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야설

남자들의 상상 - 상편 2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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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밍키넷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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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말이 그거야?"


영권은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어쩌면 그렇게 말한 것이 실수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권이 모르고 지나가도 될 말을 병희가 꺼내놓았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너에 대한 얘기가 아직 남아있지. 좀 미안한 얘기기는 하지만, 난 일종의 실험을 했어."


병희는 점점 더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것 같았고 그 뒤에 따라나올 엄청난 모욕을 영권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이 실험에 참여했다는 건 짐작이 되겠지?"


병희는 영권과 숙경을 보며 말했다. 영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내가 두 사람에게 초대장을 보냈었지. 그래서 둘이 처음 만났었고, 그런데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아? 아까 들어오면서 사실 난 많이 놀랐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운명의 기운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정도로 말이야. 그렇지 않고 두 사람이 어떻게 다시 만날 수가 있었을까. 

그건 아주 가능성이 희박한 일인데 말이야."


병희는 자신의 실험 결과에 만족한 연구원처럼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게 나와 숙경이를 대상으로 한 일종의 실험이었다는 말이냐?"


영권은 조금은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너를 대상으로 한 실험이었지. 숙경은 일종의 촉매제와 같은 역할을 했을 뿐이고 말이야. 

그런데 그 작은 실험이 이렇게 큰 결과를 가져오다니 신기하지 않아? 네 사람의 운명이 바뀌고 있으니 말이야."

"넌 어떻게 그런 일을 벌일 수가 있는 거냐? 사람 인생갖고 장난칠 권리가 너한테 있는 줄 알아!"


영권이 목소리를 높였다.


"처음부터 이런 결과를 예상하고 그런 건 아니야. 처음엔 네 말대로 장난 같은 짓이었지만 이런 결과를 만들어낸 것은 바로 너니까...... 

자, 이제 너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보는 게 어때?"


영권에게 병희는 사악한 묘수로 무장한 잔인한 사기꾼으로 보였다.

멋대로 남의 생에 끼어들어 망치고 있는 게 바로 그가 아니었던가.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서 일어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영권은 그만 돌아가자고 숙경에게 말했다.

이제 떠나가는 남편을 선화는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앉아있었다.


"잘 가."


그말만 하지 않았어도, 병희가 그 말만 하지 않았어도 영권은 곱게 돌아갔을 것이다.

돌아서던 영권은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분노를 참지 못하고 순식간에 식탁 위에 있던 무언가를 들어 병희에게 휘둘렀다.

모두들 그게 무엇인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처음에 알지 못했다.

일초 후쯤에 병희의 어깨에 과일을 찍어 먹던 포크가 박혀있는 것을 보고 선화는 비명을 질렀고 

숙경은 놀랐지만 꾹 참아냈으며 동시에 영권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내가 다시는 너를 상종하지 않겠다!"


그렇지만 정작 병희는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그대로 앉아서 잔에 남은 술을 비우고 떠나가는 친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집을 나가자 천천히 어깨에 박힌 포크를 빼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포크의 창에는 선명한 핏자국이 남아있었다.

괜찮냐고 물어보던 선화는 울기 시작했고 병희는 한손으로 어깨를 누르고 다친 팔로 묵묵히 선화를 안았다.


"뭐하러 그런 얘기를 했어. 하지 않아도 될 얘기를......"


선화는 이해할 수 없다는 뜻으로 말했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병희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난 괜찮아. 진실은 언제나 밝혀지는 법이지."

"그냥 묻어두는 게 좋을 때도 많아."

"그런가? 이걸로 화가 풀렸으면 좋겠군. 소독약 좀 있어?"


선화는 조금 진정이 된 듯 방으로 가서 소독약을 가지고 왔다.

정작 찔릴 때는 꿈쩍도 하지 않던 병희는 소독약을 바르자 아프다며 엄살을 피웠다.

선화는 웃었지만 어떤 게 진짜 그의 모습인지 궁금했다.


"다시는 못 보겠지? 친구로서도 와이프로서도......"


선화는 병희의 어깨에 소독약을 바르며 말했다. 긴 속눈썹 뒤에 숨어있는 눈동자는 슬픈 색깔로 젖어있었다.

병희는 가만히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건 알 수 없는 거야. 난 아무도 미워하지 않아. 내가 하지 못할 짓을 했다고 해도 미워해서 그런 건 아닐거야. 

누군가 내게 그런 짓을 했다 해도 그를 영원히 미워하지 못해. 잠깐 동안의 감정일뿐, 

계속해서 그 사람을 미워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어. 그러니까 만날 일이 있으면 만나게도 되겠지. 전같지는 않겠지만 말이야."


병희는 더 없이 차분한 모습으로 말했다.

그의 감정은 폭풍과도 같다가 바다가 되기도 하고 모래바람이 부는 사막이 되기도 하는 것 같았다.

선화는 불안함을 잊으려고 그 품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보는 불안함은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 그래서 그의 일부가 된다면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 왜 그런 일을 했던거야?"


병희의 품에 안겨있던 선화가 얼굴을 들며 말했다.


"그냥 갑자기 당신 생각을 했었어."


병희는 당시를 생각하는 듯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만날 방법을 생각하다가 영권을 밖으로 불러내기로 한 거지. 그날 내가 찾아왔던 거 기억나? 당신을 보고 나서 난 영권이를 만나러 갔어. 

당신을 보았으니 됐다고 생각하면서 내 자리로 돌아가려고 했었는데 운명이 나를 이렇게 이끌 줄은 몰랐어. 크고 새로운 경험을 한 것 같아."

"그렇다면 그 여자는 뭐야?"

"아, 그 여자는 일종의 양념같은 것일뿐이었는데 어느새 영권의 삶을 차지해버렸더군."


선화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 그를 이해하기란 힘든 일이란 걸 전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갈수록 더 힘들어지는 것 같았다.

그가 하고 있는 말은 진정한 사실이거나 아니면 완벽한 거짓말일 것이다.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만드는 바람이 가슴 속에 일고 있었다.

언제든 그런 바람을 잠재우고 평온한 호수가에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영권씨 생각보다 무서운 사람이네."


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긴 정적을 깨고 숙경이 말했다.


"...... 녀석이 날 너무 몰아세웠어. 그리고 나보다 더 파렴치한 놈이 그녀석이야. 당신도 옆에서 들었잖아, 우리를 완전히 가지고 놀았다는 걸."

"그야 그렇지만. 아무튼 아까는 너무 놀라서 참느라고 혼났어. 선화씨도 많이 놀란 모양이던데."


영권은 숙경의 말을 받아주지 않았다.

깊은 침묵이 이어졌고 숙경은 지금 정리중인 사람한테 괜한 말을 꺼낸 것을 후회했다.

영권이 정신적으로 힘들 시간이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고 더이상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할 때인가?"


영권은 의문이 들었지만 그것은 확인에 가까운 물음이었다.

자신에게 확신을 주기 위한 방법 중에 하나였다. 지난 날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선화와 지냈던 순간들이 항상 황홀했던 건 아니지만 언제나 삶의 위안으로 남아주던 아내가 아니었던가.

함께 보낸 수많은 날들이 등 뒤로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함께 나눈 사랑의 숫자를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쌓았는데 이제 모두 끝이라니 쉽게 될 것 같지 않았다.

어쩌면 모든 것이 자신이 책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병희의 시험에 들어 여행을 떠나지만 않았어도, 숙경과 키스만 하지 않았어도, 그냥 집으로 돌아오기만......

영권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늦은 후회를 한다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삶을 제대로 시작하고 잘 살아가야 한다.

앞으로의 미래만이 과거를 만회할 수 있는 길이었다.

영권은 프로포즈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왕 시작하는 바에야 적당히 뭉기적거리지 않기로 했다.

그것이 새로운 사랑을 위한 방법이었고 동시에 선화와 병희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한 영권은 복잡하게 얽혔던 마음의 모통이를 깨끗이 정리한 것처럼 가벼워졌다.

몇 년째 하고 있는 가게 일도 새로운 흥미를 보여주었고 구석구석에 쌓여있는 물건들에게도 관심이 가게 되었다. 

영권은 가게에서 파는 악세사리 중에서 가장 비싼 브로찌를 골라서 포장했다.

집으로 가면 숙경에게 선물할 작정이었다.


포장을 한 브로찌는 조심스럽게 점퍼 호주머니에 챙겨두었고 시간을 제촉하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영권은 밖을 보았고 오토바이 한 대가 가게 앞으로 나타나며 멈추어 섰다.

영권은 아무 의미 없이 지켜보고 있었는데 오토바이에서 내린 사람이 헬멧을 벗자 그게 동수라는 것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동수는 영권과 눈이 마주치자 꾸벅하며 인사를 했고 영권도 반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게 안으로 들어온 동수는 정식으로 인사를 했고 휴가를 받았다고 말했다.

짧은 머리와 검게 그을린 피부가 그의 생활을 말해주고 있었다.

영권은 자신의 군생활을 떠올리며 생활은 괜찮냐고 물었다.

동수는 웃으며 그렇다고 대답했고 술을 한잔 사달라고 말했다.

영권은 애초의 계획은 잠시 미루기로 하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며 흔쾌히 받아들였다.

동수는 가게를 정리하는 것을 도왔고 두 사람은 곧 술집으로 향했다.


안부를 묻는 것으로 첫 잔을 시작했고 군대라는 공통 분모 위에 쌓이는 두 사람의 화제 거리는 끝이 나지 않을 것처럼 계속 이어졌다.

그러다 마침내 방광이 차올라 더 이상 자리에 앉아있을 수 없게 되었는지 영권은 화장실에 가겠다며 일어섰다.

동수는 빨리 오라고 말하고 영권이 멀어지자 준비했던 백색의 음흉한 가루를 영권의 술잔에 넣었다.

가루는 미끄럼을 타듯이 부드럽게 술잔 안으로 빠져들었고 엄청난 눈가림으로 투명한 술 속에서도 전혀 찾아볼 수 없게 숨어들었다.


동수는 극도의 긴장감을 느끼며 가슴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화장실에 다녀온 영권은 개운해진 아랫배덕분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먼저 잔을 들어 술을 권했고 시원스레 술을 털어넣었다.

밤바람이 그리 차갑지 않은 것은 봄이 오고 있다는 의미였을까, 아니면 취해가고 있다는 것이었나.

영권은 약간의 온기가 느껴지는 듯 하다가 떨어지는 눈꺼풀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은 채 테이블 위에 머리를 처박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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