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야설

(로맨스야설) 초록마을 -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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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밍키넷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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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지는 고갯마루에 오늘도 어김없이 주희는 앉아 있었다.

6개월이란 시간을 보내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같이 기다렸건만 오늘도 아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작년 가을 마을에 있던 대부분의 장정은 전쟁터로 나갔고

돌아오는 이는 성희 아빠와 재덕이 아저씨뿐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고

이제 일곱 살이 된 주희는 오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갯마루에 나와 있지만 배고픔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아마 집으로 돌아가면 엄마의 한숨 소리와 잔소리만이 그녀를 반길 것이고

꿈속에서나 아빠를 만날 거라는 생각에 눈물이 난다.

주희를 예뻐해 주던 아빠의 얼굴이 그리운 듯 고갯마루를 내려가면서 어두워지는 하늘을 본다.

자전거를 사주신다고 약속하던 때가 어제같이 기억이 또렷한데 왜 아직도 오시지 않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듯 주희는 터덜거리며 고갯마루를 내려간다.


한참을 내려가던 주희가 고갯마루로 고개를 돌린다.

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하며 고개가 갸웃거려지고

어둠이 내려앉는 고개 너머에서 쩔뚝거리는 인영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주희의 눈이 커지고 입이 벌어지며 고개 너머로 올라서는 인영을 바라보고는

다시 고갯마루로 뛰어간다.


아빠로 생각되는지 넘어질 듯 불안하면서도 개의치 않은 듯 제법 빠르게 낯선 이에게로 달려간다.

자신에게 뛰어오는 어린 소녀를 응시하며 묵묵히 서 있던 사내가 주희가 앉았던 바위에 가방을 내려놓으며 엉덩이를 걸쳐간다.

뛰어온 주희가 사내의 앞에 서고는 실망한 눈으로 그 사람이 걸어왔던 길을 보며 숨이 가쁜 듯 숨을 몰아쉬며 사내를 바라본다.

바위에 걸터앉은 사내도 군용 상의의 먼지를 털며 주희를 바라보고는 씩 웃으며 말을 건넨다.


“꼬마야...누굴 기다리니...??”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사내의 입은 옷을 신기한 듯 바라본다.

군인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재덕 아저씨 정도의 나이인 것 같은데 지저분한 머리털과 어깨에 내려앉은 흙먼지에 먼 길을 온 것 같다고만 생각될 뿐이다.


“아직 기다리는 사람이 안 온 것 같구나....??”

“네....... 근데 아저씨는 누구세요...??”


여전히 미소를 띤 얼굴로 주희를 보며


“여기가 초록동이니...??”


누구인지도 밝히지 않고 마을 이름을 물어간다.

주희가 고개를 끄떡이며 대답을 한다.


“네...”

“여기에 감나무 집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줄래...??”

“감나무 집요...??...”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주희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훈장 할아버지네를 찾는 거예요...??”

“훈장 할아버지...??”


사내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한다.


“그래..아마도...맞는 것 같구나....”


주희는 훈장 할아버지네 집을 가리키며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훈장 할아버지네 외아들인 석구 아저씨도 아빠랑 같이 전쟁터로 가신 후 연락이 없으시다.

근데 오늘은 그 석구 아저씨 댁을 묻는 낯선 이가 찾아온 것에 누굴까 하고 의구심을 갖는다.


발을 절며 주희를 따라가는 사내의 얼굴에 언뜻 고향에 온 듯한 포근한 미소가 어리고

자꾸 뒤돌아보며 사내의 다리를 보는 주희의 눈망울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돌담을 따라 얼마를 더 갔을까.

기와가 얹어진 나무 대문이 보이고 돌담 안으로 오래된 듯한 큰 감나무가 눈앞에 보인다.

한동안 감나무와 대문을 바라보던 사내가 대문을 밀며 안으로 들어가고

주희는 궁금하다는 듯 대문 앞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사내를 바라본다.


대문으로 들어서던 사내를 보며 영주댁은 눈이 커졌다.

동네에 사내가 많지 않아서 찾아오는 경우도 거의 없었지만 허름한 옷차림과

다리를 저는 모습의 낯선 사내가 자기 집으로 들어오는 것에 경계심이 느껴지고

군복을 입은 모습에 혹시나 하는 생각에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아들 석구에 대한 안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온 건 아닌가 하는 불안함이 점점 번져간다.


“누....누구시오....??”


낯선 사내에게 말문을 여는 음성이 떨려나 온다.

사내가 영주댁을 말없이 바라보며 눈이 파르르 떨림을 느낀다.

한동안 영주댁만을 바라보던 사내가 입을 연다.


“저예요...외할머니.... 현우예요....”

“현우...??”


현우라는 말에 눈이 점점 커지며 입술이 떨린다.


“현우.....??”

“예...할머니...”


마루턱으로 떨리는 다리를 짚으며 내려서는 영주댁의 눈가로 물기가 번져 오르며

마당으로 내려서고는 사내에게로 다가가며 손을 들어 올린다.


“아이고...아이고...이놈아.... 내 새끼...”

“.............”

“불쌍한 강아지.... 아이고.... 이놈아...이놈아...”


통곡과도 같은 영주댁의 음성이 눈물로 번지고 사내를 끌어안고 가슴에 얼굴을 대고 비빈다.

자그마한 키와 세월의 무상함인 배인 얼굴로 고개를 들며 얼굴을 만지려는 듯 손을 들고 어깨와 턱을 만져간다.


“아이고...그래.... 어떻게...어떻게...살았어...??”


볼 위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이제는 늙어서 초라해진 영주댁을 안으며 등을 토닥인다.

말이 없이 끅끅대며 우는 영주댁이 깊은 한숨과 탄성이 한동안 계속되더니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들고는 팔을 잡아 마루로 이끌어 간다.


“어여...올라가자...내 새끼....”


부엌으로 보이는 쪽문이 열리며 머리에 수건을 두른 여인이 나오며 영주댁과 낯선 사내를 본다.

자기 시어머니가 낯선 사내를 끌고 마루로 오르는 모습을 보며 영주댁의 옆으로 다가가고

먼지로 얼룩진 사내를 본다.

누구인지 궁금했지만, 시어머니가 저렇게 반기는 사람이라면 가족일 텐데 누구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혜숙이 누구 일까 하고 생각하는 사이 영주댁이 혜숙을 보며


“진우엄마야....이눔이 왔다..희정이 아들...이눔이 왔어...”

“아.........”


남편 석구의 하나뿐인 누나 희정의 아들이다.

전쟁통에, 가족이 다 죽은 것으로 알았는데 이렇게 불쑥 나타난 것이다.

혜숙의 남편 석구도 전쟁터로 나가서 소식이 없는데 오랜만에 집안에 가족이 살아서 돌아온 것이다.

유독 이 집만의 문제가 아니고 마을 전체가 소식 없는 장정들 때문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고

혜숙네 집 역시 항상 우울한 분위기가 집안을 감싸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며 현우가 혜숙에게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외숙모님....”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던 혜숙도 아마 현우가 여덟 살 때쯤인가 한 번 보고는 어떻게 살았는지도 몰랐는데

이렇게 장성해서 다 커버린 현우를 보자 감회가 새롭고 반가웠다.

희정의 손을 잡고 외가집을 나서며 손을 흔들던 모습이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듬직하게 커버린 조카의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지만, 장난기가 많아서 시집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자신을 부단히도 불편케 했던 생각이 나자 절로 웃음이 나기도 했다.

입가로 쓸쓸한 미소를 띠고 현우를 보며


“조그마한 꼬마였는데 벌써 이렇게 커 버리다니.... 진우 아빠가 봤으면 얼마나 좋아하실지.......”

“.............”


현우가 깊은 눈으로 혜숙을 바라본다.

외삼촌인 석구에게 시집올 때는 아리따운 처녀였는데 시간의 흐름은 아무도 못 막는지 어느새 눈 밑에 주름이 보인다.

여전히 예쁜 모습은 남아 있었지만, 남편인 석구를 전쟁터로 보낸 이후 마음의 고생이 많았는지 수척해진 것 같기도 하다.

어릴 적 자신의 장난을 웃으며 받아주던 새색시의 기억만 남아있어질 뿐이지만 그래도 외가댁을 생각할 때면 새색시 숙모가 생각나곤 했었다.


십몇 년 만에 훌쩍 커버린 조카가 왔는데 먹을만한 먹거리라도 준비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급해지는 자신을 발견하며

어느새 혜숙의 눈은 생기가 돌기 시작하고 마루로 올라선 영주댁은 현우를 마루 위로 올라오라며 재촉을 한다.

마루를 지나 안방으로 들어서자 피폐하고 노쇠해진 채 이불을 덮고 있는 노인이 있었다.

세월의 흐름과 하나밖에 없는 소식 없는 아들로 인해 벌써 사 개월 동안을 누운 채로 병마와 싸우고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힘은 소진되어 쇠약해져만 가고 있었다.

영주댁이 현우의 손을 잡고서 누워있는 노인의 곁으로 다가가 앉으며 노인을 부른다.


“영감.....눈 좀 떠서 누가 왔는지 좀 보소.......영감....”


눈은 가늘게 뜨고서 천정만을 가만히 보던 노인이 고개를 현우 쪽으로 돌리고는 현우를 바라본다.

진물이 흐르는 눈으로 한동안 현우의 얼굴을 뜯어보고 있다.


“이눔이 희정이 새끼요...영감....뭐라고 말 좀 해보소....”


누워있는 노인의 곁으로 다가간 현우가 노인의 손을 가만히 잡아간다.

현우를 바라보던 노인의 입가로 가느다란 미소가 어리고

현우와 마주 잡은 손에 미약하나마 따뜻한 온기와 힘이 느껴진다.

뭐라고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조금씩 벌리지만, 의도와는 무관하게 뭐라고 얘기하는지 들리지는 않는다.

아마도 긴 시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를 묻는 것이리라 생각이 들었다.

현우가 어릴 적 기억에 할아버지는 엄하고 완고한 모습이었다.

부모님의 결혼을 극구 반대하시고 모친이 외가댁을 드나드는 것을 금지해 모친이 많이 힘들어했던 것을 현우는 알고 있었다.

외삼촌의 장가갈 때 한번 들렀을 뿐

오랜 시간을 외가댁과 단절된 상태로 지내야만 했다.

현우를 쳐다보는 노인의 눈가로 물기가 어린다.

자신의 아집으로 인해 고통받았을 손자에 대해 미안함이 어린 듯 눈꼬리를 따라 눈물이 흘러내린다.


“어이고...손주놈 좀 보소...이렇게 튼실하고 반반하게 자란 것 좀 보소.....”


한숨을 지으며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훔치는 영주댁이 지난날의 기억을 회상하듯 한서린 음성으로 노인에게 얘기한다.

오랜만에 만난 외조부와 현우는 말없이 손만을 잡은 채로 묵묵히 바라볼 뿐이다.


한동안의 외조부와의 무언의 대화로 어느 정도의 마음을 튼 현우는 마당에 서서 어린 시절 자신이 헤집고 다녔던

집안을 돌아보면 회상에 젖어 들고

현우를 떼어놓지 않겠다는 듯 영주댁과 혜숙이 저만치 서서 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집안을 둘러보고 마루로 올라와 혜숙이 장만한 저녁상을 앞에 두고 앉자 영주댁이 조심스레 모친의 이야기를 묻는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얘기를 할지 생각에 잠기고

열다섯 살 때 부친이 병으로 돌아가시고 시장에서 행상을 했던 모친과 어렵게 살았던 것을 얘기하기 시작한다.


현우는 아마도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고통의 시간이었다.

매일 힘들어하면서도 자신을 위해서 희생하던 모친이 너무 안쓰러웠고 전쟁이 나서 자신이 군에 들어간 사이 돌아가신 게 그에게는 큰 상처였다.

심신이 피폐해진 상태에서 전투 중 다리에 총상을 입은 채 제대해야 했지만, 그에겐 돌아갈 집도 그렇게 자신을 돌보던 모친도 없었다.

대학을 입학하여 꿈에 그리던 캠퍼스를 걸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전쟁의 화마가 몰려오며

그의 꿈과 희망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리고 그에게 남겨진 건 총상으로 절뚝거리는 병신의 육체만이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얘기를 듣던 영주댁이 하염없는 눈물과 한탄은 현우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었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현우의 등을 두드리던 혜숙도

입을 막으며 부엌으로 들어간다.


현우는 오랜 시간을 뒤척이며 잠을 청해보려고 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깊은 한숨을 토하며 자리를 일어선 현우가 방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서고 밝아진 달빛을 보며 서성인다.

감나무 위로 걸리는 달빛이 파랗다고 생각하며 현우가 생각에 잠긴다.

자신에게 남은 것은 여기 외갓집이 전부이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한다.

고통을 언제까지 안고 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고 외삼촌 석구도 없는 이곳이 이제는

자신이 돌보고 이끌어야 한다는 보호 심리도 생긴다.


달빛을 받으며 서성이는 현우를 바라보는 눈빛이 있다.

혜숙이다.

어느새 훌쩍 커서 어릴 적 모습은 흔적도 없지만 그래도 외가라고 찾아와준 현우가 대견스럽다.

석구가 없는 이 집에 그나마 장정 한 명이 있는 게 든든하게도 느껴졌다.

전쟁이 끝난 지도 꽤 되었는데 아직도 소식이 없는 남편을 생각하자 가슴 한쪽이 미어지고 알 수 없는 서글픔에 눈물이 난다.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희망이 엷어져 감을 느낀다.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 때 언제 봤는지 현우가 옆에 와있다.


“잠이 오지 않아서요....”


옆에 앉는 현우를 보며 석구였으면 하고 생각해 보지만

곧 고개를 저으며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자조한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니...??”

“글쎄요.... 아직은 별다른 생각은 없어요...”

“.................”

“당분간은 아픈 다리를 치료하고 쉬고 싶어요.......”

“그래.... 다리는 정성껏 치료하면 좋아 질 거야.... 내 생각은.......”


말을 하는 혜숙의 옆모습 선이 고와 보인다.

열여덟에 석구에게 시집와서 십팔 년을 시부모를 모시며 대를 이을 아들 하나를 두고 있는 중년의 나이지만

바탕이 고와서인지 아직은 아름다운 미모를 잘 유지한 것 같다.

갸름한 얼굴에 긴 눈썹이 매혹적이고 반듯한 이마와 알맞게 솟은 코가 얼굴의 균형을 잘 맞춰주고 있다.

도톰한 입술도 중년이라기 엔 아직도 윤기가 흐른 듯 촉촉해 보인다.


“현우가 이곳에서 자리를 잡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

“진우 아빠도 없는 상태라 아버님과 어머님도 현우가 있으면 든든해 하실 거고 또.......

아버님이 많이 허약해지셔서 ...걱정도 되고....”


고개를 끄떡이며 무슨 뜻인지를 알겠다는 듯 현우가 대답한다.


“예....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고개를 들고 현우를 바라보는 혜숙의 눈 속에 안도감이 흐르고 그윽한 눈으로 현우를 바라본다.


“여기에서 살면서 장가도 가고 하면서 어려웠던 것들은 다 잊어버리려무나...”


반짝이는 혜숙의 눈빛을 보며

현우는 숙모인 혜숙이 참 이쁘다고 생각했다.

혜숙이 현우의 손을 잡으며 손등을 어루만진다.


“나도 진우 아빠 없으니까 많이 힘들어......이럴 때 현우라도 집안에 있어 주면 참 고맙고 마음 든든할 거 같아....”

“예......”


혜숙의 마음을 알겠다는 듯 손에 힘이 들어간다.

꽤 시간이 흘렀는지 들리던 벌레 소리도 안 들리고 새벽이 다가오는 것 같이 느껴진다.

현우와 혜숙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고 마당엔 정적만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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