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야설

남자들의 상상 - 상편 5장

작성자 정보

  • 밍키넷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문밖으로 기척이 들린 것은 꿈이라고 착각할 만큼 잠에 끌려들어 가고 있을 때였다.

소리가 점점 다가옴에 따라 영권의 의식도 또렷해졌고 마침내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을 때 영권은 재빨리 일어서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누구세요?"


몇 발짝 앞서서 영권은 말했다.

아차, 그럴 입장이 못 되는데 집주인도 아니면서 주인 행세를 하는 건가.

그렇다고 누구라는 대답이 들리지는 않았는데 문을 두드리는 것으로 보아 초대를 한 주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누구란 말인가.


영권은 호기심의 파장이 사라질 때쯤 나타난 또 다른 호기심으로 문을 열었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은 왜일까.

문을 열자 엷은 붉은 색의 저녁노을이 먼저 집 안으로 흘러 들어왔고 그 빛을 실루엣 삼은 한 여인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빛의 조작 때문이었을까 시각의 조율이 아직 덜 된 상태에서 바라본 여자의 모습은 신비로웠고 흐릿하게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눈가의 짙은 화장 때문에 그녀가 똑바로 영권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향기, 어떤 향수인지 모르지만 진하면서 거부감이 없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 향기에 계속 취해있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가을이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기다리는 동안의 지루함 때문이었을까.


"어, 어떻게 오셨죠?"


영권이 물었다. 그리고 그녀의 립스틱 짙게 바른 입술이 움찔거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전, 초대를 받고 왔어요. 절 초대하신 분인가요?"


누군가 이 여자도 초대했다는 뜻이었다. 영권은 더욱 복잡한 미로를 만난 것 같았다.


"아닙니다. 저도 초대를 받았어요.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죠."


영권은 그녀를 오랫동안 세워둔 후에야 들어오라는 말을 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서로가 타인인 두 사람은 어색한 몸짓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럼, 여기서 기다리고 계셨던 건가요? 그런데 우릴 초대한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우리라, 그녀도 역시 이상한 초대를 받고 그 무엇인가에 끌려 여기까지 옷 것이다.

영권은 일말의 동질감 같은 것을 느끼고 그녀를 소파로 안내했다.


"저, 저도 누가 우리를 초대했는지는 모릅니다. 단지 초대장을 받았을 뿐이에요."

"그 초대장이란 게 이런 건가요?"


그녀는 핸드백에서 영권이 가진 것과 같은 모양의 초대장을 꺼내 보였다.

영권도 웃으며 안주머니에서 초대장을 꺼내 흔들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가슴이 설레이는 것을 느낀 영권은 자신을 소개했다.


"전 고영권이라고 해요. 만나게 돼서 반갑습니다."

"네. 전 지숙경이라고 해요. 반가워요. 그런데 언제부터 와 계셨던 거죠?"

"한 시간이 좀 더 된 것 같은데요. 조금만 더 기다리다가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래요? 저 같으면 궁금해서 그냥은 못 갈 것 같은데요."


숙경은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러니 한층 더 고혹적인 자태가 묻어났다.

그녀는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는데 그래서 영권의 가슴은 더 흔들렸고,

그녀는 마치 그걸 즐기기라도 하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영권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영권은 끊었던 담배를 피우고 싶어졌다.

그러나 처음 만난 여자에게 담배를 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참아야 했다.


"우리 두 사람을 동시에 아는 사람이 누굴까요?"


영권은 고심 끝에 말을 꺼냈지만 딱딱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릴 만한 것이 못 되었다.


"그렇게 고민하지 마세요. 시간이 되면 나타나겠죠. 아니면 말고."


그렇게 웃으며 말하는 숙경에게 영권은 한 방 먹은 셈이었다.

그래서 잠시 그대로 앉아 있기로 했다. 그냥 앉아 있기로 했지만, 사실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숙경 때문이었다.


커다란 가슴, 거기에 얼굴을 묻는 상상이 떠올랐고 알몸으로 앉아 있는 그녀를 생각했다.

저 어두운 계열의 옷을 벗고 나면 얼마나 새하얀 속살이 드러날지 궁금했다.

그리고 중요 부위를 가리고 있는 속옷은 어떤 종류의 것들일까.

그때 숙경이 일어서면서 허리를 굽혔는데 가슴 일부가 보일 것만 같아서 영권은 잠시 눈을 돌렸었다.


"술이나 한잔하고 있을까요."


장식장 앞으로 걸어간 숙경이 돌아보며 물었다.


"그, 그럴까요?"


아까부터 가끔 말을 더듬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느껴졌다.

내가 왜 이러나. 영권은 부엌으로 가서 잔을 준비했다.

그녀가 가지고 온 것은 향기만으로도 취할 것 같은 독한 양주였다.

냉장고에는 얼음도 없었고 물도 없었다. 잔에 반쯤 담긴 황금빛 독주가 찰랑거렸다.

그러고 보니 날이 거의 저물고 있었다. 영권은 불을 켜야겠다며 일어섰다.


"아니, 그냥 놔두세요. 지금도 충분히 밝으니까."


영권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그녀는 잔을 들어 건배를 제의했고 그 많은 술을 한꺼번에 털어 넣었다.

삼분의 일가량을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던 영권은 그녀의 파격적인 행동에 불필요한 수치심 따위를 느껴야 했다.

"뭐에요? 나도 다 마셨는데 남자가 그것밖에 안 마시기에요."

장난치듯 소심한 남자를 놀리는 숙경 때문에 영권은 남은 술을 모두 마셔야만 했다.

뜨거운 열기가 식도를 타고 지나자 가슴이 훈훈해지고 숨었던 자신감이 치고 올라왔다.


전체 1,808/ 1 페이지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