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야설

미희 -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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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눈에 힘 풀어.”


지나가던 박선호가 지헌의 어깨를 툭 쳤다.


지헌은 회의실 유리창 너머 미희가 다른 파트너에게 지적당하는 장면을 보고 있다. 

평소 지헌에게 혼나는 수준의 반의반도 안 되는데 남에게 안 좋은 소리 듣는 모습은 못 보겠는지 미희를 보는 지헌의 시선이 못내 안쓰럽다. 

새로운 업무에 투입돼서 며칠 고생하더니 살이 내려 그녀의 얼굴이 해쓱하다.


성공에 목말라 있으면서 애매모호한 영역에서 미희는 한 번씩 주춤했다. 더 치고 나갈 부분에서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그냥 자문 변호사로 빠져도 좋을 것 같은데 본인은 아득바득 송무에 매달렸다. 그런 모습조차도 미희답다는 생각이 든다.


“너 이래서 쟤 감당하겠냐. 벌써 흐물흐물한데.”


미희와의 관계가 좋아지고 지헌이 말랑말랑해질 때마다 선호는 한 번씩 찬물을 끼얹었다.


“정신 차려. 너 쟤 믿으면 안 돼. 알지?”


지헌과 미희의 지난한 연애를 오래 보아 온 사람으로서 선호의 걱정이 이해 안 가는 바는 아니다. 


다시 재회하고 미희를 얻게 된 것에는 분명 박선호의 공도 있긴 했다. 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집안 어른들이 밀어붙이는 여자를 약혼자니 뭐니 과장하면서 미희를 자극했고, 거기에 반응하는 미희를 보면서 그도 선호의 거짓말을 묵인해 온 부분이 있었다. 어린애 같은 미희는 그의 시선이 멀어지면 바로 반응을 보였으니까.


“넌 미희한테 매번 당하면서 왜 맨날 대드냐.”


그래도 볼 때마다 아옹다옹하는 둘이 신경에 거슬렸다.


“당하긴 누가 당한다고 그래.”


큰소리치면서 선호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말싸움에서 미희를 이기지도 못할 거면서 매번 싸움을 걸었다.


“하여간 조심해. 자기 손에 들어왔다 싶으면 금방 싫증 낼지도 몰라.”


선호는 마지막까지 걱정을 가장한 악담을 하고 갔다.


저거는 진짜 미희의 변덕을 걱정하는 사람인지 바라는 사람인지 모르겠다. 자신을 도와준다고는 하는데 미희를 자극하려던 건지, 진짜 떼어 내려던 건지, 저의가 의심스럽기도 하고.


그는 못마땅한 눈으로 선호를 쳐다보다가 회의실에서 나오는 미희를 붙잡았다.


“점심시간에 사무실로 와.”


다이어리를 가슴에 품고 종종걸음 치던 미희는 ‘왜?’ 하고 새침하게 물었다. 왜 부르는지 뻔히 알면서 모르는 척 묻는 얼굴이 얄밉도록 깜찍하다.


회사와 가까운 그의 집으로 출퇴근을 같이하다가 어제 처음으로 따로 퇴근했다. 그래서 미희가 없는 허전한 밤을 보내고 아침부터 미희의 뒤를 쫓았다. 

고작 몇 달 만에 미희와 같이하는 일상에 익숙해져서 혼자 살았던 과거는 전생처럼 아득하다.


“서류 다 했어? 그거 들고 와. 봐줄게.”


그는 괜히 서류 핑계를 대며 미희를 사무실로 불러들였다. 그녀를 꽉 끌어안고 어젯밤의 허전함과 불면증을 보상받고 싶었다.


“아직 못 했어.”


“못 한 거 들고 와.”


“조 변호사님이 시킨 일인데 왜 너한테 들고 오래.”


미희는 뽀로통하게 대꾸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미희를 조 변호사에게 보낸 줄도 모르고 이렇게 괄시를 하나. 

그는 미희 옆의 벽을 짚고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너, 내가 조 변호사보다 직급 높은 거 알아?”


“알아.”


“그럼 조 변호사 대하는 반만큼만 날 대우해 봐.”


조 변호사에게는 그렇게 깍듯할 수가 없으면서 그에게는 온갖 짜증에 트집에 있는 대로 성질을 부린다. 

그만 특별 대우 해 주는 행동도 귀엽긴 한데, 어쨌든 지금은 상황을 그에게 유리하게 끌어가기 위해 이용하기로 한다.


지헌의 정색에 미희는 통통한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냥 일이고 뭐고 당장 사람들 없는 곳으로 끌고 가서 꽉 끌어안고 키스하고 싶어 죽겠다.

지헌은 머릿속으로 끝까지 상상하면서 겉으로는 무표정을 유지하며 분위기를 잡았다.


“알았으면 지금 당장 사무실로 따라와.”


“됐어. 조 변호사님이 봐주시기로 했어.”


미희는 지헌의 음흉한 속내를 사뿐히 무시하고 지나갔다. 사라지는 뒷모습도 꼭 저처럼 야무지고 새침하다.


“저놈의 성질머리.”


혀를 차면서도 그의 얼굴은 느슨히 풀어져 웃고 있다. 선호의 말대로 미희가 흘겨봐도 흐물흐물했다.


그는 왜 미희의 심기가 불편한지 잘 알고 있다. 전날 다은이가 속한 학회에 참석한 것이 그 이유였다. 

학회에서 만난 다은이와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고, 과거에 돈 봉투 전해 주려고 연수원 앞에서 무작정 기다렸을 뿐, 다은이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일부러 미희의 오해를 풀지 않았다. 아직 미희를 완전히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요새 들어서는 그런 오해가 미희와의 냉전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나 의문이 들기 시작했지만.


그는 사라지는 미희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뒤이어 나오는 조 변호사와 마주치고 슬쩍 질문을 던졌다.


“최 변호사는 어때?”


“실력은 좋은데 조금 더 거칠어질 필요가 있겠어. 너무 우아하게 싸우려고 하네.”


그도 내심 느끼는 바였다. 미희는 늘 정공법으로 승부를 내려고 했고 그런 방식은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너무 기죽이지는 마. 애가 잘하려다가도 실수하잖아.”


지나가듯이 가볍게 말했지만 걱정하는 속내가 감춰지지는 않았다. 

미희를 성장시킬 수 있는 조 변호사에게 그의 손으로 보내 놓고 매사 노심초사였다. 어이없는 시선이 지헌을 향했다.


“네 눈에는 최 변호사가 기죽은 거로 보이냐.”


농담이라도 그렇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의 눈에만 주관적으로 안쓰러워 보일 뿐 객관적으로 미희가 누구한테 당하고 살 성격이 못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이번 사건은 어때? 하필 어려운 걸 맡아서.”


며칠 전 그토록 원하는 사건을 맡고 그의 사무실로 뛰어들어 와 좋아하던 미희를 떠올렸다.


“제법인데.”


“그럼 누구한테 배웠는데.”


“그렇게 좋아?”


“그래. 좋아 죽겠다. 너 파기환송7) 몇 번 했지? 내가 너보다 더 많이 해야지.”


“그거 많이 해서 뭐 하려고.”


“너 제치고 내가 그 자리에 앉을 거다, 왜.”


그렇게 임팩트 있는 사건, 사방팔방에 이름을 떨칠 수 있는 사건, 노래를 부르더니 결국 원하는 대로 사건을 맡았다. 

근데 하필이면 미희가 가장 약한 분야에 대법원에 계류 중인 사건이었다.

자기가 위인도 아닌데 세상에 이름은 떨쳐서 뭘 하겠다는 건지, 그렇게 고생해 봤자 늙기밖에 더해?


애초 그의 꿈은 변호사가 아니었다. 미희가 쳐다보는 곳에 있고 싶어서 어쩌다 보니 법조계에 발을 들였고, 이왕 발 들인 거 열심히 하는 것뿐, 저렇게 일에 집착하는 미희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저 매일 밤을 꼴딱 새워도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며 목구멍까지 치미는 잔소리를 삼킬 뿐이었다. 

대법원 공보에 이름 한번 실리는 게 소원이라는데 원하는 대로 한번 살아 봐라 싶었다.


“자극하면 그대로 반응이 돌아오는 타입이라 흥미로워. 자존심이 세서 아득바득 따라온다니까. 가르치는 재미가 있어. 두고 봐. 최 변호사가 너를 뛰어넘을 테니까.”


조 변호사는 명쾌하게 지헌의 기우를 일축했다. 그와 일할 때보다 둘이 꽤 잘 맞아 보였다.


미희를 살살 다루기만 하는 그보다는 미희를 성장시킬 수 있는 조 변호사에게 보냈고, 그의 의도대로 미희의 실력은 나날이 발전해 갔다. 

그래 놓고 장단이 잘 맞는 둘에게 묘하게 질투심이 일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거참, 기대되네.”


그러곤 저녁 무렵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미희가 좋아하는 가게의 초밥을 사서 미희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종일 바짝 달아오른 몸은 바람결에 전해지는 미희의 향기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미희는 진지한 얼굴로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요사이 미희를 지켜보는 심정은 예전에 도서관에서 처음 만났을 때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음흉한 그의 눈빛조차 불순하게 느껴지고, 저런 눈빛이면 뭐라도 하겠다, 싶은 야무진 눈빛이 대견하고 여전히 일에 밀리는 그의 처지가 조금 씁쓸하기도 했다.


그래도 두 번째라도 꼽아 주는 게 어디야. 예전에는 안중에도 없었는데. 그때에 비하면 많이 출세한 거지.


자신의 처지를 합리화하며 가라앉는 마음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미희가 조금만 잘해 줘도 정신을 못 차리는 거 보면 아무래도 평생 짝사랑만 할 팔자인가 보다.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미희가 흘끔 그를 쳐다보았다.


“뭐 해.”


“판례 검색해.”


미희는 피곤한 듯 어깨를 주무르며 시선을 모니터로 향했다.


“먹고 해.”


그는 손에 든 초밥을 들어 보였다. 미희는 못 이기는 척 자리에서 일어나 새침하게 그의 앞에 앉았다.


“아직도 많이 남았어?”


그는 초밥을 식탁 위에 풀어 놓고 미희의 앞에 물을 따라 주었다. 미희는 초밥을 입 안 가득 욱여넣으며 인상을 썼다.


“몰라.”


“왜, 문제 있어?”


그는 조심스레 미희의 얼굴을 살폈다. 미희는 툴툴대며 입을 열었다.


“갑자기 들어온 자문 때문에. 에이스테크, 여기랑 계속 일해야 돼?”


“왜.”


“꼭 금요일 저녁에 서류 던져 주면서 월요일 아침까지 해 놓으라잖아. 자기들은 주말에 쉬면서 남들은 쉬지도 못하게 해.”


“힘들면 빼 줘?”


“그런 건 아니고…. 나도 배우는 게 있으니까. 내 말은 기한을 넉넉히 달라 이거지. 급한 것도 아니면서 가만 보면 버릇이야.”


“먹고 있어. 내가 좀 찾아볼게.”


그는 미희 대신 의자에 앉았다. 그러곤 골무를 끼고 책상 위에 늘여 놓은 서류를 뒤적이며 질문을 던졌다.


“소송 중인 사건은 어느 정도 진행된 거야? 이승한? 이 사람은 증인 목록에서 왜 뺐어? 의뢰인의 가장 최측근인데?”


“성격이 좀 다혈질이야.”


“그래도 우리 쪽에 유리한 증인인데… 연습해도 안 되겠어?”


“반대 신문 하다가 자폭할 거 같아.”


미희가 진저리 치며 고개를 저었다.


최근에 승리를 확신하다가 재판 날까지 증거를 숨긴 의뢰인에게 당한 뒤로 매사 조심하는 듯했다. 

숨긴 증거가 상대 쪽에서 튀어나오는 바람에 급하게 여러 명이 달라붙어서 다시 판을 짜느라 꽤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너도 일하면서 불의타 맞은 적 있어?”


초밥을 먹던 미희는 문득 질문을 던졌다. 서류를 넘기는 지헌의 손이 멈칫했다.


“…있어.”


“언제?”


당연히 없겠거니 넘겨짚던 미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맞은 불의타에 미희는 흥미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 쪽으로 아예 몸을 틀어서 눈빛을 반짝였다.


“라운지 사건 때.”


지헌은 지그시 미희를 응시하며 짧게 답했다.


“아… 그때.”


미희는 뒤늦게 깨달은 듯 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곤 코를 쓱 문지르며 뿌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너한테 첫 불의타를 준 사람이 나란 말이지.”


“그래. 그거 수습하느라 꽤 힘들었어.”


“나는 저번 로펌에서 일할 때 헌재에서 위헌결정 내려진 적 있거든. 멀쩡한 법률이 하루아침에 위헌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 대법원 판례 들고 가서 다 이긴 재판이었는데, 나 그때 법정에서 난동 부릴 뻔했잖아. 너도 그때 법정에서 꽤 아찔했지? 하여간 불의타는 언제 맞아도 날벼락이야. 그지?”


미희가 맡은 사건은 늘 주시해서 지켜보았고, 법률이 없어져서 물 먹은 사건은 그도 알고 있었다. 운이 없었다고 당시 안타까움에 혀를 찼던 기억이 있다.


그가 불의타를 맞았다는데 왜 기분이 좋아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종알종알 떠드는 모습을 보니 좋기는 했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서 초년생 때 했던 실수담을 들려주었다.


“예상하지 못한 쟁점이 사실로 확정된 적도 있어. 그것 때문에 질 뻔한 거 시간 끌어서 다행히 조정으로 마무리되긴 했는데 두고두고 아쉬운 재판이기는 해.”


“그래? 진짜 억울했겠다. 나도 그런 경험 있거든. 내가 그 심정 알지.”


미희는 깊이 공감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둘이 주거니 받거니 떠들다가 문득 조용해서 쳐다보니 미희는 복권을 맞추어 보고 있었다.


“너 아직도 그런 거 해?”


그는 놀라서 물었다.


“그래.”


미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내가 변호사 돼서까지 복권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변호사 하면 정의도 실현하고 돈도 많이 벌 줄 알았지.”


“정의 실현하고 싶었으면 검사 했어야지.”


“그러게. 근데 수사는 성격에 안 맞아서. 공무원 월급도 너무 적고.”


그러더니 ‘에이, 또 꽝이네.’ 중얼거리며 새 복권을 꺼내는 미희를 지헌은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그렇게 돈 벌어서 뭐 해? 딱히 쓰는 곳도 없잖아.”


그가 알기로 미희는 물욕이 없었다. 그 언젠가 농담으로 한 말처럼, 펑펑 쓰고 살지도 않을 거면서 돈에 집착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적지 않은 연봉으로 혼자 사는데 생활이 어려울 이유도 없겠고.


또 꽝인지, 쫙쫙 찢어서 봉투에 버리는 미희를 그는 이해 못 할 얼굴로 쳐다보았다. 미희는 탁자 위를 정리하며 야무지게 답했다.


“애리, 기숙사 들어갔어. 잘 교육해야지. 학자금 빚도 조금 남았고.”


“어머니는?”


예전에도 미희는 집에 별로 애정이 없던 기억이 났다. 미희에게 집은 탈출하고 싶은 장소이지 안식을 주는 장소가 아니었다. 

부모님이 화제로 올려지자 미희는 잠시 침묵하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연수원 나와서 엄마랑 몇 번 연락했어. 돈을 벌면서 주기적으로 용돈도 조금씩 보내 드렸고. 근데 어느 날 빚쟁이들이 회사에 찾아온 거야. 내 이름 팔아서 엄마가 돈을 빌리셨더라고. 엄마가 무슨 신용이 있겠어. 변호사 딸을 담보로 돈을 빌린 거지. 물론 뒤에서 새아버지가 조종하셨을 테지만. 난 무척 화를 냈고 연락을 끊었어. 그리고 몇 년 뒤인가, 어렵게 애리와 연락이 닿았어. 엄마가 많이 아프대. 한 번만 와 달라고 했어. 난 안 갔고… 엄마가 돌아가셨어.”


“…….”


“그게 끝이야.”


미희가 쓸쓸하게 말을 맺었다.


“살아서도 부모 노릇 제대로 못 하더니 갈 때도 자식 가슴에 못을 박고 가더라.”


오래전, 미희의 집에 갔던 기억이 난다. 생각보다 더 열악한 환경을 보면서 그는 속으로 안도했다. 

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를 계산한 비열한 속내였다. 

모두의 앞에 그들의 관계가 낱낱이 까발려지고 학교 게시판에 온갖 루머가 돌면서 걱정하는 척 미희를 위로했지만, 속마음은 차라리 후련했다.

변명하자면 그의 품에서 세상 풍파 없이 곱게 살게 해 주고 싶었다. 미희의 결핍을 그가 다 채워 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결국, 다 어그러졌지만….


“미안해.”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네가 뭐가 미안해.”


미희는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가끔 가슴속에 뜨거운 게 치밀 때가 있었어. 너를 만날 때 되게 삐뚤어진 마음이었던 것 같아. 그래서 너 괴롭히면서 못되게 굴기도 했고…. 너랑 헤어지고 후회한 적도 있고 네 생각 날 때도 많았어. 엄마 돌아가셨을 때도 그렇고…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겠어. 넌 뭐든지 다 알고 있잖아. 그때 내가 어떻게 해야 했을까. 내내 지겨워했고 그렇게 도망치고 싶었는데… 그런 엄마라도 돌아가시고 나니까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것 같았어. 병든 엄마를 두고 새아버지는 빚만 남기고 도망가셨고 내 옆에는 어린 애리만 남았는데 갑자기 내가 가장이 된 그 상황이… 너무 무섭고 막막했어. 엄마 보내 드리고 혼자 집에 와서 우는데… 네 생각이 많이 나더라.”


“…….”


“나 되게 이기적이지.”


미희가 그를 보며 설핏 웃었다. 혼자 울면서 그를 찾았을 미희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나한테 왔어야지. 그때 나한테 왔어야지.”


그는 꽉 잠긴 음성으로 안타깝게 속삭였다.


바라는 건 미희의 옆에서 돌봐 주고 챙겨 주고 싶은 것 하나였다. 그가 바란 건 고작 그것뿐이었는데….


지헌의 말에 미희는 작게 웃었다.


“그러게. 조금 더 뻔뻔했으면 좋았을걸. 난 늘 이도 저도 아니다가 후회하는 거 같아.”


그러곤 일부러 가볍게 덧붙였다.


“지금은 괜찮아. 그렇게 불쌍하게 볼 거 없어. 동정할 거면 내 연봉이나 올려 주든가.”


재판하다 보면 어떤 상대이든 빈틈이 보였다. 그런데 미희를 움직일 수 있는 건 돈도 뭣도 아니었다.

차라리 단순히 돈과 성공만 밝히는 타입이면 좋았을걸. 


돈으로 미희를 살 수 있었다면 전 재산도 아깝지 않았다. 성공을 바란다면 그를 지지대 삼아 꼭대기까지 올려 주고 싶었다.

그런데 미희를 움직일 수 있는 건 그 무엇도 아니었다. 미희의 마음을 얻는 게 그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


소파에 앉아 잠이 든 지헌을 내려다본다. 서로를 감싸 주다가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지헌은 내 어깨를 뒤로 밀면서 소파 위에 눕혔다.


종일 나를 탐하던 지헌의 눈. 그 눈이 나를 충동질했다. 나는 나른히 눈을 내리뜨고 지헌에게 순순히 다리를 벌렸다. 

지헌은 내 무릎을 직각으로 들어 올리고 그의 성기로 희롱하듯이 몇 번 질구를 문지르더니 천천히 들어왔다. 

부드럽게 파고드는 감촉이 기분 좋았다. 눈을 감고 흐트러진 숨을 내쉬는 내게 지헌이 간절히 속삭였다.


“우리 서로 핥아 주면서 살자. 알잖아. 나도 너밖에 없어.”


관계는 여느 때와 비슷했지만, 안쪽에서 차오른 충만한 느낌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숨이 가쁘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그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알 수 없어서 나는 지헌의 목덜미에 손을 감고 다급히 끌어당겼다.


“더 깊이, 깊이 들어와 줘.”


이미 평소보다 깊이 들어와 있는데 그것으로 부족했다. 한 몸처럼 더 깊이 지헌을 느끼고 싶었다. 

지헌은 내 엉덩이를 꽉 움켜잡고 더 가까이하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처럼 깊이 파고들었다. 그러곤 소파가 삐걱거릴 정도로 강하게 허리를 내려쳤다. 

폭발하는 감정만큼 움직임도 거칠었다. 그때마다 내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응, 더 세게, 세게!”


안쪽에서 강한 펄떡거림이 느껴지고 지헌은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나는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잠에 빠져든 지헌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관계 후 땀에 끈적이는 몸뚱이를 끌어안고 숨을 고르다가 지헌은 잠에 빠져들었다. 

혼자서 양쪽 업무를 다 챙기는데 고단할 만했다. 

사서 고생하는 건 내가 아니라 자기면서 자꾸 누구보고 고생한다는 건지. 예나 지금이나 정지헌은 변한 게 없다.


화를 내다가도 내가 조금만 아픈 척하면 마음이 약해졌고, 내가 잘못해 놓고 적반하장으로 토라진 척하면 조심스레 얼굴을 살폈다. 그래서 너는 과거에 내게 약자였고 앞으로도 약자일 수밖에 없다.


'바보같이 다은이와 사귀었다는 걸 누가 믿는다고.' 


헤어진 동안 내 일거수일투족을 다 꿰고 있었으면서. 끝까지 속이려는 게 괘씸해서 조금 괴롭혔더니 종일 안달 난 시선이 나를 따라왔다.


얼마 전 우연히 로그아웃 안 된 컴퓨터로 지헌의 이메일을 보게 됐고, 거기서 이전 로펌의 대표 메일을 발견했다. 

대표는 주기적으로 내 근황을 지헌에게 알려 왔다. 어쩐지 갑자기 투입된 사건이며 시기에 딱 맞아떨어진 이직이 이상하긴 했다.


이 로펌에 오게 된 것도 지헌의 입김이 들어간 것이 분명했다. 

그런 지헌의 집착과 숨 막히는 관심이 싫지 않다. 오히려 나를 흡족하게 했다. 그렇게까지 나를 원한다는 거니까.


헤어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렸다면 절대 지헌을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과거의 나를 보면 적반하장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지헌에 대한 소유욕은 그냥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과거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지헌에게 여자는 오직 나 하나뿐이다. 지헌의 몸도 마음도 다 내 것이어야 했다.


'자기가 머리 써서 날 잡은 줄 알겠지. 네가 잡은 게 아니라 내가 잡혀 주는 건데 바보.'


잠에 빠져든 지헌의 얼굴은 꽤 순해 보인다. 나는 조심스럽게 지헌의 반듯한 이마를 매만지고 날렵한 콧날을 따라 손가락으로 쭉 내리그었다.

이렇게 보면 예전 대학생 때 앳된 모습이 남아 있는 것도 같고. 대학 때 사진이나 많이 찍어 둘걸. 둘이 같이 찍은 사진 하나 없는 게 가장 아쉬웠다.


턱을 괴고 지헌의 얼굴을 감상하다가 생각난 듯 바지 주머니에서 반지 케이스를 꺼내었다. 

뚜껑을 열자 같은 모양의 반지가 반짝였다. 며칠 전 정지헌 몰래 맞춘 커플 링이었다.


아직도 나는 사랑이 어려웠다. 나는 자라면서 한 번도 사랑을 받아 보지 못했고, 내가 받아 보지 못한 걸 누군가에게 줄 수도 없었다. 

그러나 네가 내게 주는 게 사랑이라는 건 안다. 세상에 사랑이 있다면 지헌이 내게 주는 마음일 것이다.


네 시선을 내게 잡아 두고 싶고, 너에게 못된 말을 퍼붓고 미안해하고, 너에 대한 생각으로 밤에 잠 못 이루고, 예전의 너를 떠올리면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지는 거… 나는 아직 그 마음에 합당한 이름을 찾지 못했다.


사랑이라기에는 정지헌의 마음에 비해 한없이 부족한 것 같고, 좋아한다는 말은 내 마음을 표현하기에 너무 밋밋했다. 그저 조금 더 시간이 흐르고 마음이 차오르면 나도 자연스레 지헌에게 사랑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도 그때까지 지헌에게 순간순간의 진심을 전달하려 노력하고 싶다. 원하는 장난감을 손에 넣은 아이처럼 내 마음이 언제 변덕을 부릴까 바보같이 불안해하는 모양이니까.


나는 지헌의 손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그리고 내 손에도 같은 모양의 반지를 끼우고 지헌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꼭 붙잡고, 다시는 이 손을 놓지 않으리라. 서로의 손에서 반짝이는 한 쌍의 반지가 보기 좋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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