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야설

짐승 계약 #19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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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하루아침에 20%나 빠지다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책상을 내려치는 최 회장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노기등등한 그의 얼굴 앞에서 최 회장의 비서실장인 김후연은 당황한 기색을 내보였다.



“얼마 전 인터넷에 올라왔던 자동차 매장 갑질 파동이 저희 거라는 소문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아마 그것 때문에 불매 움직임이 생긴 모양입니다.”


“고작 그런 일로 이렇게 빠진다니 말이 돼? 대체 너네는 처신을 어떻게 한 거야!”


“죄송합니다. 저희도 이렇게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김 실장이 고개를 깊이 숙였지만 최 회장은 분노가 가라앉지 않는 듯 씩씩거리고 있었다. 

주가가 5%만 빠져도 회사가 난리가 날 판인데 하루아침에 20%나 빠져 버리면 개미 투자자들은 공포를 느끼고 앞장서서 손절에 나설 거였다.



특히 세양이 최근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다는 증권가 찌라시가 돌면서 안 좋은 소문이 더해지고 있는데 거기에 이런 일까지 겹치다니 악재의 연속이었다.



'실제로 경영난에 봉착한 지 상당한 시간이 흐른 상태였지만 언론을 틀어막고 있으니 별문제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건 대체.'



최 회장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자 김 실장이 빠르게 말했다.



“포털은 매수해 뒀고 최선을 다해 여론전을 벌이고 있으니 곧 회복될 겁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 이 와중에 주가까지 폭락하면 어쩌란 거야? 제기랄…….”



욕설을 내뱉으며 김 실장을 노려보고 있는데 최 회장의 전화벨이 울렸다.



“이번엔 또 누구야?”



최 회장의 눈썹이 휘어 올라갔다. 

아까부터 임원을 포함한 대주주들의 연락을 받고 있던 터라 불편한 심기를 보이며 휴대폰을 집어 드는데 순간 최 회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 자넨가?”



방금 전의 분노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밝은 목소리로 최 회장이 전화를 받았다. 

그러더니 휴대폰을 귀에 댄 채 자리를 피하는 듯 창가 쪽으로 걸어가며 언성을 낮췄다.

소리를 낮춰 통화하는 최 회장의 모습을 김 실장이 안경을 추켜올리며 의아하게 쳐다봤다.




“지금?”



최 회장이 빠르게 뒤를 힐긋거리고는 말했다.



“아니, 그건 괜찮네. 그래. 그럼 거기서 보지.”



전화를 끊은 최 회장이 곧장 나갈 채비를 하자 김 실장이 물었다.



“이런 시기에 누구와 약속을 잡으신…….”


“개인적인 거니 신경 안 써도 돼. 어쨌든 수습 잘 하고 있어.”



손을 내저은 최 회장이 바삐 집무실을 나섰다. 허둥지둥 밖으로 나가는 최 회장의 뒷모습에 닿아 있는 김 실장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



한남동의 유명 한정식집 별채에 최 회장과 정혁이 마주 앉았다. 

옥빛 한복을 차려입은 직원이 정갈하게 세팅을 마치고 나가자 정혁이 최 회장의 잔에 정중히 술을 따랐다.



“심려가 크실 것 같은데 괜찮으십니까.”


“살다 보니 별일도 다 있군. 예전엔 이런 작은 소란쯤 사라지게 하는 건 일도 아니었는데.”



고급 전통주를 한 입에 털어 넣은 최 회장이 인상을 썼다. 그의 심기를 이해한다는 듯 정혁이 말했다.



“SNS에서 무작위로 퍼진 정보는 수습하기 쉽지 않습니다. 저희도 최근 고생한 적이 몇 번 있습니다.”


“다들 비슷한 모양이군.”



정혁이 다시금 최 회장의 빈 잔을 채워 줬다. 그것도 한 번에 들이켠 최 회장이 인상을 찌푸린 채 잔을 내려놓았다.

힐긋 시선을 들어 올리자 정혁은 점잖은 자세로 예의를 지키고 앉아 있었지만 술을 마시진 않았다.



“…….”



물 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정혁의 모습을 최 회장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주시했다. 

그러다 그가 잔을 내려놓고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리기 전에 얼른 시선을 거뒀다.



“실례하겠습니다.”



마침 문이 열리고 직원이 들어서자 식사가 준비됐다. 호화스럽게 차려진 요리들을 별말 없이 맛보던 최 회장이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가? 실장도 없이 나오라는 걸 보면 뭔가 중요한 이야기일 것 같은데.”


“저에겐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반듯한 자세로 앉아 식사를 하던 정혁이 젓가락을 내려놨다.



“어쩌면 최 회장님께도 그렇게 될 수 있겠군요.”



정혁의 말을 들은 최 회장의 노회한 눈이 흥미롭다는 듯 빛났다.



“내가 예상하는 게 맞는 것 같군.”



최 회장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내밀자 정혁은 두 손으로 술병을 들어 잔을 채워 주었다. 

이번에도 단숨에 술을 입에 털어 넣은 최 회장이 입술을 길게 늘였다.



“언제 말 꺼내나 궁금하긴 했네. 지금까지 나에게 물어다 준 것들보다 이번엔 얼마나 더 큰 걸 물어 왔는지도.”



탐욕을 숨기지 않고 노골적으로 내보이자 정혁은 예의를 갖추면서도 시선은 똑바로 최 회장에게 향했다.



“제 제안이 지금의 회장님 상황에선 절대 기대에 못 미치진 않을 겁니다.”



정혁의 자신감을 내보이는 태도에 최 회장은 더욱 기대에 찬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이쯤 되면 더 숨길 것도 없었다. 여유로운 척 떠보기엔 그의 입장은 이미 궁지에 몰린 상태였다. 그

리고 그 사실을 앞에 있는 남자가 알고 있다는 건 최 회장도 간파한 바였다.

여기서 더 따져 봐야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최 회장이 술잔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매만졌다.



“……흥미롭군. 그럼 자네는 나에게 뭘 원하지?”



얻을 게 없다면 지금까지 이 남자가 자신에게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왔을 리가 없다. 

이 세계는 셈이 정확했다. 이유 없이 뭔가를 줄 때는 그에 합당한 것을 원하거나 혹은 더 큰 것을 원하고 있을 때 외에는 없었다. 

이 남자가 원하는 게 뭔지 최근 최 회장도 아주 궁금해지고 있는 차였기에 오히려 이런 기회가 반갑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정혁이 입술 끝을 천천히 말아 올렸다.



“약간의 세양그룹 주식이 필요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오간 내용을 태원 측에서 알게 되면 전 이 나라에 발붙이고 살 수는 없을 테니까요.”



최 회장의 눈이 예리해졌다. 그가 알고 있는 김지훈 사장은 별거 아닌 일로 이런 자신감을 보이는 남자가 아니었다. 

기대감을 억지로 누르며 최 회장이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최근 주가가 하락하긴 했지만 아직 이 나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값어치는 가지고 있지. 그건 알고 하는 말일 테지?”


“당연합니다.”



정혁이 최 회장이 좋아할 만한 미소를 만들어 얼굴에 걸었다. 

그 얼굴을 흡족하게 바라본 최 회장은 잔에 남은 술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탁!



빈 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은 최 회장이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적어도 어디에서든 평생 돈 걱정 하지 않고 살 만큼은 마련해 주지. 단, 정말 내 구미를 당기는 걸 물어 왔다면 말이네.”



입은 웃고 있었지만 최 회장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기대감과 초조함이 뒤섞인 그의 번들거리는 눈을 보며 정혁의 수려한 얼굴이 그림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실망드리진 않을 겁니다. 회장님.”



***



“희민 씨. 괜찮아요?”



문득 들린 목소리에 희민이 정신을 차렸다.



“네?”



고개를 돌리자 원장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항상 집중해서 작업하더니 오늘은 영 얼굴도 어두워 보이고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것 같아서요. 집중하기 어려우면 잠깐 쉬어 보는 게 어때요?”


“아니에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망히 말한 희민이 들고 있던 가위를 다시 힘주어 잡았다. 

컨디셔닝 작업을 하던 중이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돌아보니 다들 한참 진도가 나간 뒤였다. 

자신만 밑 작업 중에 정신을 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희민은 드라이된 천일홍을 급히 집어 들었다.



“아얏.”


“괜찮아요?”



근처에 있던 원장이 희민의 목소리에 얼른 다시 다가왔다. 

천일홍을 집어 들다가 가위에 손가락을 찔린 희민의 손에서 핏방울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런, 베였네. 이거 빨리 지혈해야 해요.”


“살짝 벤 거라 괜찮아요.”



원장이 얼른 자신의 손수건을 빼내 손가락을 감싸려 하자 희민이 그 손수건에 피를 묻히기 미안해 뒤로 물러났다.



“이런 상처 허투루 생각하면 큰일 나요. 제대로 소독하고 치료해야지.”



강경한 원장이 결국 희민의 손을 가져다 자신의 손수건으로 감쌌다.



“잠깐 잡고 있어요.”



희민에게 지혈하게 한 원장이 익숙한 듯 구급상자를 가져와 상처를 소독하기 시작했다. 

연고까지 꼼꼼히 바르고 밴드를 붙이고 나자 희민이 사과했다.



“……죄송해요.”


“다들 이런 상처 한두 번씩 나고 그래요. 가시에 찔리는 일도 많고.”



원장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는 웃었다. 수업 중에 신경 쓰이게 한 것 때문에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희민을 다독여 주는 듯했다.



“우선 손도 다쳤으니까 들어가서 쉬고 그거 다 나을 때까진 머리 좀 비워요. 그러고 나서 다시 나오는 게 좋겠어요.”



그 말에 희민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요, 희민 씨. 꽃들도 그런 우울한 얼굴로 자기 보고 있는 거 안 좋아할 거 같지 않아요?”



원장이 미소 지으며 말하자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



“평소의 희민 씨처럼 밝은 얼굴로 집중해서 작업할 수 있을 때 나와요. 기다릴 테니까.”



그녀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는 듯 원장이 다정하게 어깨를 토닥여 줬다.



“그럼 그럴게요. 먼저 가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더 할 말이 없어진 희민이 고개를 숙이고 작업실을 나왔다. 

원장의 말대로 완전히 다른 생각에 빠진 채 만든 작품은 불쌍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드는 자신도 기분이 좋을 것 같지 않고.



‘손까지 다치고. 바보같이.’



한숨을 쉰 희민이 밴드로 감싼 손가락을 보며 건물 밖으로 나오는데 누군가가 그녀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손 왜 이래. 다쳤어?”


“아…….”



정혁이 미간을 잔뜩 좁히고 희민의 손을 끌어당겨 쳐다봤다.

갑자기 나타난 그에게 놀라 잠시 머뭇거렸던 희민이 그의 심각한 얼굴에 정신을 차렸다.



“그냥 작업하다 살짝 다쳤어요. 별거 아니에요.”



큰 상처라도 입은 것처럼 대하는 그의 태도가 민망해 희민이 제 손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정혁은 안심이 되지 않는지 커다란 손으로 꽉 잡고는 다친 손가락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대충 소독만 한 것 같은데, 병원에 가 봐야 하지 않겠어?”


“뭘 이런 걸로 병원을 가요.”



희민이 웃었지만 정혁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



그 얼굴에서 희민은 그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저를 걱정해 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농담처럼 넘길 일이 아니라는 걸 눈치챈 희민이 살짝 시선을 내렸다.



“정말 괜찮아요, 나.”


“괜찮겠어?”



정혁의 말에 희민이 시선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간 얼굴을 보고서야 안심한 듯 깊이 한숨을 내쉰 그가 다친 손가락이 닿지 않게 조심스레 손을 잡았다.



“앞으로는 조심해. 이런 상처도 커지면 위험해질 수 있어.”


“원장님도 그렇게 말하면서 얼마나 꼼꼼하게 치료해 줬는데요. 전문가 손길이 따로 없던데요.”



희민이 작게 웃으며 말하자 정혁이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래도 조심하란 얘기야.”


“알았어요.”



그녀의 어여쁜 미소에 정혁의 굳어 있던 얼굴도 점차 풀어졌다.



“그런데 벌써 온 거예요?”



원래대로면 클래스가 끝날 시간은 아직 한참 남은 상태였다. 그가 벌써 와 있는 것이 이상해 희민이 묻자 정혁이 세워 둔 차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일이 일찍 끝났어.”


“…….”



매너 있게 조수석 문을 열어 주는 정혁을 그녀가 잠시 바라봤다. 차에 들어가지 않고 멈춰 선 희민을 그가 의아하게 내려다봤다.



“당신 얼마나 바쁜 사람인지 아는데. 나 걱정돼서 온 거죠? 어제도 나 기다리고 있었잖아요.”



최지윤을 만나고 온 날 이후로 정혁이 자신을 바짝 신경 쓰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전화도 더 자주 하고, 평소보다 더 일찍 만나러 오는 그를 보면 모를 수가 없었다.



“…….”



정혁은 차 문을 연 채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말없이 응시하는 시선에서 대답을 찾은 희민이 입술 끝을 둥글게 휘어 올렸다.



“걱정할 거 없어요. 생각보다 괜찮으니까.”



물론 수업에도 집중할 수 없을 만큼 정신이 빠져 있는 시간들이 있긴 했다. 

자다가도 감옥에서의 나날이 떠올라 벌떡 일어나는 일들도 있었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숨이 막힐 것 같은 순간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정혁을 걱정시키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자신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생각보다는 괜찮다고. 괜찮은 거라고.



“당신이 날 이렇게 신경 써 주는데 뭐.”



정말 괜찮다는 듯 그녀가 웃어 보였다. 그가 희민을 좀 더 깊이 들여다봤다. 조용히 응시하던 정혁이 숨을 뱉으며 팔을 뻗어 그녀를 품에 안았다.

단단한 가슴에 안기게 된 희민의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내려왔다.



“일부러 괜찮다고 할 필요는 없어.”


“그런 거 아니라니…….”


“노력할 필요 없다는 뜻이야.”


“…….”



그녀는 커다란 품에 안긴 채 가만히 있었다.



“한희민의 안 좋은 버릇이잖아. 괜찮은 척하려는 거. 괜찮아 보이려 노력하는 거.”



순간 희민은 예상치도 못하게 가슴에 차오른 뜨거운 것이 목까지 턱 올라온 느낌이었다. 그것을 겨우 눌러 삼켜 낸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걸 당신이 어떻게 다 알아요?”


“알고 있어.”



낮게 말한 정혁이 희민을 천천히 떼어 내고 시선을 맞췄다. 

그녀의 눈이 젖어 들고 있었다. 투명하게 차오른 눈물을 그가 안타깝게 바라봤다.



“내 앞에선 노력하지 않아도 돼.”



정혁의 그 말이 희민에게 커다란 위로가 됐다. 저도 모르게 도망치려 했던 두 발을 그가 멈추게 하고 있었다.

피하지 않고 똑바로 직시하게 만들고 있었다.



조용히 시선만 맞추고 있던 희민이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날 그 장소에 당신이 찾아와 주지 않았다면, 떨어진 차 키를 당신이 주워 주지 않았다면…… 난 아마 지금보다 훨씬 더 힘들었을 거예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한 희민이 입술 끝을 둥글게 끌어 올렸다.



“고마워요. 이건 진심이에요.”


“……그래.”



정혁이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술을 맞췄다. 

눈물이 맺힌 기다란 속눈썹에도 도장을 찍듯 가볍게 입술을 번갈아 누르자 희민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눈가의 물기를 손가락으로 털어 낸 희민은 그제야 차에 올라탔다.




뜻밖에도 도착한 곳은 공항이었다.



“여긴 왜…….”



식사를 하러 갈 거라고 생각했던 희민이 의아하게 물었다. 정혁은 그녀의 손을 가볍게 잡고 미소 지었다.



“잠시 갈 데가 있어.”


“지금요?”


“그래.”



잡은 손에 힘이 실리고 그가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수속을 마치고 전용기에 오른 뒤 오래 지나지 않아 부산에 도착했다.



“바다가 보고 싶었어요?”



배들이 정박해 있는 항구의 모습을 눈앞에 둔 희민이 웃었다. 

그가 갑자기 바다가 보고 싶어서 부산에 저를 데려왔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도 들었지만 의외감은 있었다.

하지만 바다를 눈앞에 두니 기분은 상쾌했다. 날은 흐렸지만 흐린 대로 나름의 운치도 있었다.



정혁과 손을 잡고 나란히 서서 회색빛 하늘과 바다를 보고 있는데 그가 말했다.



“……내가 한국을 떠날 때 마지막으로 봤던 곳이야. 지금은 그때와는 많이 달라졌지만.”



희민이 멈칫해서 정혁을 바라봤다. 그는 먼 바다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때가 몇 살 때였는데요?”


“여덟 살 때였어.”


“이민이었어요? 그땐 당신 부모님도 살아 계셨을 때죠?”



처음 듣는 이야기에 희민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은 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스스로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정혁이었다. 

그런 그가 이런 곳에 와서 처음 듣는 과거의 이야기를 하니 궁금증으로 마음이 조급해졌다.



“…….”



정혁은 대답 없이 흐린 바다 위에 떠 있는 배들을 보고 있었다.



“정혁 씨?”



그의 표정이 평소보다 가라앉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 희민은 그제야 이상함을 느꼈다. 

그녀가 부르는 소리에 정혁의 단정한 미간이 좁혀들더니 낮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 이야기를 하러 여기까지 온 건데, 쉽지 않군.”



희민에게 시선을 내린 그가 찡그리듯 미소 지었다.



“…….”



복잡함이 담긴 그의 눈빛과 표정에 희민이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그가 어떤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걸까 궁금하면서도 쉽게 들을 이야기는 아닐 거라는 직감이 왔다. 

결코 가볍지 않을 이야기일 거라는 것도.



섣불리 뭐라 채근할 수도 없어 가만히 정혁을 보고 있는데 그가 말했다.



“하나 약속해 주겠어?”



다크 올리브처럼 보이는 그의 묘한 빛깔의 눈동자가 짙은 회색빛으로 가라앉았다.



“어떤 약속요?”



“다 듣고 난 다음에 날 동정하지 않을 것.”



동정?



희민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런 그녀의 눈을 그의 진지한 눈동자가 휘어 감았다.



“사랑이든 동정이든 해 달라고 했지만…… 난 이제 당신에게 동정은 받고 싶지 않아졌어.”



그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그저 날 사랑했으면 해.”


“…….”



진지하게 물든 눈동자에 포박된 채 희민이 가만히 서 있었다. 잠시 시선을 맞추고 있던 그녀가 마음을 정한 듯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약속할게요.”



정혁이 사랑이든 동정이든 해 달라고 했을 때 사랑보다 동정이 훨씬 어려워서 사랑을 택한 거였다. 

서정혁은 절대 그녀에게 동정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녀의 표정을 살핀 정혁이 깊은 숨을 들이켰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그의 눈이 깊이 침잠했다.



“나는…… 최한준의 대체품으로 태어났어.”



희민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최한준은 그녀도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최한준라면 세양의…….”


“최상구 회장의 아들이지.”



정혁이 낮게 깔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최한준은 나와 같은 희귀 체질이라 다른 사람에게서 수혈을 받을 수 없어. 아니, 나보다 더하지. 한번 출혈이 일어나면 멈추지 않으니 수술도 못 해. 그래서 어릴 때부터 작은 상처로도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으니까.”


“그 사람도 희귀 체질이라고요?”



최한준이 병약하다는 소문은 희민도 들은 적이 있었다.



최 회장의 하나뿐인 아들이라 어릴 때부터 세양의 후계자로 정해져 있었지만 대외적인 자리에도 거의 참석하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못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세양 측에서는 쉬쉬하는 일이지만 이미 회사 바깥에서도 알 만한 사람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희귀 체질이라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오래된 불치병이라 치료가 쉽지 않다는 것만 회사 내에 떠도는 소문들로 알았을 뿐이다.



“난 그런 최한준의 대체 혈액과, 대체 장기를 위해 최 회장이 여자를 사서 인공 수정 한 결과물이야.”


“…….”



수많은 소문들 중에 누군가가 최한준의 대체자로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어디서도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희민은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유전자 개발이 이루어지며 이대로 가면 상류층에서 사람을 대체 장기로 쓸 수 있다는 위험은 이미 오래전부터 비인륜성 문제로 제기됐었다. 

머지않아 미래에 그런 일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들이 과학계에서 끊임없이 나오고 있었기에 희민 자신도 흥미로움을 느끼고 논문을 찾아본 적이 있었다.

영화 속에나 나올 일들이 실제로 벌어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이상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과학자들의 그런 시도들까지도 인권에 대한 문제로 자칫하다간 큰 처벌을 받을 수 있는 나라에서 이런 비윤리적인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니?



‘게다가 정혁을 상대로 그런…….’



믿기지 않는 현실에 희민은 목 뒤가 뻣뻣해졌다. 

정혁이 누군가의 대체 혈액과 대체 장기 역할을 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사실은 차라리 거짓말이라 생각하고 싶을 정도로 충격이었다.



'이러면 안 돼.'



희민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 노력했다. 이런 쉽지 않은 이야기를 꺼내는 그를 생각하면 태연함을 유지해야 했다. 

최대한 표정에 드러내지 않으려 했지만 그녀의 동요는 정혁도 느낄 거였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녀를 내려다보며 정혁이 말했다.



“힘들겠지만 들어 줘. 이건 당신도 알아야 할 이야기니까.”



미소를 담고 있는 그의 눈에 얼핏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



***



첫 번째로 떼인 장기는 신장이었다. 

이미 혈액은 주기적으로 체취당하고 있었지만 여덟 살의 어린아이에게 신장 이식 수술은 위험 부담이 컸다. 

그래서 의사는 당연히 만류했지만 최 회장의 말을 끝까지 거부하진 못했다.



무리한 수술이었기 때문인지 수술이 끝난 뒤 마취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도 주변의 모든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모르니 한준이 위해서 혈액 많이 뽑아 놔. 이식 수술 뒤에 필요할 수도 있으니.”


“이 이상은 위험합니다.”



의사의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웅성거리는 와중에 실랑이가 이어지는 소리들도 전부 귀로 들려왔다.



“잔말 말고 내 말대로 해.”



최 회장이 위협적으로 을렀다.



“방금 수술을 끝내 혈액이 부족한 상황인데 여기서 더 뽑으면 쇼크가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럼 생명도 위험해질 수…….”


“됐으니까 더 뽑으란 소리 안 들려? 한준이 필요할 때 당장 혈액이 부족해지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다른 피는 쓰지도 못하는데!”



최 회장의 고함 소리와 함께 주변이 조용해졌다. 의사도, 간호사들도 어떤 말도 못 하고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곧 마취제가 더 흘러들어 와서 난 의식을 잃었다.



아마 이때 뇌 한쪽이 각성했던 것 같다. 무리하게 진행된 수술과 지나친 혈액 체취로 인해 뇌에 산소가 부족해졌는지 뇌가 일반인의 범주를 넘어서게 됐다. 결국 이 일로 훗날 세계의 자본이 움직이는 월 스트리트에서 회사를 세울 거액의 돈을 벌게 되었으니 차라리 잘된 일이었을까. 

하지만 그 당시엔 몰랐던 사실이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사위가 어두웠다.



여전히 마취가 덜 풀린 상태였지만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알고 몸에 달려 있는 주삿바늘들을 뽑았다. 

바늘이 뽑힌 자리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수술이 끝난 직후라 발을 땅에 디딜 때마다 붕대로 감싼 배에서 지독한 통증이 일었다.

비틀거리는 발에 힘을 주고 입 안 살을 짓씹으며 뛰었다.



'멈추면 잡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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