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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야설) 젊음, 그 열기 속으로 - 16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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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밍키넷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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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괜찮다고 수없이 다짐했건만, 지금 눈앞에 은하를 마주하고 나니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눈을 마주한 순간 느꼈던 놀람과 당황, 그리고 이어지는 체념…. 내 얼굴에 드러날 표정을 숨기기에 자신이 없었다.

분명, 반가움이 마음 어느 한구석에 남아있어질 테지만 구태여 드러내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조 선생, 아는 사이야?"


조교 선배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우리를 쳐다보았다. 학번은 같다고 하지만 과는 달랐기에 서로 아는 사이라는 것이 조금 이상할 법도 할 것이다.


"아…. 예…."


은하의 입술이 열리고 가지런한 치아가 한순간 보였다가 사라졌다.

은하의 눈길이 내 전신을 훑듯이 더듬었다. 눈길 닿는 곳마다 내 피부는 흠칫거리며 떨렸다. 하지만 내 통제력을 벗어난 이런 내 몸의 반응에 화가 났다.


"오래간만이네…?"

"그래, 잘 지냈어?"

"으응…. 휴가. 나왔니?"


이렇게 빨리 제대할 줄은 몰랐던 것일까…? 아니면 그렇게 말해주기를 바라고서 그러는 걸까…? 그렇다면 예상했던 대답을 해 줄 마음은 없었다.


"아니야, 제대했어."

"그렇구나…."


조금 당황하기를 바랐지만, 은하는 약간의 이채를 띄기는 했지만 그렇게 놀라지는 않은 듯 했다.


"서울에 있니?"


아마도 입대 이후 한 번도 서울에 오지 않았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그렇게 물어보는 것이리라….


"응, 학교 가까운 곳에 원룸 잡았어…."

"그렇구나…."


자꾸 작아지기만 하는 내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배에 힘을 줘 목소리를 냈는데, 그게 어떻게 들으면 화난 사람 같아 보였는지 조교 선배가 이상한 눈길로 흘긋거리고 있었다.

그 시선을 고스란히 등으로 받아내면서 용기를 내 은하의 얼굴을 보았다.

은하는 내 얼굴을 보지 않고 있었다. 시선을 따라가면 내 구두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이상한 분위기는 정말 싫었다. 그리고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만한 얘깃거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여기서 벗어나고만 싶었다.


"바쁜 것 같은데…. 그럼 다음에…."


우산을 찾아들고서 은하를 지나쳐 나가려고 했다. 그 순간 은하의 목소리가 날 멈추게 했다.


"저기! 저기…. 커피 한잔하지 않을래…?"


난 문을 바라보고 있었고, 은하는 내 등을 바라보면서 서 있었다.

아마도 다른 사람이 이런 장면을 본다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틀림없었다.

더구나 오늘 처음 만난 조교 선배에게 더 이상 이런 장면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그러지 뭐."

"잠깐만 기다려줄래? 금방 끝나…."

"알았어…."


먼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지나가던 여학생들이 흘깃흘깃 바라보았지만 모르는 얼굴들이라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창문으로 다가가 담배 한 대를 물고서 불을 붙였다. 그리고 중간쯤 태웠을 때 은하가 밖으로 나왔다.



은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모르는 척하고 싶었을 텐데 왜 그러지 않았을까…? 그나저나. 어디로 가야 하지…? Face는 그대로 있을까…?



이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은하가 말없이 앞장을 섰다.

계단을 내려와 중앙현관에 이르렀고, 조금 약해지기는 했지만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은하의 손에는 우산이 없었다.

은하는 내리는 비를 보고서 조금 망설였지만 이내 밖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어쩔 수 없이 우산을 펴들고 은하와 나란히 섰다.

은하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예전 같았다면 내리는 비를 피하고자 바짝 붙어서 걸었을 테지만, 지금은 사이에 두꺼운 벽이라도 세워둔 것 같았다.

은하의 입술이 벌어지면서 무엇인가 말하려 했지만 이내 그 입술은 닫히고 말았다. 나 역시 무슨 말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에 가만히 있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학교를 벗어나 들어간 커피숍은 조금 어두운 곳이었다.

특별히 어두운 곳을 찾은 것은 아니었을 테지만, 밝은 곳에서 은하의 얼굴을 보는 것 보다는 훨씬 나았다.


자리에 앉아 아가씨에게 커피를 주문하고는 둘 다 침묵에 휩싸이고 말았다.

침묵이라는 것은 때로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하지만 이따금 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은하와 나는 한동안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침묵을 깨지 않았다.

불쑥 은하의 팔이 내 앞으로 뻗어왔고, 그 손에는 파란색 손수건이 들려있었다.

손수건을 보고서야 내 어깨의 절반 이상이 흠뻑 젖어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색한 웃음이 은하와 나 사이를 지나갔고, 손수건을 받아 닦기에 열중했다.


커피가 나왔다. 커피를 보자 옛 생각이 났다.

은하와 함께했던 그때는 커피를 마실 땐 으레 은하가 설탕을 넣어주었다. 설탕 두 개를….


"... 요즘도 두 개만 넣니…?"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은하였다. 그것도 옛일을 기억하듯이….


"뭐, 그렇지…."


커피를 사이에 두고서 이어지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차라리 아무 말 없이 앉아있었더라면 그렇게 어색하지는 않았을 텐데, 일단 말을 꺼내놓자 더없이 어색했다.

은하 역시 힘들게 입을 열었는데 내 대답이 이어지지 않아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긴 한데...

담배가 필요했다.


"나, 담배 피워도 되니?"


은하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리고는 고개가 조금 끄덕거렸다.

아마도. 피우지 않던 내가 담배 얘기를 꺼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내가 담배를 피운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지난 2년이라는 공백이 두 사람 사이를 가르고 있었다.

담배 한 대가 짧은 순간에 다 태워졌고, 또 한 개비의 담배를 물고서 불을 붙이자 은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많이 피우니…?"

"글쎄….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남 얘기를 하듯이 대꾸한 나는 불을 붙이려던 담배를 다시 담뱃갑에 넣었다.


그래…. 이젠 담배를 피운다. 담배를 피우지 않던, 그리고 술도 마시지 않던 2년 전의 내 모습은 여기 없다.

그리고 2년 전의 은하도 여기엔 없다. 내 기억 속에서만 존재할 뿐….


그렇게 생각하자 침묵을 더 이상 계속 지켜야 할 이유가 없었다.


"졸업 안 했니? 내가 제대할 때쯤엔 졸업하고 난 뒤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으응…. 대학원 갔어. 석사 1년 차야."

"그렇구나. 근데,  조교 선배와는 친해?"


언뜻 은하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는 어색한 웃음이 입가에 드리워졌다.


"오해하지 마…. 나도 조교 일을 하므로 알고 있는 거야."


오해라…. 그렇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내뱉었지만 얘기를 들은 은하의 입장에서는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도 말한 상대가 나였으니까….


"미안하다. 이상한 뜻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야…."

"그래…."


다시 미나의 고개가 숙어지고 말았다.

더 이상 침묵을 지킬 이유는 없어졌지만, 얘기를 이어 나갈 화제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말을 했다간 다시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될 수도 있었으므로….


단절된 대화의 단면이 날카로웠기에 선뜻 말을 시작하기에는 부담이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고, 곡명을 알 수 없는 노래가 나직하게 두 사람 사이를 흘러가고 있었다.

그 사이 재떨이는 담배꽁초가 하나둘씩 쌓여나갔고, 옆자리의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술 한잔할래?"


말없이 커피잔을 노려보던 내 귀에 은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술이라…. 이런 날씨에는 술 한잔하는 것도 괜찮겠지…. 한잔 마시면 얘기하기도 편할 테고….


"그래. 근데…. 내가 알던 술집들이 남아있는지 모르겠는데?"


은하의 입술 끝이 조금 말려 올라갔다.


"후... 그렇게 얘기하니까 정말 예비역 같네…?"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지만, 예비역인 건 맞으니까…."

"일단 나갈까…?"

"그래."


카페를 나와서 거리로 나섰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지만, 많이 약해져 있었다.

술집들이 많은 골목으로 들어섰지만, 알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이런 내 마음을 알았던 것인지….


"이런 날씨에는 동동주가 제격인데…. 아직도 동동주 좋아하니…?"

"음. 좋지."


입대 전, 술을 잘 마시지는 못했지만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날씨 따라, 계절 따라 좋아하는 술을 찾아다니면서 마시곤 했다.

아마도 그 기억이 떠올랐으리라….

골목을 몇 굽이 돌아 어느 허름한 가게로 들어섰다.

예전 그 거리는 전통술 집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다 없어지고 몇 집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가게로 들어서니 인상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가 반겨주었다.

창호지를 바른 문을 열고서 방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손님은 몇 명 없었고 그나마 있던 손님도 조용하게 얘기를 나눌 뿐이어서 술집이라기보다는 찻집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아릿하게 스며드는 술향기가 여기는 술집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듯 했다.

나무로 만든 탁자 위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가득했고, 벽에 발라진 창호지에도 낙서가 가득했다.

그 가운데에는 학생운동의 주장을 담은 격문도 있었고, 들어줄 리 없는 사랑 고백도 있었고, 치기 어린 자신의 인생관도 있었다.

모두가 젊은 날의 치열한 삶의 흔적이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나 역시 그런 낙서를 곧잘 하고는 했으니까….


"살이 좀 찐 것 같네?"

"응. 조금."


아직 술은 나오지 않았지만 여기가 술집이라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분위기는 많이 부드러워진 듯 했다.

은하도 그렇게 느끼는지 입가에 옅은 미소가 생겼다. 그제야 은하를 찬찬히 바라볼 수 있었다.

예전보다는 조금 짧아진 머리카락이 귀 근처에서 찰랑거리고 있었고, 약간의 파마기가 남아있었다.

하지만 눈썹과 동그란 입술 모양은 나이보다는 어려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아마도 조교 일을 하려다 보니 적당히 나이가 들어 보이는 것이 일하기에 수월했을 것이기에 파마를 한 것이리라….


기억 속의 은하 모습을 찾기는 쉬웠지만, 변한 점도 많았다. 그중에 한 가지가 은하의 목소리였다.

마치 노래를 부르는 것 같은 하이톤의 목소리였던 것이 지금은 차분하고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렇지만 이것도 그리 싫게 들리지는 않았다.

아주머니가 동동주와 파전을 같이 가지고 왔다.

알싸한 동동주의 냄새와 파전의 냄새가 뒤섞여 코를 자극하고 있었다.

술을 은하의 잔에 따라주고, 내 잔을 채웠다.


"예쁜 아내를 얻고 싶은가 보네?"

"훗훗훗…."


자신의 잔을 자기가 채우면 그런 소리를 하는 건 예전과 달라지지 않았나 보다.

짧은 웃음이 둘 사이를 휘감고 돌았고, 몇 잔을 말없이 마셨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동동주의 알싸한 느낌이 좋았고, 따뜻해지는 기분이 좋았다.

몇 잔 마시지는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여태껏 가지고 있던 어색함을 떨쳐버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게 술이 주는 매력이라는 것일 것이다.


"역시. 비 오는 날은 동동주가 좋지…."

"그래. 술도 조금 는 것 같네? 예전에는 몇 잔만 마셔도 취하곤 했잖아."

"너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같은데?"


은하의 얼굴이 발그스레 물들었다.

단 한잔을 마셔도 얼굴에 바로 표나고 마는 은하 덕택에 낮술을 마시고 들어간 수업에서 교수님께 들켰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그 얘기를 꺼내자 은하의 낮은 웃음소리가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 김 교수님이 내 지도교수셔."

"흐음…. 제자 하나는 잘 고르셨네…."

"훗…."


어느새 동동주 한 통이 동나고 말았다.

새로 가져온 동동주를 받아 은하의 잔에 따라주고 나자 은하가 바가지를 뺏어 들고는 내 잔을 채워주었다. 그러고는 우스갯소리를 던지는 은하였다.

그렇게, 그렇게…. 잔을 드는 횟수가 많아지고 있었다.

창밖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은하와 나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던 물기는 차츰 없어져 갔다.

얼마 마시지는 않았지만 제법 아릿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마신 양보다는 방안 가득 채운 동동주의 향기에 취해간다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술집에 들어온 지 한 시간 가량이나 되었을까….

나는 적당한 취기에 젖은 채 기분 좋게 포만감을 느끼고 있었다. 은하도 처음보다는 아주 편안해 보였다.

적당한 취기와 부드러운 분위기에 용기를 내기로 했다.


"그 선배는 잘 지내?"

"........."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내가 못 물어볼 것을 물어본 것일까…?


은하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잔을 한꺼번에 비웠다.


"미안하다. 그냥. 궁금해서…. 괜한 걸 물어본 것 같군…."

"아니야, 괜찮아. 그 선배, 졸업해서 회사 잘 다녀."


그렇게 얘기하는 은하의 얼굴에 체념과 후회가 서린다고 생각한 것은 내 착각일까….


"결혼은 대학원 졸업하고 하겠구나?"

"........."


분명 마음속으로는 다른 얘기를 하자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말에 나도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수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쩔 줄 몰라 하던 내 눈에 은하의 표정이 들어왔다. 그 표정은….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없는 무표정이었다.

그리고 은하의 입술이 벌어지면서 나직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 선배랑 헤어진 지 오래됐어."

"...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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