병희는 당혹스러운 일을 만들어내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제 아이디로 채팅을 하시면 어떡 해요. 그건 사생활 침해라고요."


"비밀이 많을수록 사람은 외로워지기 마련입니다. 저한테는 어떤 일이라도 숨기지 마세요. 그래야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선화는 병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무엇을 도와주겠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병희는 잔에 술을 따랐다.


"다른 남자를 만난 적이 있나요?"

"무, 무슨 말씀이세요. 자꾸 저를 괴롭힐거면 그만 돌아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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