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야설

짐승 계약 #6장(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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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깬 희민은 침대에 혼자 있다는 걸 알았다. 눈을 깜빡거리며 주변을 둘러본 희민이 상체를 세웠다.



‘결국 정신을 잃다니.’



자신의 기억은 정혁의 두 번째 사정 직후까지였다.



커튼을 붙잡고 무너진 뒤로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정혁은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연달아 사정하고도 멈추지 않고 집요했다. 

소파와 러그가 깔린 바닥, 그리고 창가까지 밀려가서 커튼을 붙잡고 버틸 때까지 그는 지치지 않는 음욕의 신처럼 그녀의 안을 온통 헤집고 찔러 댔다.



끊어진 기억 직전을 떠올려 보던 희민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



머리칼을 쓸어 올리던 그녀가 문득 자신의 나신을 훑어봤다.



‘그 남자가 닦아 준 건가?’



분명 그와 자신의 체액으로 온통 엉망이 되어 있던 몸이었는데 완벽하게 깨끗해져 있었다.

그때 견고한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일어나셨습니까?”


“네.”



유리의 목소리에 희민이 얼른 대답하고는 시트로 벗은 몸을 가렸다. 

문을 열고 유리가 안으로 들어섰다. 

흐트러진 러그나 뜯어진 커튼을 봤으면서도 유리는 별다른 내색 없이 희민에게 말했다.



“식사는 지금 하시겠습니까?”


“네. 그런데…… 그 남자는 나간 건가요?”


“회장님은 외부 일정이 있으셔서 안 계십니다.”



유리의 담담한 목소리에 희민이 우선 안도했다. 처음 관계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왠지 지금 보면 조금 부끄러울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보다 더 느꼈기 때문에?’



희민이 속으로 생각하는데 유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침대에서 편하게 드실 수 있도록 준비해 오겠습니다.”


“아, 그 전에 샤워부터 하고 싶으니 준비는 천천히 해 주세요.”



희민이 말하자 유리가 돌아서다가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럼 지금 욕조에 따뜻한 물을 채워 두겠습니다.”


“……고마워요.”



유리가 몸을 돌려 욕실로 향했다. 그 뒤에 그녀가 문을 닫고 방을 나가는 동안 희민은 침대 위에 다시 누웠다.

우선 정혁에 대한 건 밀어 두고 해야 할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징조 없는 일은 없으니 그 무렵의 일들을 떠올려 보면 뭔가 힌트가 나오지 않을까?’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몇 달은 몰라도 1년 전의 일들까진 무리다. 

기억력이 좋다고 해도 그녀의 머리에 인공 지능 수준의 저장 장치가 있는 건 아니니까.

답답함을 느낀 희민이 살풋 인상을 썼다.



‘당시의 휴대폰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좋았을 텐데.’



수사 때 압수당한 휴대폰에는 분명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이 많을 거였다. 

연락처나 메시지들을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거였고. 당시 큰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어서 바쁜 나머지 휴대폰을 동기화시켜 두지 못한 게 이제 와 후회가 됐다.



‘아니야. 기억해 봐……. 뭔가 떠오를 만한 게 있을 거야.’



기억 속을 헤집던 희민은 당시 창립 기념일 행사가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아, 그래!



희민의 머리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큰 행사였기 때문에 그 부근의 기억이 더 선명했다. 

집중해서 떠올려 보면 더 많은 것들이 생각날 수 있을 거였다.



희민은 그날 자신이 입고 있던 평소보다 조금 더 과감한 스타일의 이브닝드레스와 하나로 묶고 있던 헤어스타일을 떠올렸다. 

이미 언론에도 심심찮게 등장하며 회사 내에서도 유명해진 뒤라 특별히 신경 쓴 의상이었다.



‘그때 만난 사람들과 나눈 대화들을 떠올려야 해. 뭐든 좋으니까.’



희민은 생각을 집중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날의 대화 중에 뭔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축하해. 한 차장. 승진이 이렇게 빨라서야 금방 부장 달겠어.’


‘우리 동기들 비교되게 너무 그렇게 실적 올리지 말았으면 좋겠어. 아, 물론 부러우니까 하는 소리야. 알지?’


‘한 차장님 요즘 소문 안 난 데가 없던데요. 다음엔 저희와도 함께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희민의 미간이 좁혀 들었다.

떠오르는 거라곤 다 평범한 대화들뿐……. 아니야. 더 기억해 봐. 뭔가 있을…….



‘사람은 늘 조심해야 돼요. 방심하다간 자기도 모르는 사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거든. 안 그래요, 한희민 씨?’




“!”



순간 머릿속을 지나간 목소리에 희민이 눈을 번쩍 떴다.



‘잠깐, 그건 누구였지?’



마치 그 뒤에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암시한 듯한 말을 한 사람이 그날 거기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익숙하지 않았다.

기억이 날 듯 말 듯 머릿속을 뱅뱅 배회하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떠올리려 집중해 봤지만 허사였다. 점점 더 이미지가 멀어졌다.



‘……틀렸어.’



결국 완전히 멀어져 버렸다. 분명한 건 자신이 잘 알던 사람은 아니라는 것.



생각을 멈춘 희민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욕실로 걸어가며 지금은 우선 더 떠올리는 건 그만하기로 했다. 

억지로 노력하면 더 생각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따스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를 것 같기도 했다.



그런 기대로 꽤 오래 욕조에 누워 있었지만 결국 허사였다.



‘그만하자.’



포기한 희민이 샤워를 마치고 가운을 입고 나오자 침대 옆에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그새 러그와 커튼이 싹 바뀌어 있었다.

그걸 본 희민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수건으로 머리칼을 털며 침대로 걸어갔다.



‘익숙해져야 돼. 이 모든 것에.’



지금은 좀 민망하고 낯선 게 사실이었지만 이 저택에서 지내는 동안엔 이런 일들에 익숙해져야 했다. 

그녀가 난감해할수록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는 유리도 불편할 것 같았다.

그냥 계약상의 업무라고 생각하면 훨씬 적응하기 쉬웠다. 그게 그녀가 살아온 방식이었으니까.



식사를 마친 희민은 테이블 앞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세양그룹 창립 기념행사로 검색하면서 찾아볼 수 있는 건 다 찾아봤지만 건질 만한 건 없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목소리의 주인에 대한 정보도, 그 외에 다른 것도 찾지 못하자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의자 깊숙이 묻었다.



“……피곤해.”



희민이 의자 위에서 무릎을 세우고 앉아 몸을 동글게 말았다. 

서정혁과의 섹스는 할 때마다 체력 소모가 너무 컸다. 잠은 충분히 잤는데도 이렇게 몸이 나른한 걸 보면.



‘아직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임신할 때까지 버틸 수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저절로 어젯밤에 했던 행위들이 떠올랐다. 

샤워를 하면서도 그 남자가 몸에 남긴 붉은 흔적들을 보니 적나라한 기억이 떠올라서 난처했었다. 

그 기억들이 다시 선명하게 떠오르자 희민은 깊이 숨을 들이켰다.



하아, 숨을 토해 낸 희민이 열감이 오르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생각만 해도 어지러워.’



그런데 이상한 지점이 있었다.



임신을 위한 섹스라면…… 그렇게 오랜 시간 자신의 몸을 탐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닌가?



끈질길 정도로 집요하게 반응을 이끌어 내며 그 모든 반응을 지켜보는 서정혁의 그 특이한 눈동자를 떠올리니 왠지 목구멍이 조여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남자의 그 독특한 눈은 행위가 길어질수록 마치 점점 더 농도가 짙어지는 것처럼 어두워진다. 

평소의 서늘한 눈과 비교돼서 관계 중에 시선이 마주치면 기분이 이상해지고 왠지 더 흥분되는 느낌이었다.



‘그만.’



고개를 흔든 희민이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로 걸어갔다.

우선 잠을 푹 자고 피곤함이 어느 정도 가시면 그때 다시 찾아보기로 하고 침대 위에 누워 눈을 감았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떠오르던 서정혁의 그 눈이 감은 시야 안에서 더 선명해져 버려, 희민은 알 수 없는 열기에 한참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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