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야설

아내와 나의 머나먼 여정 ( 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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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성냥개피 유희 .


밤이 이슥해진 시각, 목욕을 끝낸 나는 화원 연못가로 향했다.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이 한결 상쾌하게 느껴지며 온몸으로 활력이 샘솟는 것 같았다.

어둠이 덮인 화원의 운치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훗! 오늘 밤은 설향 누나를 발가벗겨서 발라당...흐흐"


시답잖은 야릇한 상상을 머릿속으로 마음껏 떠올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나는 움찔했다.


"으흑! 저, 정말 죽이는데.!"


연못가에는 의자들이 여기저기 놓여있고 대나무를 통째 엮어 바닥으로 만든 평상이 한쪽에 설치되어 있다.

설향 누나가 혼자 뭘하면서 나를 기다리나 살금살금 다가가던 나는 어두운 나무 그늘에 의지해 몸을 감추어야 했다.


평상 위에는 소향주와 쟁반에 받쳐진 안주 접시, 그리고 설향 누나가 아닌 또 다른 한 사람의 여자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낮에 행사를 다녀오면서 쌓였던 스트레스라도 풀려는지, 은은하게 흩뿌려지는 조각달의 은가루 아래서 술잔을 한 손에 들고 있는 이화 누님.


흑단 같은 긴 머리를 치렁치렁 어깨너머로 흘러내리게 늘어뜨린 누님의 자태. 가느다랗게 완만한 곡선을 이루는 턱선 밑에서 찰랑거리는 머릿결이 달빛에 반짝반짝 빛나고, 길고 곧게 뻗은 다리와 말라 보이지 않은 적당한 두께의 팔과 완벽한 곡선을 그리는 허리, 저고리를 비집고 솟아 나올 듯 팽팽하게 부푼 젖가슴, 그리고 하얗게 빛나는 목덜미.


화원 귀퉁이에서 비치는 불빛을 등지고 서 있는 누님.

야리야리한 한 겹 천을 사이에 두고 몸의 굴곡이 아스라이 내비치는 그 모습은 정말이지 월궁의 항아리처럼 아름답기 그지없는 한 폭의 그림이었다.

누님은 얇은 치마 아래로 속곳도 입지 않은 듯 몸매를 여실히 드러내는 실루엣이 내 두 눈에 확연하게 비쳐왔다.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내가 도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순애에게만 집중해야 할 텐데, 나는 나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어옴을 느꼈다.

진짜 내 핏속에 바람둥이 유전자가 섞여 흐르는 건지,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세상의 모든 대상과 교감하고픈 욕심이 샘솟는다.

그것은 상상만으로도 싱그럽고 활력 넘치는 일이다.


그러나 상대는 나를 친동생처럼 아껴 보살펴주었던 이화 누님이 아닌가.

겉으로는 늘 초가을 무서리 같은 쌀쌀한 한기를 내게 풀풀 풍기지만, 내면의 숨겨진 마음은 은혜 이모보다도 더 부드럽게 따뜻한 정을 베푸는 그녀에게, 누님 그 이상의 묘한 그림을 연상하다니.


가볍게 몸을 움직일 때마다 치마 아래로 굼실거리는 누님의 둔부, 거기에 내 시선은 꽂혀 한참을 떨어지지를 않았다.

도저히 서른 중반의 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유혹적인 누님의 모습은, 내 마음속 한구석에 뭔가 뜨거운 흔적을 각인시키는 것 같았다.


길게 숨을 불어낸 후에 천천히 몸을 드러내었다.


가까이 다가가는 내 발걸음은 잔잔한 수면 위를 걷듯 가벼웠고, 두근거리는 가슴속은 마치 바람에 일렁이는 나뭇잎처럼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었다.


"마음에 여유를 가지자!"


옷감 천이 얇은 개량 한복으로 몸을 감싼 누님은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나자, 얼른 고개를 돌려 바라다본다.

나는 다시 한번 훅! 숨을 들이마셨다.

선명하게 그려진 붉은 입술은 너무나 도발적이라 저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누구? 일영이구나.!!”

“어쩐 일이우? 피곤해서 쉰다며...”

“후후. 훼방 놓으려고 나왔지. 너희 둘이 연애질 하는 거.”


깎은 무처럼 하얀 이마, 바람결에 살랑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우아하게 걷어 넘긴 누님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설향 누나는 그 뒤에서 주먹을 쥐고 누님 뒤통수를 때리는 시늉을 해 보이고.


“한잔할 테야?”

“주쇼, 목욕했더니 목이 컬컬하네.”


술병을 쥐어 잡고 기울이는 누님의 작은 움직임.


분명하다. 고쟁이는 물론 속옷도 입지 않은 게 틀림없어 보였다.

나는 나무 의자에 털썩 주저앉을 때까지 누님의 몸 어딘가에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고, 그제야 누님도 뭔가 이상한 낌새를 차린 듯 어색한 표정을 짓는다.


자세를 고쳐 앉는 설향 누나의 젖가슴에 잔을 내민 내 팔꿈치가 슬쩍 닿았다.

여인들이 상체를 수그릴 때 살짝 드러나는 가슴골의 그 묘한 곡선도 눈을 자극하지만, 이렇게 은연중에 스치는 촉감도 기분 좋은 느낌이다.


"이 여자들이 사전에 작당하고 모의했나."


내가 목욕하는 사이, 옷을 또 갈아입은 누나는 바닷물에서 막 건져낸 듯한 옥빛 원피스를 시원하게 입고 있었고, 둔하지 않은 내 느낌으로는 설향 누나는 분명 젖가리개를 입지 않은 것 같았다.


남자와 여자는 부딪치면 전기가 통하는 모양이다.

순애의 목욕 장면, 누님의 아스라한 몸태, 그리고 설향 누나의 뭉클한 젖가슴, 연이은 시각과 촉각적인 자극에 야릇한 흥분감이 아랫도리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진짜, 우리 연애질하는 거 방해하려고 나왔소?”

“사람 피곤하게 두 번씩 말 시키니. 잔이나 비우셔.”

“아까는 금방 쓰러질 것처럼 피곤하다면서 왜, 쉬지 않고?”

“너무 피곤해도 잠이 잘 오질 않아, 훼방질은 농담이고, 소향주 한 병 들고 후원으로 들어왔더니 마침 설향이 있었네. 근데, 정말 요즘 둘이서 연애질하는 거야? ”

“내가 언제 거짓말하는 것 봤소? 그날도 봤으면서.”


무슨 자랑이라고 설향 누나는 고주알미주알 입술을 나불거리며 바람을 잡는다.

나를 아주 빼도 박도 못하게 하려고.


“이 나쁜, 바람둥이! 너,설향이랑 그래 놓고 뭐? 순애 데리고 나가 살겠다고 말했다며?”

“누, 누가 누굴 데리고 나가. 그냥.”

“내가 모를 줄 알고, 요즘 부쩍 뻔질나게 자미정 드나들 때부터 알아봤어.”


이화 누님의 비아냥에 기다렸다는 듯 사정없이 설향 누나의 손톱이 세워져 왔다.


“그래 놓고 뭐? 이 바람둥이 자식.”

“아야! 제발 꼬집지 좀 마.”


하여튼 여자는 둘 이상 모이면 뭐가 깨져도 깨지는 모양이다.

이모에게 지나가는 말로 순애랑 살고 싶다고 한마디 했는데, 그 말을 왜곡해 뭐? 순애를 데리고 나가 산다고? 이런, 완전 들통을 다 내버리네.


“그 얘긴 그만해, 괜히 화원의 좋은 분위기 다 망쳐. 누님. 이모는 어디 갔나 봐?”

“으응, 월선이가 아까 집에 가면서 그러네, 큰언닌 오후 참에 성포 내려갔다고.”

“성포(腥浦)? 순애 고향이 성포랬는데 이모가 거긴 왜?”

“나도 몰라. 뭔 볼 일이 있나 보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모르는 아니, 내게 숨기는 무언가 비밀을 이모는 감추고 있는 모양이다.


다 큰 순애를 데려다 수양딸을 삼는다는 그것 자체가 모순이다.

그리고 순애가 자미정에서 생활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은혜 이모는 내게 더 많은 뭔가를 자꾸만 숨기는 듯한 인상을 심어주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베일에 가려진 그 비밀이 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누님은 몇 번이나 이야기할까 말까 망설이더니, 그냥 빈 술병과 쟁반을 챙겨 들고는 몸을 일으켰다.


“에구, 늙은이는 그만 비켜야겠다. 향이 년 눈꼴시어 더는 못 봐주겠고.”


이화 누님은 이내 연못가를 벗어나 화원에서 멀어져갔다.

드러낼 곳을 실루엣으로 드러낸 하얀 갑사 치마저고리가 가볍게 휘날리는 그 모습은, 언젠가 내가 명명해 별명으로 지어주었던 하얀 배꽃을 연상케 했다.


그렇게 나는 누님의 그 황홀한 모습에 잠시 넋을 잃고 있다. 설향 누나의 꼬집힘에 퍼뜩 정신을 차렸지만.


“아얏! ”


“아예, 넋이 빠졌어요, 빠졌어. 순애도 모자라 이화 언니도 넘보다니, 아무리 날건달 바람둥이라지만 해도 해도 너무하는 거 아니니?”

“이씨, 꼬집지 말라니깐. 그리고 내가 언제 누님을 넘봐? 누님이 뭐 담장 너머 구경거리야? 넘보게. 그게 다 설향 누나가 콧대를 높이니까 그런 거라고.

몰라? 마늘쪽 같던 누나 콧대가 요따만하게 높아진 거.”


나는, 정말이지 마늘쪽처럼 딱 알맞게 솟아있는 누나 코를 꼭 집이었다.


“풉! 뭐라고? 이게?”


티격태격, 마치 사랑싸움할 때처럼 자연스러운 신체접촉에 이어 설향 누나는 어느 순간 내 품 안으로 안겨들었다.

순애의 목욕 장면을 훔쳐보고, 그리고 이화 누님의 아슴푸레한 그림을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그리고 있던 나의 아랫도리는 욕망을 배출할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소향주의 향취를 살그머니 누나 입술에 옮겨 실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이화 누님이 왜 후원에 들어왔어?”

“혼자 기분이 안 좋았나 보지 뭐. ”

“혹시 정(석채)검사 그 작자 때문에 그런 거 아냐?”

“나도 자세히는 모르는데 요즘 좀 우울해 보이기는 했어. 난 그냥 가게 영업이 시원치 않으니 그런가 보다 했는데, 네 말 듣고 보니 그것도 또 그러네.”


정석채는 항도 지검에 검사보로 있는 누님의 연하남 애인이다.


이화 누님이 자미정에 몸을 담고 기생이 된 것도 그 남자의 뒷바라지 때문이었다는 소문 아닌 소문도 들리긴 했지만, 믿을 수는 없다.

요즘 세상에 무슨 홍도야 울지 마라를 뒤집어 놓은 신파극 순애보는 아닐 테지만, 남녀 상열지사의 세세한 내막은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튼 결론은 이화 누님이 기생질하면서 온갖 뒷바라지를 다 해 놓았는데, 최근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닌가 미루어 짐작만 할 뿐이다.

그 문제의 핵심에는 누님의 기생이란 위치도 원인으로 작용하겠지만, 궁극적으로 내가 판단할 때는 아마 그에게 새 여자가 생긴 것 같았다.


“누나. 나 잠깐 누님 방에 갔다 오면 안될까?”

“...왜? 이 밤중에 뭣 하러?”

“그냥, 누님 뒷모습이 왠지 애련해 보여서. 낮에 행사 뛰고 했으니 잠깐 안마라도 해줄까 봐.”

“어쭈, 그럴 땐 착하네. 하지만 안돼! ”

“왜? 내가 뭔 딴짓이라도 할까 봐서 그런 거야? ”

“아니, 설마 언니한테 네가 뭔 짓 하려고. 그냥 내 방으로 가자. 보여줄 게 있어.”

“뭔데? 나중에 보면 안 돼?”


내 품 안에서 슬그머니 몸을 일으킨 누나는 무의식적인 척 내 아랫도리를 툭 친다.

그게 무슨 사인인지 내가 알 턱이 있나. 내 거시기가 필요하다는 신호인지, 아니면 내 거시기를 귀여워해 주겠다는 뜻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도대체 뭘 보여주겠다는 것인지 모르지만, 이제 곧 알게 될 테니까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화원을 벗어나는 그 순간, 내가 간과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은혜 이모가 성포에 갔다는 이화 누님의 말이었다.

순애, 순애가 혼자 있을 텐데...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내가 그때 그 기회를 놓친 이유가 아마도 설향 누나의 여시(여우)짓 때문이었지 싶다.

설향 누나가 꼬리 서너 개쯤 달린 하얀 여시라면 나는 고작해야 새끼 늑대에 불과했으니까.


“치!, 술 취해서는 잘만 껴안더구먼, 나 좀 안고 가면 안 돼?”


평상에 엉덩이를 눌러 붙인 채 누나는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옹알이를 칭얼거린다.


“무슨, 댓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아니고. 자, 안겨! ”


솔직히 정식으로 설향 누나 방에 들어가는 건 처음이다. 예전에는 가끔 이화 누님 방에서 놀다 잠이 들곤 했지만, 성인이 된 이후로는 말이다.


구조는 내가 사용하는 방과 비슷하다.

다만 지분 냄새가 물씬 풍겨온다는 것과 여자에게 꼭 필요한 경대와 반합 자개장 등, 가구 집기가 다르다는 것 빼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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