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야설

(3섬야설) 인도에서 만난 남자 - 21부

작성자 정보

  • 밍키넷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넌 누구냐?"

"네?"

"너의 정체를 밝혀라."


그녀는 나를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고 내 시선은 버스 창가에 몰려들어 손을 흔들며 "아듀스"를 온몸으로 표현하며 희희낙락하는 일행들을 향해 있다.

버스는 떠나가고 일행들도 떠나간다.

나와 내 옆의 그녀는 떠나는 버스 속에서 손을 흔들던 일행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버스 후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연을 마신다.

제기랄.


***


새벽부터 분주하다. 케이는 이른 새벽부터 온 게스트하우스를 돌아다니며 일행들의 방을 두드려 잠을 깨운다.


"다른 형님들은요?"

"어? 어디 갔지? 어제 잘 때만 해도 있었는데?"


케이는 피식거리더니 아마 중국 애들 방에 있을 것 같다며 가서 좀 깨워달라는 말과 함께 다른 일행들의 방으로 간다.


"Hellow? hellow? 저 인홉니다. 형님 문 좀 여세요."


중국 애들의 방을 두드린다.

문이 열리고 재우의 부스스한 얼굴이 어둠 속에서 드러난다.

트렁크 팬티만 입고 있는 게 수상쩍다.


"넌 여기 왜 있냐?"

"그게. 근데 새벽부터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이냐니? 어제저녁에 케이가 여섯 시 반 버스라고 여섯 시까지 로비로 모이라고 했잖아. 벌써 다섯 시 반이야. 정신이 있어 없어?"

"헉. 큰일 났다. 명구야. 아저씨. 아저씨 일어나세요. 늦었어요. 아 참 빨리요."


방안에는 형님들과 명구 그리고 중국 애들이 벌거벗다시피 한 채 널브러져 있다.

술병도 굴러다니고.

이게 뭐야. 나 잘 때 자기들끼리 밤새 잘 놀았구먼.

어쩐지 간밤에 내 눈치 보는 게 수상쩍더라니. 잠들기만 기다렸구먼.

사람들은 시계를 보고 화들짝 놀라더니 서둘러 몸을 일으켜 바이바이란 말만 남겨두고 눈을 껌뻑거리는 중국 애들을 뒤로한 채 황급히 방을 나선다.

형님들이 시계를 보고 양치질을 하고, 시계를 보고 머리를 감고 난리를 부릴 때 나는 짐을 싸면서 생각에 잠긴다. 


나..."따" 당한 건가?


"삐졌어? 그게 아니고 어젯밤에는 그냥 그래도 같이 놀고 그랬으니까 간다고 인사만 하려고 했는데 예비군바리 녀석들이 먼저와 술을 마시고 있더라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들이. 그렇게 같이 술을 마시고 그러다 보니.."


"그게.. 인호 너는 너무 곤히 자고 또 너는 걔들이랑 놀지도 않았으니까. 굳이 인사를 안 해도 되겠다 싶어서."


형님들은 배낭을 짊어지고 계단을 내려가면서 내게 변명을 한다.

지금 내 귀엔 그 어떤 말도 다 변명으로 들린다고. 하지만 형님들의 호들갑스러운 변명을 듣고 있자니 의도적이고 집요한 "따"는 아니었다는데 안도감이 든다.

원래 두 형님은 같이 잘 다니시니까.


하지만 이대로 마음을 풀어버리기에는 왠지 억울한 느낌을 든다.

더구나 좀 전에 본 어린 중국 처자들의 적나라하고 탱탱한 몸을 떠 올리고 나니 억울한 마음이 갑절로 늘어난다.

이럴 때는 마음을 푸는척하다가 여운을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 두고두고 이용해 먹으려면.


"알았어요. 중국 애들은 좋았나요?"

"걔들은 일본 애들이랑은 다르더라고. 일본 애들은 처음부터 적극적인데 중국 애들은 뭐랄까

처음에는 튕기더니 막상 일을 치르기 시작하니까 쫀득쫀득하게 엉겨오는 것이..."


"배신은 항상 쾌락과 마음의 부담을 동반하죠. 오늘은 이렇게 넘어가지만 두고 볼 겁니다.

형님들의 앞으로의 저에 대한 태도가 그 일부러 저를 따돌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겠죠."


"아 참. 정말 아니라니까~"


로비로 내려가니 케이는 신문을 보며 의자에 앉아있고 은혜는 로비의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이삼분쯤 지나자 인범 씨와 은영 씨가 내려오고 다시 그만큼의 시간이 지나자 나머지 일행들이 내려온다.


"십오 분 늦었습니다. 제가 둘째 날 아침에 주의하라고 부탁드렸는데 인 시간만큼의 손해는 여러분들 스스로가 감수해야 합니다.

그럼 출발하죠. 시간이 맞을까 모르겠습니다. 십오 분이라.."


케이는 싱글거리지만, 그 싱글거림이 왠지 질책하는 양 더 미안함을 느끼게 한다.



오토릭샤를 타고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니 버스 한대가 출발하고 있다.

설마 저 버슨가? 철재 형님이 뛰어나가 버스를 잡으려는 순간 케이가 한마디 툭 던진다.


"그 버스가 아닙니다."


또 다른 버스가 출발하려고 한다. 철재 형님이 또다시 그 버스를 잡으러 뛰어간다.


"그 버스도 아닙니다."


저 두 대 말고는 출발할 기미를 보이는 버스가 없다.

이미 버스는 출발해 버린 것인가? 허탈함이 우리 일행을 엄습한다.

새벽부터 허겁지겁 서둘렀는데. 케이는 사무실에 찾아가더니 하얀 뭐라고 인쇄된 종이 쪼가리를 들고나온다.

케이는 여전히 실실대고 웃는다. 버스를 놓쳤는데도 뭐가 그리 좋아? 꼬시냐?


"사실은 조뜨뿌르 행 버스는 일곱 시 출발입니다. 어쩐지 오늘 여러분들이 꾸물거릴 것 같아서 이벤트를 준비해 보았습니다.

화나신 건 아니시죠? 철재 형님. 주먹은 펴시고 대화로 해결하죠. 네?"


뜨뜻미지근한 바람이 우리 일행을 스쳐 지나가고 허겁지겁 버스를 잡던 철재 형님의 굳세고 듬직한 주먹이 꼬옥 쥐어진다.

형님의 마음이 내게도 전해온다.


"그 버스가 아닙니다." 

"그 버스도 아닙니다." 

"조뜨뿌르행 버스는 일곱 시 출발입니다."



"저기 케이.."


버스 소동이 끝나고 느긋하게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반항기 처자들이 케이에게 쭈뼛거리며 다가간다.

케이는 뭔가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시계를 본다.

잠시 생각하더니 전화 박스에 가서 어디엔가 전화를 건다.

다시 반항기 처자들에게 다가가 말을 하자 그녀들의 표정이 환해졌다가 다시 어두워진다.

케이가 나를 흘끔 돌아보더니 뭐라고 이야기한다.

그녀들의 수긍을 한 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어이! 그 이야기에 나도 끼인 것 같은데 나도 좀 알자고?


"그럼 부탁드립니다."


버스에 시동이 걸리자 일행들은 버스 트렁크에 짐을 싣고는 나와 반항기 처자 한 명에게 손을 흔들며 버스를 한 명씩 오른다.

왜?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설명도 해주지 않고 생뚱맞게 부탁드린다니?

버스는 떠나고 나와 내 옆의 그녀만 남았다.


"아저씨 죄송해요. 저 때문에.."

"넌 누구냐?"

"네?"

"너의 정체를 밝혀라."


그녀의 정체는 나도 대충은 안다. 그 대충이 그저 반항기 처자 중에 한 명이라는 것밖에는.


"김현정이에요."


이름이 현정이었군. 한번 볼까? 키는 좀 작은 것이 160은 좀 안되어 보이는군. 눈은 동그랗고 볼이 통통한 것이 귀엽군.


"제가 복대를 숙소에 두고 왔어요.

케이씨가 숙소에서 복대를 가져다주기로 했다고 여기서 기다리다가 인호 아저씨랑 다음 버스를 타고 조드뿌르로 오래요. 죄송해요. 저 때문에."


뭘 두고 왔다고? 복대? 복. 대. 여행자들의 생명선이다.

보통 여권이나 항공권 그리고 미화나 천 루피나 오백 루피의 큰돈들은 분실을 염려해 복대에 넣고, 복대는 바지 속에 차고 다닌다.

그래서인지 한국 여행자들을 보면 아랫배가 불룩한 것이 웃기기도 하다.

여하튼. 이 처녀 큰일 낼 친구네. 복대를 두고 다니다니.

나는 샤워할 때도 화장실에 가지고 들어가는데.

잠시 기다리니 숙소에서 본 어린 종업원이 현정이의 복대를 가지고 온다.


"Thank you. thank you very much."


현정의 안도하는 한숨이 내 목에 와 닿는다.

그녀는 복대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더니 지갑을 꺼내 백 루피를 어린 종업원에게 감사하다는 뜻으로 전한다.

어린 종업원은 그 돈을 받아서 들더니 좋아하며 인파 속으로 사라진다.


"무슨 버스 타지?"

"blah blah blah......"


조드푸르행은 한 시간 뒤에 로컬버스가 있고 두 시간 뒤에 에어컨 버스가 있단다.

정확한지는 알 수 없으나 나와 현정의 머리를 맞대며 사무실 직원의 괴상한 발음을 해석한 결과 그런 결론을 얻었다.


"로컬은 완행이고 에어컨은 직행이겠죠? 그냥 에어컨 버스 타요. 아니 도착 시간은 별 차이가 없으려나?

에어컨 버스는 차비가 굉장히 비싸네. 로컬을 탈까? 아저씨 어떻게 해요?"


나에게 그런 난해한 걸 묻지 말라고. 이 아가씨야. 나도 초행이라고. 뭐 사회적 경륜이 월등하겠지만. 흐흐흐.

현정아. 아저씨 믿지? 나에게 조잘대며 신뢰를 보내는 현정이를 보니 보호 본능이 일어나 침이 흐른다.

뭐 내가 신용을 빼면 시체지. 그런데 웬 침? 이거 내 몸의 반응이 요상하다.


***


결국 우리는 로컬 버스에 올랐다.

가격 차이도 제법 클뿐더러 두 시간이나 기다리기에는 좀 지루할 것 같다는.

버스를 타고 자리를 잡고 시간이 조금 흐르자 사람들이 점점 가득 찬다.

천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보니 천장에도 사람들이 올라탔나 보다.

염소 우는 소리도 들리고, 닭이 푸드덕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어린 시절 빨간 버스를 타고 오일장을 구경하러 가던 기억이 슬며시 떠올라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현정이가 모포를 꺼내 덮다가 나를 보고는 모포를 넓게 펴서 내 몸도 같이 덮어준다.


"새벽같이 일어났더니 피곤해요."


그러고는 내 어깨에 기대어 잠을 청한다.

현정이의 잠자는 모습이 매우 귀엽다.

통통한 볼이 채 젖살이 빠지지 않은 스물이라고 해도 좋아질 동안이라 그녀의 자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이마에 입술을 맞춘다.


"엉큼해요. 잠자는 처녀의 이마에다.

""너무 귀여워서 그러지. 마치 딸 같아. 내 딸 해라."

"킥킥. 네. 젊은 아빠."


킥킥대며 웃는 현정이의 이마에 뽀뽀를 하고 손을 어깨로 돌려 슬쩍 안아준다.

현정이는 슬며시 안겨 오더니 색색거리며 곧 잠이 든다.

모포를 끌어 올려 그녀의 어깨 위로 덮어준다.

나도 눈을 감고 그녀의 머리에 내 머리를 기대어 잠을 청한다.

곧 마음이 편해지고 잠이 올 듯 말듯 한 경계에서 한국에서 있었던 일들이 떠오른다.


제기랄.



전체 1,808/ 1 페이지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