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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야설) 젊음, 그 열기 속으로 - 18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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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밍키넷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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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와 마주친 미나의 두 눈에서 약간 의외라는 생각이 일렁이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도 직접 대하는 은하의 모습이 자신이 생각하던 것과는 많이 달랐던 것이리라. 그리고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약간 망설이는 것 같았다.

어디에 앉아야 될지 가늠하는 것 같았다.

잠깐의 망설임 끝에 미나는 내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방싯거리면서 장난스럽게 꼬집는 시늉을 했다.


"뭐야? 진짜로 마중 나오지 않으면 어떡해? 비도 오는데! 내가 못 찾아서 얼마나 헤맸다고!"

"너 같은 발바리가 여길 못 찾아서 헤맸다는 게 말이 되냐?"


앞에 있는 상대가 누구라고 생각했기에 이렇게 까부는 것일까….

평소의 미나는 모르는 사람과 만날 때는 얌전하고 차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본래의 미나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우스웠지만. 그런데 지금은 은하를 보고서도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훨씬 더 귀여운 척을 하고 있었다.


"뭐야, 많이 마셨어? 오늘 나랑 술 마시기로 해놓고서 이러는 게 어딨어?"


사실 오늘 약속이라는 것도 미나가 일방적으로 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술을 마시기로 했다는 말은 순전히 거짓말이다. 하지만 미나는 마치 진짜 그렇게 말했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아마도 맞은편에 있는 은하에게 들으라는 듯이….


"훗…. 내가 괜히 술 마시자고 그랬네?"


가만히 미나와 나를 바라보던 은하가 툭 던지듯이 내게 말했다.


"그건 아닌데…. 읍!"


미나의 손이 내 옆구리를 꼬집고 있었다.

물론 테이블 밑이라서 은하에게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 신음 소리를 들었으니 은하도 눈치를 챘을 것이다.


"오빠, 소개 안 해?"


꼬집힌 옆구리를 문지르고 있는 나를 향해 배시시 웃으면서 미나가 말했다.

하지만 딱히 뭐라고 소개해야 할지…. 친구라는 단어를 이런 상황에서 쓸 수 있는 것일까…?


"음…. 이쪽은 내 친구 은하고, 이쪽은…."

"아, 안녕하세요? 박 미나라고 해요."


미나를 소개하려는 참이었지만, 미나가 냉큼 나서 은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은하도 얼떨결에 미나의 손을 잡으면서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조 은하입니다."

"근데, 오빠. 능력 있네? 이런 미인을 다 사귀고? 오빠 옛 애인이라서 어떨까 싶었는지 이렇게 미인이라니…. 쩝!"


"옛 애인"이라는 단어에 유달리 힘줘 말하는 미나를 보니 어이가 없었다.

은하는 처음에는 어리둥절해했지만, 곧 웃고 말았다. 하지만 그 웃음은 그렇게 밝지만은 않았다.


"훗…. 미인이라뇨? 미나씨가 훨씬 예뻐요."

"헤에~~"


미나의 얼굴에 은하의 미소와는 전혀 다른 밝은 미소가 만들어졌다.

약간 이상한 분위기가 생기는 것 같았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느끼는 그런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이어진 짧은 침묵은 셋 모두 말없이 술잔을 입으로 옮기는 것으로 대신했다.


몇 잔의 술이 돌았을까….

이른 시간부터 마시기 시작한 술은 어느새 알싸한 기분을 넘어있었다. 그다지 많이 마시지 못하는 나와 은하였기에 상당히 마신 편이다.

슬슬 취기가 올라온다고 생각할 때, 미나의 목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운 동동주 향기를 진동시켰다.


"졸업하셨겠네요? 회사 다니세요?"

"아…. 은하는…."

"나, 오빠한테 안 물었어."


나를 향한 미나의 목소리에 왠지 모를 긴장이 묻어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오해일까…. 그리고 그렇게 느낀 것은 은하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대학원 다니고 있어요. 신방과 조교일 하고 있고요."

"그러세요? 그럼. 학교에서 오빠랑 많이 만나겠네요?"


미나의 물음에 약간 실망한 느낌이 들어있었고, 은하는 그걸 알아챈 듯했다.

그리고 은하와 내가 암묵적으로 피했던, 앞으로의 학교에서의 만남에 관한 얘기가 흘러나왔던 터라 조금 껄끄러웠다.

은하는 곧바로 대답할 수 없었기에 약간 망설였지만 이내 미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 과도 다르고, 대학원 다닌다고 하셨으니까 오빠랑 마주칠 일은 거의 없겠네요!"

"예…."


확인이라도 하는듯한 미나의 물음…. 의식적으로 그러는 것일까…? 취기가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미나는 나를 제쳐놓고서 은하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고, 그 질문마저도 오늘 처음 만나는 상대에게 던질만한 것은 아니었다.

분명 이상한 상황이었지만, 은하도 그런 미나의 질문에 애매모호하게나마 대답을 하고 있었기에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처음 방에 들어설 때 잠깐 주저하는 빛을 보였던 미나는 지금 상당한 여유를 가지고 은하를 대하고 있었지만, 은하는 그렇지 못했다.

몇 마디 하지 않았지만 당당해 보이는 미나와 달리 은하의 시선은 미나의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것이다.

아니 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다는 것이 맞을지도….


흘깃 미나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미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저런 표정은…. 미나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는 뭔가 해야 할 말이 있을 때였다.

오늘 처음 만나는 은하에게 미나가 무슨 할 말이 있다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끼어드는 걸 미나가 싫어하는 것 같았으니까….


"그럼, 은하 씨를 다시 만날 일은 없겠네요?"

"야!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미나 자신이 은하를 만날 일이 없을 것이란 말인지, 아니면 내가 은하를 다시 만나는 일이 없을 것이란 말인지 분명하지 않았지만,

은하에게 실례가 되는 말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은하와 나와의 관계가 옛날과는 많이 달라진 건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나에게서 다시 만날지 안 만날지를 확인해주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내 목소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 높아지고 말았다.

높아진 내 목소리에 나 자신이 당황하고 있었고, 그런 나를 미나가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미나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조금 차갑게….


"오빠, 그럼 다시 사귀기라도 할 거야?"

"뭐…?"

"... "


무엇인가 둔중한 것으로 뒷머리를 두들겨 맞은 것 같았다.

그때까지 내 몸속에 남아있던 취기가 단번에 날아가 버리고 말았고, 그 자리를 척추를 따라 올라온 차가운 기운이 대신했다.


다시 사귄다…? 은하랑…?


숱하게 나를 괴롭히던 질문이었지만 다른 사람의 입에서 그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미나에게서 그런 소리를 들을 줄은….


그리고 그때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당황하고 있던 내 눈에 은하의 고개가 들리는 것이 보였다.

대화 내내 미나의 시선을 피해 테이블 위의 술잔을 쳐다보던 시선이 내 눈길과 마주쳤다.

술집에 들어온 뒤로, 아니 학과사무실에서 만난 이후로 한 번도 제대로 눈길을 마주친 적이 없었던 은하가 나와 시선을 마주치고서도 전혀 피하지 않았다.

무언가 확인이라도 받아야겠다는 듯, 은하의 시선 속에는 뜻을 모를 의미가 담긴 듯 했지만, 그 의미를 파악하기에는 내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살짝 벌어진 은하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나직한 목소리는 내 예상을 단번에 깨버리는 것이었다.


"다시 만나는 걸 미나씨에게 허락받아야 하나요?"

"... "


미나의 어깨가 움찔했다.

너무 뜻밖인 은하의 대꾸에 지금껏 당당하고 여유 넘치던 미나도 긴장하는 것 같았다. 미나의 한쪽 이마 위로 가느다란 힘줄이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허공에서 서로 부닥친 미나와 은하의 시선이 비껴갈 줄 몰랐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의 어색하던 분위기가 단번에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미나와 은하 사이에는 당겨질 대로 당겨진 하나의 실이 놓여있는 것 같았고, 그 실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았다.


"내가 허락할 수 없다면요?"

"... "


은하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대답이 미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쪽이 허락하고 하지 않고는 문제가 아니죠. 진수에게 그럴 마음이 있느냐가 중요한 거 아니에요?"


미나에 대한 호칭이 그쪽으로 바뀌었지만 미나도, 말하는 은하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훗…. 오빠에게 그럴 마음이 있을까요?"

"글쎄요…?"

"3년 동안 오빠를 잊고지냈으면서 이제 와서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설명할 필요는 없겠죠?"

"나한테 설명할 필요는 없죠. 하지만 오빠는 설명을 들어야 할 텐데요?"

"... "

"... "


한동안 미나와 은하는 이상한 대화를 계속했다. 하지만 내 귀에는 그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미나와 은하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를 들으면서 내 기분은 착잡해졌다.

분명히 미나가 하는 말은 무언가 앞뒤가 안 맞는 듯 했지만, 은하의 얘기 또한 곧바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제대하고서 처음 온 학교에서 은하를 다시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이상했고,

처음 만난 미나와 은하가 지금 이 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도 이상했다.

도대체 몇 번의 우연이 겹쳐야 이런 만남, 이런 대화가 생길 수 있는 것인지….


"진수야, 나 그만 일어나야 할 것 같아. 학과 사무실에 가봐야 할 것 같아."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은하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은하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은하가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오늘은 늦었고, 다음에 한 번 봐."


미나의 호흡이 일순간 멈추는 것 같았지만,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은하 역시 그런 미나의 반응을 신경을 쓰지는 않는 것 같았다.


"삐삐…. 번호 알려줄래?"


테이블 밑으로 미나가 두 손을 꽉 움켜쥐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보는 미나였다.

그 눈빛 속에 일말의 불안감이 서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선 은하의 시선마저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어떻게 하든지 간에 어느 한쪽에게는 상처를 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미나에게든 은하에게든 상처를 주기는 싫었다.

아니 어떻게 하는 게 더 솔직한 내 심정인지는 나 자신조차도 알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간 멍하니 있으려니 내 눈앞으로 뭔가가 불쑥 들이밀어졌다.

미나의 손이 내 앞으로 뻗어왔고…. 그 손에 메모지가 한 장 쥐어져 있었다.

고개를 돌려 마주 본 미나는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지금 미나가 무슨 생각을 할지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기계적으로 주머니에 있던 펜을 들어 번호를 적었다. 종이가 거기 있으니까 적는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갈께..."


메모지를 받아서 든 은하가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데려다 달라는 말은 없었지만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내가 그러면 미나는 혼자가 돼버리고 만다.


"우산. 가지고 가…."


우산을 받아서 드는 은하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 같았지만 애써서 무시했다.

아무 말도 없이 나에게 메모지를 건넨 미나를 생각하면 미나를 혼자 내버려 두고 은하를 바라다 준다는 것은 안 될 일이었다.

미나도 같이 일어서서 술집을 나간다면 자연스럽게 동행하는 것이 되겠지만 미나는 그럴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정문까지…. 기다리고 있을께…."


미나의 목소리가 자그맣게 내 귓가를 울렸다.

미나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섞여 있었고, 그 떨림이 이상하게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지금 여기서 더 머뭇거리면 미나와 은하 모두에게 힘들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말도 없이 미나의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일어섰다. 그리고 머뭇거리는 은하를 스쳐 지나 문을 열고서 먼저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빗방울이 많이 약해져 있었다. 차라리 마구 쏟아지고 있었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서 걷고 있는 은하도 아무 말이 없었다. 골목을 벗어나 정문까지 이르는 그 짧은 거리가 이렇게 멀게 느껴진다는 것이 신기했다.


저만치 정문이 보였다.

비가 오는데도 정문 앞에는 많은 학생이 서 있었다. 작은 우산을 쓰고서 내리는 빗방울에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는 남녀는 연인이리라….

정문을 얼마 앞두고서 난 발걸음을 멈추었다.

같이 멈춰선 은하의 두 눈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은하의 두 눈은 설명할 수 없는 많은 감정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을 꺼내면 주체하지 못할 말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은하의 손을 들어 우산을 건네주었다.

내 손이 자기 손을 잡자 은하의 손이 흠칫 놀랐지만, 손을 빼지는 않았다.

은하의 손이 우산을 잡자 난 곧 손을 떼고서 돌아섰다. 더 미적거렸다간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기에….


"진수야…."


등 뒤로 은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머리 위로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나는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화…. 해 줄래…?"


시끄러운 사람들 말 사이로 은하의 목소리가 뚜렷하게 들렸다. 마치 은하의 말만이 의미를 가진 것처럼...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은하 역시도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것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혼자 기다리고 있을 미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미나의 얼굴이 떠오르자 가슴 한편이 찌르르하게 아파져 왔다.

그리고 난 발걸음을 옮겼다. 은하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기를 바랬다.

돌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여기서 돌아설 수는 없었다. 돌아서 바라본다면 소금기둥이라도 될 것만 같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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