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야설

남자들의 상상 - 상편 2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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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밍키넷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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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조금 가까워진 것은 다행이었지만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다시 옛날처럼 살 수는 없을 테니까. 아니, 그렇게 해야하는 것 아닐까. 하지만 병희가 순순히 말을 들어줄까.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무심코 올려다보니 집에 불이 켜져 있었다. 병희가 온 모양이다.

선화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이기 시작했다. 이러선 안되는 줄 아는데 알면서도 왜 그런지는 몰랐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에 선화는 벌써 오르가즘이 시작되는 기분이었고 오늘은 어떻게 자신을 만족시켜줄지 기대를 하게 되는 자신이 쑥스러웠다.


현관 문을 여니 역시 병희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남편과 달리 그는 티비를 보고 있지 않았고 선화가 들어오자 일어나서 그녀를 안고 키스해주었다.


"왜 병원에 있지 않고 돌아왔지?"


병희가 물었다.


"남편이 집에 가서 자라고 했어. 나 기다리고 있던 거 아니었어?"

"물론 가디리고 있었지."


병희는 선화의 옷을 찢듯이 벗겼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너의 육체를 해방시켜 주마. 병희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언제나 열정적으로 섹스를 한다. 신들린 사람처럼 열광적으로 선화를 사랑해 준다.

언젠가 그가 자신을 늙어가는 추악한 몸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30대 중반을 넘어선 남자의 몸치곤 썩 괜찮은 편이었다.

마른 몸매에 촘촘히 들어서 있는 잔 근육들을 보고있노라면 그 근육 하나하나를 만져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몸을 지금 안고 있는 선화는 남편에게서는 못 느꼈던 새로운 느낌과 감정들을 배우고 빠져들고 사로잡히고, 마침내는 포기한다.

병희는 지난 번처럼 이상한 행위를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선화는 너무 황홀해서 머리가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사랑이 끝난 후에 선화는 남편에게 했던 것처럼 병희에게 해주었고 미지근한 해산물 맛을 다시 느꼈지만,

그렇게 하고 싶어서 침을 삼키고 말았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선화가 물었다. 두려움이 생겼지만 이제 병희를 만나지 않고는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스스로 미쳤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안 되는 걸 어쩌란 말인가.


"글쎄, 영권이가 퇴원하려면 아직도 한 달 가까이 있어야 될걸. 그동안은 여기서 만나도 되겠지."


병희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것 같았다. 선화가 느끼는 불안함을 전혀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그런걸 생각지 않을 만큼 강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미치거나 하지 않을 사람. 일단은 그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가는 걸 기다리면서 상황에 따라서 계획을 세우기로 하자.

언젠가는 모든 것이 폭로되고 창피한 일이 생길지라도 일단을 그를 믿고 따라가자.

이제 그를 사랑하니까.


영권이 퇴원하기 전까지 거의 한 달 동안 선화는 이중생활을 계속했다.

낮에는 가게와 병원에서 보내고 밤이 되면 집으로 와서 병희를 만났던 것이다.

그동안 남편과 네 번의 관계를 가졌고 병희와는 스무번 정도의 섹스를 나누었다.

그런데 남편과 한 날은 매번 집으로 와서 병희와도 했다는 것이 특기할 만한 점이었다.


퇴원 날짜를 통보받은 선화는 전날 집안 대청소를 실시했다.

물론 병희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 였는데 그게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여기 저기 숨어있는 병희의 물건과 생필품들을 전부 모아서 버렸지만 그가 쓰던 일회용 라이터를 발견하면 깜짝 놀라게 되었고 

소심해져서 머리카락과 체모까지 싹 치우겠다는 일념으로 진공 청소기를 세 번이나 돌려댔던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병희가 흘린 정액이 마른 침대보나 체취가 묻어있을지 모를 이불도 모두 다시 빨아냈다.

그렇게 정리를 다 해놓고 병희와는 밖에서 만나기로 했다. 병희는 차를 몰아 도시 외각의 모텔로 들어갔다.

어쩌면 당분간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선화는 절실해졌다.


또각또각 구두굽 소리가 선화의 심장 소리처럼 크게 울리는 컴컴한 복도를 지나 싸고 고급스럽게 인테리어를 한 방안으로 들어갔다.

선화는 먼저 옷을 벗었다.

병희는 그녀가 옷을 벗는 걸 지켜보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천천히 하나씩 벗어야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병희가 씻으러 들어갔다. 머리를 말리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남편"


핸드폰을 새로 구입하고 처음 걸려온 전화여서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전화를 받자 영권은 어디냐고 물었다. 선화는 집이라고 말했다.


"집으로 전화했었는데."


남편의 일상적인 목소리가 너무나 무섭게 들려왔고 선화는 태연한척 반찬 거리를 사러 잠깐 나왔다고 대답했다. 

그때 샤워를 마친 병희가 알몸으로 나왔고 선화는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가 조용히 해달라고 요청했다.

병희는 고개를 끄덕였고 남편은 순순히 믿는 눈치였다.

선화는 내일 가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고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영권이야?"


병희가 옆으로 다가와 앉으며 물었다. 많이 놀랬냐고 물으면서도 그는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곧 선화를 일으키더니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그녀를 꽉 안아주었다.

선화는 그의 아름 안에서 해방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모든 복잡하고 기분 잡치는 일상으로부터의 비상구였고 의미 없는 나날에 대한 복수였다.

선화는 마음껏 소리를 질렀다. 누가 듣더라도 욕을 한다 할지라도 괜찮았다.

원하는대로 충분히 즐기고 싶었다.


"피가 나네. 생리중인가."


자세를 바꾸던 병희가 말하자 선화는 고개를 돌려 병희의 것을 보았다.

새빨간 피가 묻어있는 그것은 다른 때보다 더 자극적이었기에 손으로 쓰다듬어 주었고 병희는 손에 피를 묻혀 그녀의 가슴에 문질렀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선화는 병희에게 어서 넣어달라고 요구했고 두 사람은 서로의 만족을 위해 강렬한 움직임을 만들어냈다.

집으로 돌아온 영권은 뻣뻣하게 굳은 다리의 재활치료에 열중했다.

가게에 나가기 시작했고 밤에는 선화와 잠자리를 갖기도 했다.


생활은 두 달전의 평범하고 무난했던 시간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물리치료를 받으러 가기 위해 나갈 준비를 하던 영권은 화장대에서 코털 깎는 가위를 찾다가 우연히 병희의 명함을 발견했다.

아예 의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덮어두고 넘어가려 했는데 그런 게 발견되었다는 게 언짢았다.


"그런데 병희는 어떻게 알게 됐어?"


거실로 나가서 양말을 신으며 설거지를 하고 있는 선화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응? 그게, 당신 실종되고 여기저기 수소문하다가 알게 되었어. 그래서 당신 데리러 갈 때 같이 가달라고 한 거고."


선화는 고무 장갑을 벗고 담담하게 말하며 거실로 나왔다.

하지만 영권에게 청진기가 있었다면 그게 거짓말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챘을 것이다.


"음. 그랬군."


영권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다녀오겠다며 신발을 신고 나갔다.


물리치료를 받은 영권은 아르바이트생에게 전화를 걸어 오후 늦게 갈테니 잘 보고 있으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터미널로 가서 버스를 기다렸다.

아침에 챙겨 나온 자동차 열쇠를 확인하고 막 도착한 대천행 시외버스에 올라탔다.

버스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니 지나간 아찔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병원에서도 가끔씩 떠오르던 여자들의 기억. 그녀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버스에서 내려 택시로 주차장에 도착한 영권은 변함없이 서있는 자신의 차에게 감사하며 먼지가 수북히 쌓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싸늘한 기운이 마치 차가 죽어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과연 시동이 걸릴지 의문이었다. 키를 꼽고 힘차게 엔진을 깨워보았다.

신기하게도 세 번만에 시동이 걸리자 기분이 좋아졌다. 라디오를 켰다.

그동안 자고 있던 차를 위해 예열을 충분히 해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너 생각나는지 차에서 듣던 빗소리가 우릴 닮았다던 말.

함께 즐기던 하얀 와인 한 잔은 우리 눈물이라던 말.

그래, 사랑하는 사람 위해선 싫은 일도 참아내는 것.

네 연인까지도 울리지 않게 하는 것.

알아 한번 빗나갔던 사랑은 다시 어긋나기에 우리 사랑은 처음 만난 그때부터 아팠던 거야."


음악이 흘러나왔다. 거기엔 비가 내리고 있는 모양이다.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밖은 잘 보이지 않았다. 먼지가 가득 쌓인 차안은 의외로 아늑했다.

와이퍼를 몇 번 작동시키자 겨우 앞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영권은 세차장을 찾아서 차를 출발시켰다.

세차를 하는 동안에 아파트에 들리고 싶은 마음이 생겨버렸다.


그냥 한번 주위를 둘러보고 싶은 게 범인이 범행 현장에 꼭 다시 나타난다는 심리같았다.

혹시 우연히 마주치지나 않을까. 그러면 안부라도 물어보고 돌아가면 되겠지.

일단은 거기까지만 예상하고 차에서 내린 영권은 자신이 뛰어내렸던 장소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문앞에 도착했다.

거기서 초인종을 누를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고 영권은 얼른 옆집 문앞으로 가서 섰다.

문이 열리고 트레이닝 복 바지에 점퍼를 걸친 남자가 나왔는데 영권보다 키가 한뼘은 더 커보였다.


"빨리 갔다 와."


안에서 혜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알았다고 대답하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영권은 완전히 돌아가야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걷기 시작했다.

어차피 잠깐 동안의 연애 상대였을 뿐인데 더 이상 바보같은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 하겠지.

깨끗하게 닦여진 차가 영권의 승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영권은 차를 고쳐 왔노라고 자랑스럽게 말했고 선화는 다행이라고 말해주었다.

다음날 가게에서 지루하게 지내고 있는 영권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아직 번호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과연 누가 전화를 걸었는지 궁금했다.

전화를 건 사람은 뜻밖에도 병희였는데 저녁에 술 한잔 하자는 말을 했다.


"그럴까. 어디로 가면 되냐?"


영권은 7시에 중심가에 있는 술집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병희에 대해서 생각을 했다.

가끔 별난 생각을 하긴 했지만 수수하고 착실했던 대학생 때의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졸업을 하고 각자의 길을 가면서는 만남이 뜸했지만 나쁜 기억은 없었다.

또 기억에 남는 것은 지난 번의 초대였다.

그때도 술이나 한잔 하자고 장난 같은 초대를 했었는데 이번에는 어떤 만남을 준비하는 걸까.

영권은 아르바이트생에게 밥을 시켜주고 자기는 식사도 하지 않은 채 약속 장소로 향했다.


대리 운전을 할 생각으로 차를 몰고 갔고 근처의 주차장에 반듯이 주차를 해놓았다.

영권은 "스페이스"라는 재즈바 간판을 확인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병희는 이미 다른 일행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영권은 약간 실망스러웠지만 일단 자리에 합석했고 다른 사람들도 영권을 반갑게 맞이했기에 권하는 술을 한잔 받아들었다.

그러다가 한 여자와 눈이 마주쳤는데 잠깐 동안 마주본 그녀의 표정은 매우 민감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었고 

그것은 질의 수축과 함께 약간 찡그리는 듯한 얼굴의 표정, 

여자가 개인적인 성향으로 남자를 받아들이고 싶을 때 나타나는 본능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병희의 의대 서클 맴버들인 모양이었다.

영권은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그들과 공유한 추억이 없었기 때문에 혼자 멋적게 술만 홀짝거려야 했다.

그런 내막을 의식이나 하는지 그들은 오랜만의 만남을 자축하며 신나게 떠들어댔다.

그러다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한 남자가 영권에게 실례를 범해서는 안 된다며 술잔을 돌리기 시작했다.

영권으로부터 출발한 술잔이 여자에게 도착했을 때 여자는 영권을 다시 쳐다보았다.

눈빛, 약간의 미소, 이제는 빤히 바라보기도 하면서 여자는 술을 단번에 마셨다.


술잔이 돌아갈수록 사람들은 취해 갔고 어느 틈엔가 (다른 사람들은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여자는 영권의 옆자리에 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김유진이라고 해요."


여자가 먼저 술잔을 들고 인사를 해왔다. 영권도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하고 건배를 했다.


"재미없죠? 저희 모임이 원래 그래요. 겉으로는 다들 신나서 즐거워하는 것 같지만 서로에 대한 정은 별로 없어요."


그녀는 냉소주의자인 모양이다. 영권은 씁쓸하게 웃었다.


"병희 선배와는 어떤 사이세요?"


유진은 꾸준하게 관심을 표명하고 있었다.

영권은 마음의 결정을 내려야할 순간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결국 그녀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대학교 기숙사 같은 방에서 지냈었어요. 군대 가기 전까지. 그때 자주 술마시고 그랬는데."

"아, 그렇구나. 재밌는 사람인 것 같아요 병희 선배. 그런데 영권씨는 어떤 분이죠?"


그녀의 질문에 약간은 짜증이 났다.

진심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알고 싶다는 건지.

그가 할 수 있는 대답도 뻔했다.

솔직히 말해서 별볼일 없는 중년의 유부남인데 어쩔래.


"유진씨는 결혼했어요?"


이번에는 영권이 형식적이고 고의적인 질문을 했다.

아니라고 대답한 유진은 영권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으며 말했다.


"손이 참 크시네요."

웃으면서 넘겼지만 영권은 그날 밤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했다.

대화를 나누면서 두 사람은 조금씩 가까워졌고 유진은 가끔씩 영권의 무릎 위에 손을 얹어 놓고 말하기도 했다.

그럴때면 금방이라도 손을 잡아채 밖으로 나가고 싶어졌지만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한 걸음씩 걷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른다.

자리가 파해갈 무렵 영권은 헤어지고 나서 주차장으로 오라고 속삭였고 유진은 웃으며 알겠다는 눈짓을 했다.

그렇게 계획을 세우자 길게 늘어지는 모임 따위는 어서 마무리를 하고 헤어졌으면 하는 소망이 간절해졌다.


병희는 아까부터 두 사람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고 있었다.

당연히 본인 외에는 그런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스럽게 눈을 힐끔거렸지만 가끔씩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 사이에 흐르고 있는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유진이라면 대학 때부터 프리섹스를 표방하고 나섰던 후배가 아닌가.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몇 개의 부류로 나누어져 무리를 형성했다.

술을 더 마시러 가는 사람들과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섹스하러 가는 사람들.

영권은 먼저 돌아가겠다며 인사를 했고 병희와 악수를 했다.

병희의 미소 속에 숨어있는 의미를 읽지 못한 채 영권은 주차장을 향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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