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야설

남자들의 상상 - 상편 2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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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밍키넷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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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종도 울리지 않았는데 영권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거실에 몽롱하게 앉아있던 선화는 흠칫 놀라며 일어섰다. 

왔느냐고 물어보려 했지만 무표정한 남편의 얼굴을 보자 말이 쏙 들어가고 말았다.

영권은 선화를 한번 힐끗 쳐다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도 오랫동안 신경을 써서 볼성 사납게 굳어진 모습이 역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실내는 계속해서 조용한 상태로 유지되었으니 누구 하나 활기찬 소리를 내거나 서로를 부르는 소리, 

무심결에 나오는 하품 소리나 방구 소리조차도 내지 않았던 것이다.

두 사람의 무언으로 집은 그대로 죽어버렸다.

참을성이 약한 쪽은 선화였다.

성질이 급해서 지저분한 것을 보지 못하는 탓인지 아니면 물 속에서 숨을 참고 있는 것처럼 답답하게 지내는게 싫어서였을까. 

그녀는 화장실에 가기 위해 방에서 나온 영권에게 말을 꺼냈다.


"어떻게 할 거야?"


무심코 화장실로 향하던 영권은 거실 바닥에 붙어 우뚝 멈춰섰다.


"무엇을."


영권은 톤도 없고 리듬도 없이 무뚝뚝하기 그지 없는 말투로 되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답답하게 굴지 말고 말해봐."


영권은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어의가 없기도 하고 아내가 밉기도 해서 영권은 거실 대신 부엌의 식탁 위에 앉았다가 다시 거실로 가서 장식장을 장식하고 있는 

양주 한 병을 꺼냈으며 부엌으로 돌아와 잔을 꺼냈고 식탁에 앉아 술을 따라 마셨다.

술기운이 덜 퍼졌는지 말할 용기도 나지 않았는데 선화가 먼저 걸어와 맞은 편에 앉았다.

아내도 많이 변한 것 같았다.


"나도 한잔 줘."


먼저 술을 달라고 한 적도 없었던 선화가 잔을 내밀며 말했다.

영권은 말 없이 술병을 들어 독주를 그득하게 따라주었다.

온갖 인상을 쓰며 술을 마실 줄 알았는데 의외로 선화는 독한 양주를 잘 들이켰다. 한잔 더.


"우리 이혼해."


두잔째를 비운 선화가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

영권은 말문이 막혔다. 대신 바라보지 않던 선화의 얼굴을 보았다.

그렇게 진지하고 확고한 아내의 얼굴을 본적이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친구와 놀아난 주제에 월 잘했다고.


"이혼을 해? 누구 맘대로."


영권은 아내를 비웃었고 코웃음치며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야. 이런 상태로 살 순 없잖아."

"이런 상태? 이런 상태가 어때서? 서로 개인 플레이하면 되잖아. 좋아하는 남자 마음대로 만나고 술도 마시고 잠도 같이 자고, 안 그래?"


선화는 당신은 뭘 잘 했느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소모적인 논쟁을 시작하고 싶지 않아서 그대로 있었다.

무슨 소리를 하든 다 받아들이고 조용히 깔끔하게 끝내고 싶었던 것이다.


"왜 말이 없어. 내가 틀린 소리 했나. 각자 살면 되잖아. 당신 프라이버시는 절대 존중해주지."

"맘대로 해."


영권이 협상을 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선화는 먼저 일어서서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영권이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가 나와서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고 다음에 선화가 거실로 나와서 문단속을 했다.


밤이 되자 기온이 더 내려갔는지 밖으로 나오자 볼이 차갑게 얼어버리는 것 같았다.

영권은 무작정 걷기 시작했고 추위를 잊기 위해서 속력을 냈다.

하긴 추위를 음미할 마음의 여유도 없었긴 하지만 목적지도 없이 다만 빠르게 걸어갔던 것이다.

얼마를 걸었는지, 어디로 왔는지도 잘 알지 못하고 수 많은 횡단보도와 육교, 그리고 사람들을 지나오게 되었다. 

여기가 어디쯤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안면이 있는 여자가 앞에서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도 영권을 바라보는게 아는 사이인 듯 했다.


누구지, 어디서 봤더라, 뒤죽박죽인 기억의 창고에서 그녀를 찾은 것은 그녀가 바로 앞까지 다가와서 

서로 인사를 나누려고 할 때였는데 그녀는 이미 영권이 누구라는 것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전처럼 신비롭게 웃으면서 인사를 해왔기 때문에 영권은 걸음을 멈추고 대화를 나눌 준비를 했다.

여전히 그녀는 매력적이었다. 남자라면 한번쯤 욕심을 갖을 만한 외모와 그것을 부추기는 화장과 치장.


"근처에 사세요?"


영권이 묻자 그녀는 더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아뇨. 여기서 가게를 해요. 영권씨야말로 여기 사세요?"


그녀는 고맙게도 영권의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영권도 그녀의 이름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건 아니고 잠깐 산책나왔어요. 그런데 숙경씨, 어떤 가게를 하시나요? 전 지금 술을 마시고 싶은 기분인데 바쁘지 않으면 같이..."

"잘 됐네요. 제가 말하는 가게가 바로 여긴데. 들어가실래요?"


두 사람이 서 있던 장소는 숙경이 운영하는 싸롱 바로 앞이었고 오랜만에 만난 둘은 그런 우연을 반가워하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영권이 가게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자 잠시 후 숙경이 메뉴판을 들고 와서 앞에 앉았다.

조명 아래에서 보니 여전히 진한 화장이 핥고 싶은 충동을 만들어냈고 짙은 향수가 중추신경을 자극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인연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네요."


숙경은 여전히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고 영권에게 미소를 지었다.

기분이 좋아진 것은 영권도 마찬가지였다.

집에서 있었던 일은 어느새 잊혀져가고 지금 바로 앞에 앉은 아쉬움만 남기고 떠나갔던 여인에게 슬슬 욕심이 생기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병희와 먼저 친분이 있는 여자라서 더 소유하고 싶게 만들었다.


"그러게요. 다시 못 만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만나다니 정말 좋네요. 어떻게 지냈어요?"

"저야 늘 비슷해요. 가게하고 집만 왔다갔다 하면서 살고 있어요. 영권씬? 그런데 왜 술이 먹고 싶었을까."


숙경은 전에도 그랬지만 유혹적인 말투를 갖고 있다.

언제나 남자를 만나면 그물을 치듯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일까.

세상에 많이 닳아서 너무 노련하고 작위적인 매력이어서 거부감이 생길 수도 있지만 영권은 그런 것 상관하지 않고 그녀를 알고 싶었고 그러기로 정했다.


"집사람하고 싸웠어요. 사실은 좀 심각한 상태라서. 그러고 보니 숙경씨한테 말히기도 창피한 일이군요."


영권은 잠시 병희의 존재를 잊고 그녀가 병희와 연인관계로 지냈었다는 사실을 현재 상황에 대입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때는 이미 병희와 아내의 소식을 꺼내지 않고는 대화가 이어지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얘기하면 더 궁금해지는 거 알죠?"


섹시한 상담사로 둔갑한 숙경은 진지한 자세로 영권의 이야기를 들었다.

병희와 영권의 아내가 그렇고 그렇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좀 놀라는 표정이었다.


"병희씨가 지독한 사람이란 건 알았지만 정말 못됐네. 친구의 아내와 바람을 피우다니. 하지만 너무 실망하지 말아요. 

자기들 둘이 좋아서 그렇게 된 거 영권씨도 새로운 사람 만나면 되지."


영권은 병희와의 관계를 자세하게 묻고 싶었지만 그렇지 않기로 했다.

숙경이 병희에 대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걸로 봐서 한때의 연인이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혼을 하자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숙경씨 생각은 어떤가요?"

"글쎄요. 언젠가는 그렇게 해야하지 않을까요. 당분간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되겠군요. 

가끔 놀러 오세요. 제가 큰 힘이 되어드리지는 못해도 같이 대화를 나눌 정도는 되어드릴게요."

"그러죠. 고마워요."


사실 영권은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지만 

처음부터 속내를 드러내놓으면 어떤 여자라도 거부감을 갖게 될 테니까 신중하려 했던 것이다.

영권은 언제가 됐던지, 가능하면 빨리 숙겨의 육체를 갖고 싶었다.

병희와 아내에 대한 복수라는 의미에서도 말이다.


시간은 변비에 걸린 것처럼 더디게만 지나갔다.

영권은 작은 방에서, 숙경은 원래의 침실에서 각자의 공간을 점유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숙경은 영권이 나간 다음에 활동을 시작했는데 설거지를 한다거나 빨래 등의 직무는 유기하지 않았고 

원래부터 하던 일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부부라는 정신적, 육체적인 틀에서만 빠져나와 있었다.


영권의 뒷치닥거리를 하기는 싫었지만 더 많은 갈등을 만들어내지 않고 깨끗하게 헤어지고 싶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녀는 가끔 병희를 밖에서 만났고 밥도 먹고 섹스도 했다.

그가 언제라고 기약을 해주지는 않았지만 선화는 기다릴 줄 아는 여자였기 때문에 잘 참고 지낼 수 있었다.


아주 가끔 외박을 해도 영권은 그가 말했던 대로 절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마 그녀가 침실에 있는지 아닌지 몰랐을 수도 있다.

그만큼 두 사람은 서류상으로만 부부일뿐 절대로 부부가 아니었다.


영권은 가끔씩 숙경의 가게로 찾아가 술을 마시곤 했다.

숙경은 대화를 나눌수록 깊이가 있는 여자라고 느껴졌다.

비록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미모의 중년 술집 마담이라는 타이틀때문에 색안경을 끼고 볼지 모르지만 

그런 거지같은 사회적 관점따위는 구겨서 쓰레기 통에 넣어버리기로 한 영권이었다.


"우리 밖으로 나갈까요?"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던 숙경이 말했다.


"그럴까요."


영권은 그럴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밖으로 나가서 자유롭게 찌든 옷을 벗을 때.

두사람은 강변으로 향했다. 강을 따라 만들어진 산책로를 걸으며 자연스럽게 손을 잡게 되었다.

아직은 낮은 온도와 늦은 시간 때문에 사람이 많지 않았다.

어쩌다가 지나가는 술에 취한 연인들이 전부인 듯했다.


십분쯤 더 걷다가 벤치를 발견한 두 사람은 누가 먼저 이끌었는지 모르게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산책로가 강과 접해있다면 벤치는 반대편으로 도로쪽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버스 정류장처럼 천정이 있었다.

적절한 어둠이 흔적을 가려주고 추위 때문에 두 사람은 바짝 붙어 앉았다.


영권은 아무 말도 없는 틈을 타서 숙경의 어깨에 팔을 얹었고 숙경은 살며시 영권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마른 침을 삼키던 영권은 고개를 돌려 숙경의 입술에 가져갔고 그녀는 뜨겁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영권이 목을 핥기 시작하자 그녀는 거친 숨소리를 내며 몸을 비비 꼬았는데 그 소리가 너무 커서 강가까지 들릴 것만 같았다. 

영권은 물컹한 그녀의 가슴을 손아귀에 넣고 주물렀다.


"여기서?"


영권이 숙경의 원피스를 들어올리고 팬티 스타킹 및 팬티를 내리려는 순간 숙경이 말했다.

영권은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어떻게 해."

"그럼 모텔로 갈까?"

"아냐. 오늘은 됐어. 다음에."


참기 힘들었지만 영권은 그만 물러나기로 했다.

나중에 후회를 하는 일이 있더라도 숙경의 뜻에 다르기로 했다.

이미 그녀의 소유권은 자신에게 양도된 거나 마찬가지라는 유치한 생각을 했기 때문에 충분히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알았어. 그럼 오늘은 그만 들어가자. 하긴 날씨가 아직은 너무 춥다."

"삐진 거 아니지?"

"삐지긴 왜 삐져. 내가 그 정도로 밖에 안 보여?"


영권은 숙경을 가게까지 데려다 주고 택시를 탔다. 걸어가기엔 열정이 죽었다.

요즘같아선 살아가는 이유를 찾기가 힘들었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시골로 내려가 농사나 짓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러면 좀 편해질 수 있을까.


택시가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서는데 병희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영권은 고개를 돌려 병희의 모습을 확인했고 102동 앞에 택시가 서자 요금을 계산하고 내렸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알 수없는 감정이 조만간 자신을 집어삼킬 것 같아서 몸서리가 쳐졌다.


영권은 천천히 괴물처럼 버티고 서있는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열쇠로 현관문을 따고 들어가자 거실에는 불이 꺼져 있었는데 근래에는 두 사람의 기분을 반영하듯 밤에 거실에 불이 켜져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침실에서 새어나오고 있는 불빛을 보며 영권은 쿵하고 세게 현관문을 닫았다.


화장대에 앉아서 고개를 돌렸을 선화가 보이는 듯 했다.

영권은 신발을 벗고 침실을 향해 힘차게 걸어갔다.

문을 열자 진짜로 화장대에 앉아 있던 선화가 놀란 듯 고개를 휙 돌려 쳐다보았다.

그리고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영권에게 말했다.


"왜 이래. 나가줘."


선화의 일침은 이성을 버린 영권을 더욱 자극했고 공격성을 띠게 만들었다.


"병희 왔다 갔지?"


영권의 말에 선화는 움찔했지만 이내 정색하며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상관이야."

"이제 내 집에서 마음놓고 다른 남자와 놀아나는군. 그래 녀석이랑 재미가 좋았어?"


영권은 선화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왜 이래? 이거 놔!"


하지만 영권은 이미 평소의 눈빛을 잃고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선화의 뺨을 후려갈기며 침대 위로 팽게쳤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선화는 그대로 엎드려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물에도 흔들리지 않고 영권은 선화를 덥쳤다.


"아악! 미쳤어?"


선화는 심히 놀라며 영권을 밀쳐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영권은 썩은 고개를 탐하는 하이에나처럼 집요하게 달려들어 선화를 능멸하고 있었다.


"어때? 병희놈이랑 하는 것보다 좋지. 이 나쁜 년아. 하룻밤에 두 남자와 섹스하는 것도 좋지?"


영권은 반은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이기적인 욕구와 열등감들을 토해냈고 선화는 눈을 감은 채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엉망으로 흐트러져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선화를 그대로 방치한 채 영권은 작은 방으로 돌아가버렸다.


선화는 한참 동안을 그대로 울고 있다가 샤워룸으로 가서 오랫동안 몸을 씻었다.

그리고 무슨 죄를 지엇기에 남편에게 강간을 당하게 되었을까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몸이 떨려서 오래 생각할 수가 없었다.


방으로 돌아온 선화는 우두커니 앉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부엌으로 향한 선화는 조용히 서랍을 열고 고기칼을 꺼내 들었다.

중금속의 무게감과 날카로움의 전율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칼을 부여잡은 선화는 조용한 걸음으로 거실로 향했고 남편의 작은 방 앞에 서서 문고리를 돌렸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문은 잠겨있었고 선화는 일단 거기에서 멈추었다.

칼은 그냥 거실의 소파 밑에 넣어두고 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구고 술을 더 마시다가 새벽 두 시경에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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