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야설

(3섬야설) 인도에서 만난 남자 - 2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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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리. 자네 승진 대기자 명단에 있더군.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나름대로 순탄한 직장생활이었다. 며칠 전까지는.


"그래서 말인데 이과장 건 있잖아. 위에서는 조용히 처리해 주었으면 하던데.

이과장 측도 자네가 합의만 해 준다면 자네가 만족할 만큼의 대가를 지급하겠다는 용의가 있다고 했네.

자네도 알다시피 이런 사건이 언론이나 혹은 인터넷에 유포된다면 매해 천문학적인 투자를 통해 쌓아가고 있는 가족적인 우리 기업이미지에 치명적이네."


"부장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만 저는 이과장 그 쓰레기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개자식들. 분명히 나에게 제재가 떨어질 것이다. 상부의 의지는 확고하니까.


"아직 젊어서 감정이 성급하게 앞서는군. 자네가 모르는 듯해서 알려주네만 이과장은 사장님의 재종질이 된다네.

좀 더 생각해 보고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세. 현명하게 결론을 내릴 것이라 믿네!"


그날의 일과는 아무 생각 없이 흘러갔다. 생각은 없고 여러 색깔의 감정만이 존재했다.

분노. 증오. 두려움. 초라함 등등이 혼합된 색깔들이 나를 둘러쌌다.


"고소를 취하할 생각은 없습니다."


일주일쯤 뒤 나에게 지방으로 전출 발령이 내려왔다. 난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


이쁜이는 유리 같은 여자다. 아니. 나는 이쁜이를 볼 때마다 마치 얇은 유리그릇을 다루는 양 늘 조심스럽다.

이쁜이는 늘 털털하게 행동한다. 그 털털함에 반했지만, 혹여 비릿한 세상에 상처를 입을까 늘 걱정이 앞선다.


"괜찮아요. 봐요. 멀쩡하잖아요."


시내에서 운전을 하다 보면 언제나 긴장의 고삐를 늦추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라서 언제나 완벽하게 긴장을 유지할 수는 없다.

빨강 신호등에서 파랑 신호등으로 바뀌자 나는 기어를 중립에서 2단으로 변경한다.

기어를 바꾸고 액셀을 밟는데 뭔가 희끄무레한 것이 튀어나와 급정지를 하고

핸들에 머리를 숙이고 잠시 멍하니 있다 급히 차에서 내려 앞으로 가니 어떤 여자가 강아지를 안고 횡당보도 끝에 주저앉아 있었다


"저기. 여보세요. 괜찮아요?"


그녀는 멀쩡하다며 개를 안고 인도로 가서 강아지를 내려놓자 강아지는 꼬리를 흔들며 거리로 사라진다.

자기 개가 아닌가?

그녀는 자기 몸을 이곳저곳 만져대며 '픽'하고 웃는다.

그녀의 긴 생머리가 출렁거려 내 마음도 출렁거린다.

이쁘다.

싱글거리면서 나에게 오히려 미안하다며 인사를 하고 가는 그녀에게 나중에라도 몸에 이상이 있으면 연락하라고

억지로 명함을 맡기고 차에 올라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쫓고 있었다.


"빵빵~"


뒤차의 재촉에 차를 출발시킨다.


***


"네, 서인홉니다."


그날 야근을 하는데 전화벨이 울려 전화를 받으니 무슨 술집이란다. 누구 씨가 술에 취해 있으니 좀 데려가란다.

모르는 이름이지만 내 전화번호와 이름을 아는 걸 보니 나와 연관이 있는 사람이겠거니 하고 차를 술집 주인이 알려준 **대학으로 몰아간다.

대학가 앞은 술집이 늘어서서 특정 술집을 찾기엔 너무나 어렵다.


"**** 이란 술집 혹시 아세요?"


지나가는 대학생으로 깔끔한 인상의 여성에게 묻는다. 고개를 저으며 모른다고 한다.

이번엔 좀 지저분해 보이는 복학생 타입의 청년에게 묻는다.

그 청년이 자기도 같은 방향이라며 옆자리에 타고는 방향을 알려준다.

그 청년이 알려준 술집은 참으로 허름해서 요즘에도 대학가에 이런 술집이 있나 할 정도였다.

술집에 들어서니 짧은 커트 머리의 여자가 탁자에 엎드려 있고 주인아주머니는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다.


"제가 전화 받은 서인혼데요?"


그제야 아주머니는 환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데려가라고 한다.

계산서와 함께. 자세히 보니 낮에 내 차에 받힐뻔한 그 아가씨다. 머리를.. 잘랐구나.


"이분 가방이랑 소지품은요?"

"이것뿐이야. 그 처녀 술 취하면 가방이랑 다 어디다 던져두고 다녀. 낼 아침에 술 깨면 자기가 다 알아서 찾을 거야. 한 두 번이어야지.

참 청년은 처음 보는데 누구신가? 새 남자친구? 힘들겠어~"


한 두 번이 아니었나 보다. 아주머니가 저렇게 훤히 알고 계시니.

근데 새 남자친구라니? 남자친구가 있었구나.

왠지 조금 실망스럽다.

아주머니가 이것뿐이라며 준 핸드폰은 전원이 꺼져있고 투명 커버에 내 명함이 아무렇게나 꽂혀있다.


"학교 선뱁니다."


***


"아. 속 쓰려. 여기가 어디야?"


자고 있는데 낯선 음성이 들려 잠을 깬다.

눈을 뜨니 침대 위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바닥에 누워 있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란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술을 많이 마셔서. 근데 어떻게?"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해주고 밤새 충전시켜둔 그녀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핸드폰을 받아서 들고 가방을 찾으러 가야 한다며 방을 나선다.


"정말 죄송한데 차비 좀 빌려주세요. 이런 상황 언제 영화에서 본 거 같죠?"


문을 열고 나가려던 그녀가 다시 들어와서는 돈을 꿔 달랜다.

어이가 없다. 물에서 건져주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이다.

생글거리는 그녀의 얼굴에 지갑에서 만 원짜리 석 장을 꺼내어 준다.


"고맙습니다. 다음에 제가 술 한잔 살게요."


그러고는 나가 버린다.

그녀를 잡지 않은 이유는 벌써 그녀 핸드폰 번호를 적어 놓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

며칠 동안 그녀의 연락이 없고 나는 핸드폰만 만지작댄다.


"늦었네요?"


야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니 그녀가 집 앞에서 뭐가 잔뜩 들어있는 검은 봉지를 들고 벽에 기대어 서 있다.


****


"예쁜아 ~"


나는 그녀를 나직하게 부른다.

나는 그녀를 수십 번이나 만나면서도 아직 그녀의 이름도 모른다.

저기. 어이. 이봐요 등등의 호칭을 사용하다가 그녀를 이쁜이라고 부른다.


"풋, 그렇게 이쁜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너무도 듣기가 좋아요."


그녀는 말은 내게 하면서 왠지 먼 곳을 향해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녀를 만난 지 일 년이 다 되어 간다.

일 년 동안 영화도 보고 수다도 떨고 여행도 같이 갔다.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한 적이 없고 언제나 그녀가 전화해서 나를 불러낸다.

공식적으로 나는 아직 그녀의 전화번호도 모른다. 그녀가 뭘 하는 여자인지도.



"나랑 같이 살자"

"그걸 청혼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쁜이가 웃는다.


"뭐 그러죠."


이쁜이가 승낙하자 나는 하늘을 날 것만 같았다.

드디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 여자를 잡게 되는구나.

드디어 이 여자의 이름과 전화번호와 직업 그리고 사는 곳들을 물어볼 수 있게 되는구나.


이쁜이의 손을 잡고 모텔로 들어갔다.

처음 잡아보는 손이다. 손에 뼈가 없는 듯 말랑말랑하다.

일 년이나 만나고도 처음 손을 잡는다는 게 무척이나 한심스럽지만

그녀의 분위기는 왠지 내가 그녀를 만지면 깨져버릴 것만 같아서 그녀에게 다가서기가 어려웠다.


"남자는 오 초 만에 싸도 당당해야 한대요."


쪽팔려 하는 나에게 부드러운 그녀가 속삭이며 안겨 온다.


***


"지금이라도 청혼한 것 물려도 돼요."


내 품에 안긴 그녀가 소곤소곤 이야기한다.

드디어 그녀의 이름과 그녀의 직업 그녀의 과거. 그녀와 관련된 많은 것들을 내게 이야기해준다.

나는 이쁜이를 꽉 끌어안으며 말한다.


"죽어도 싫어. 넌 이제 내 것이야. 절대 도망 못가."


나는 그녀의 첫 남자가 아니다.

그녀는 스스로 과거에 만나던 남자가 몇 명 있었노라고 고백하고 구체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마치 오늘 밤이 기억 속에서 지워져 버릴 것만 같아서 꾹 참는다.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이쁜이에게 중독되어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


"죄송합니다."


이쁜이는 정중하고 웃으며 거절한다.

우리는 지금 ** 콘도로 부서 사람들과 가족 동반 사원 단합대회에 와있다.

등산도 하고 회식도 하고 즐거운 분위기 속에 부서 사람들과 노래방에 왔다.

노래는 흐르고 은근히 이쁜이에게 블루스를 신청하는 사람들이 많다.

상급자라 뭔 말도 못 하고 속만 끓이는데 이쁜이는 기특하게도 내 맘을 아는 양 정중하게 잘도 거절한다.

그래야 우리 이쁜 마누라지.


사람들은 작전을 바꾼 양 이쁜이에게 술을 계속 권한다.

이 사람들이 위험하게. 조의를 표합니다.

이쁜이는 사람들과 맥주캔을 부딪치며 지화자를 연발하고 급기야 부장님을 살살 꼬셔 양주까지 토해내게 만든다.


맥주잔에 맥주를 따른 후 양주가 담긴 양주잔을 살며시 맥주잔 속으로 떨어뜨린다.

냅킨을 맥주잔 위에 덮고 손바닥으로 밀봉하여 손목에 스냅을 주어 좌우로 흔들듯이 돌린다.

젖은 냅킨을 천장으로 던지자 냅킨이 천장에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지대로다.


이쁜이의 생글거림과 폭탄주 세례에 부서 사람들은 어느새 하나둘씩 침몰하여 간다.

이쁜이는 서서히 전과를 확산시키며 그녀의 털털함을 과시한다.


그녀는 대부분 사람을 녹다운 시키고 노래방 기계 앞에 선다.

멜로디는 흘러나오지 않는다.

그녀는 반주 없이 노래를 부른다.

김광석의 "그녀가 처음 울던 날" 이다.

이쁜이가 술 취하면 잘 부르는 노래다.

언젠가 물었다. 왜 노래방에 가면 사람들을 술을 먹이고 나서야 노래를 부르냐고?


"사람들의 정신건강을 위해서죠."


그녀는 스스로 음치라고 말하며 남들이 제정신일 때는 노래를 잘 부르지 않는다.

그녀는 뭔가 생각에 잠긴 듯 먼 곳을 응시하며 혼자 노래를 부른다. 왠지 마음이 답답해진다.


"담배사로 갔다 올게"


노래방에서 나와 시원한 공기를 마신다.

답답한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다.

담배를 사고 한 개비를 피고 난 후 노래방으로 들어가니 이쁜이가 보이지 않는다.


"인호 씨?"


이과장 사모님이다.

눈웃음과 언제나 입는 짧은 치마에 드러난 히프라인이 묘하게 색정적이어서 동료들이 뒤에서 수군대는 대상이기도 하다.


"이게 뭡니까?"


이야기할 것이 있다며 어두운 빈방으로 나를 끌고 간 이과장 부인이 나를 와락 껴안고는 목덜미를 핥아댄다.

당황스러워서 그녀를 밀치니 그녀가 몽롱하게 웃으며 이야기한다.


"뭐 서대리 부인도 지금쯤 즐기고 있을 텐데 어때요. 같이 즐기는 거지. 서대리도 내 엉덩이 보며 침 흘렸잖아요."


그녀의 말에 노래방의 온 빈방과 심지어는 불이 켜진 방까지 뒤지다 혹시 하는 생각이 들어 화장실로 향한다.


"야이. 개새끼야!"


나는 괴성을 지르며 이과장의 얼굴을 주먹으로 여러 번 갈겨댔다. 두드릴수록 속에 뭔가 더 쌓여 간다.

여자 화장실 한 칸에서 응응대는 소리가 들려 문을 발로 차서 여니 화들짝 놀란 이과장의 뻘건 술기운 오른 얼굴이 보이고

입속에 하얀 뭔가로 틀어막힌 이쁜이가 보인다.

이쁜이의 상의는 걷어 올려져 있고 아래쪽은 치마가 뜯어진 채 부끄러운 부분을 노출하고 있었다.

이과장이 쓰러지자 나는 웃옷을 벗어 이쁜이의 몸을 가려준다.

어느새 화장실은 사람들로 웅성거린다.

이 과장은 화장실 바닥에 드러누워 번들거리는 그의 것을 드러내 놓고 피를 흘린다.

이쁜이는 옷을 수습하더니 핸드폰 폴더를 열어 112를 누른다.


***


그곳에 있었던 많은 사람은 증언을 거부했다.

그 사람들은 나와 회사에서 함께 근무하는 회사 동료였다. 몇 년을 함께.

나의 불행은 애석하지만, 당신들도 지켜야 할 가정이 있겠지.

나와 이쁜이는 몇 번을 출두하여 진술해야 했다.


"궁금하지? 말해줄까? 미수라. 네놈 마누라 보지 맛이 아주 쫄깃하더라고. 하하하"


이과장은 초범이고 취중에 우발적이었다는 점. 미수로 그쳤다는 점 등을 이유로 관대한 처분을 받았다.

이과장은 판사들이 퇴장하고 허탈하게 남아있던 나에게 능글거렸다.


***


"회사에서 인사 담당 이사란 분께 전화가 왔었어요. 지방발령이 취소되었다고 다시 출근하라고요."


피시방에서 시간을 죽이고 오는데 이쁜이가 조용히 이야기한다.

난 지방발령과 사표를 던진 사실을 아직 이쁜이에게 말을 하지 않았었다.

다음날 회사에 찾아가 제지하는 비서를 밀치고 벌컥 열고 이사실을 들어가니 이사는 비서 유니폼을 입은 여자의 엉덩이를 쑤셔대고 있다.

속에서 뭔가가 올라온다.


"씨발 좆도. 이사라는 양반이 이러는데 회사가 잘 돌아갈 턱이 있나. 야 이 개새끼야. 이런 회사 나 안 다녀."


그렇게 내뱉고 돌아서는데 이사의 능글맞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네놈 마누라를 봐서 한번 봐주려고 했는데 뭐 싫으면 일 못하는 거지. 평안감사도 제가 싫으면 그만인데.

네놈 마누라의 보들보들한 젖가슴 감촉이 죽였는데 말이야, 꺼칠꺼칠한 음모도 풍성한 게 일품이고."


그 말을 듣고 뒤돌아보니 여전히 이사는 비서의 엉덩이를 쳐대고 있었고 보란 듯이 가슴을 쥐어짠다.

비서의 드러난 하얀 젖가슴과 엉덩이가 이쁜이와 겹치면서 떠오른다.


***


"나 회사 때려치웠어. 다시 돌아갈 생각 없어."

"그래요? 그러세요."


이쁜이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꺼낸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뭐가 궁금해요?"

"아니."


물어볼 것은 산더미 같다. 입을 열어 그녀에게 물으면 그녀는 얼마나 실망스러운 눈으로 나를 볼까 두렵다.

나는 그녀의 눈에 비칠 내 저질스럽고 저급스러운 모습에 실망한다.

왜 이쁜이를 믿지 못하나? 이쁜이가 그럴 리가 없는데.


"알고 있어요. 당신이 궁금해할 거라는 걸. 근데 별일 아니에요."


뭐가? 뭐가 별일이 아닌데? 이사란 놈이 한 쓰레기 같은 말이 내게는 온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구먼. 이과장이 한 말도 심상치 않고.


"남자들은 했나, 하지 않았나를 굉장히 궁금해하죠. 또는 느꼈나, 느끼지 않았나 까지요. 당신도 남자죠. 당신이 궁금한 게 그건가요?"


이쁜이는 삼단논법으로 나에게 물어온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다잡아 변명하기에는 내 속에 올라온 의문이 너무 크다.

그래. 나는 궁금하다. 언제나 궁금했다. 당신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당신과 이년이나 같이 살면서 난 한 번도 당신이란 사람의 참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나에게 실망할지도 몰라요, 그래도 괜찮아요?"


나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이쁜이의 눈을 마주 볼 자신이 없어 고개를 숙인다.

그녀에 눈에 실망이란 부호가 떠 오른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엄두도 나지 않는다.


"노래방에서는 술에 취해 정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무엇인가 내 속에 들어올 때야 정신이 들었어요. 정신이 드니 좁은 공간에서 당신이 아닌 남자가 나를 덮쳐 누르고 있었죠.

소리를 지르려니 입에 뭔가가 들어있어 소리가 나지 않았어요. 곧 당신이 왔고요. 당황스러운 기분밖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어요."


이과장의 능글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제 이사란 사람에게 전화가 왔었어요. 만나자고. 당신에 관해 할 말이 있다면서.

이사실로 오라는 걸 거절하고 당신 회사 근처 카페에서 만났어요.

조명이 좀 어두운.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어요.

당신이 사표를 던졌다고 이야기하더군요.

전 세상을 그렇게 아름답게 보지는 않아요. 저 때문이라는 감이 왔어요.

그 사람이 당신 이야기를 하면서 슬쩍 옆자리로 옮겨 오더니 당신의 사표를 아직 수리하지 않았으니 잘 달래서 출근하게 하라고 하더군요.

그 말을 하면서 손이 상의로 들어와 내 가슴을 만졌어요.

불쾌한 기분이 들어 화를 내고 손을 밀어내 몇 번 거절하니 당신이 원래 지방으로 발령이 났는데 자신이 그걸 돌렸다고.

남자 앞길을 막을 거냐고 말을 하더라구요. 당황스러웠죠.

그 사람의 손이 노골적으로 치마를 파고들었어요. 정신이 없었어요. 당신 생각에."


이쁜이는 숨을 가다듬고 나는 침을 꼴깍 삼킨다.


"나란 여자와 관계되어 좋은 꼴 보는 남자가 없었거든요. 당신에게 무척이나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그 사람의 손가락이 내 속으로 들어오자 더는 참을 수가 없었어요. 저항은 하고 있었지만 그 사람은 막무가내였거든요.

그 사람이 무척 징그러웠어요. 그 사람의 손을 빼고 일어나니 그 사람이 호텔로 가자고 하더라구요.

앞으로 당신의 뒤는 자기가 봐준다고. 여자는 내조를 잘해야 한다고 능글거리면서요. 제가 어떻게 했을 것 같아요?"


"몰라"


이쁜이의 나직한 목소리가 내 귀청을 날카롭게 후벼온다. 난 몰라. 아무것도 몰라. 아무 생각도 못 하겠어.


"난 손해 보는 성격은 아니죠. 당신도 알다시피. 그랬어요. 당신이 회사에 돌아가면 생각해 보겠다고.

그렇지만 당신은 자존심이 강해서 아마도 돌아가지는 않을 거라고. 그 사람이 말하더군요. 남자에게 직장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없다고.

아마도 회사로 돌아올 거라고. 돌아오면 나를 안겠다고 하더라구요. 뭐 그렇게 내기 같은 거래를 했어요."


"야이. 씨발년아."


처음으로 이쁜이에게 욕을 했다. 하지만 이쁜이에게 욕을 하는 건지 무기력한 나에게 욕을 하는 건지 자신도 알 수 없다.


"당신을 망치는 것 같아서 죄스러웠어요. 나랑 관계된 남자들은 모두 그래요. 언제나 망가지죠. 미안해요. 이혼할래요?

당신이 이혼하자고 하면 그럴게요. 뭐 위자료는 필요 없어요."


이쁜이는 싱긋 웃으며 담담하게 이야길 한다.


"싫어. 죽어도 이혼 못해."


나는 윽박지르듯 대답한다.


"나와 헤어지고 싶으면 내가 죽는 거 보고 떠나."


그날 밤 나는 이쁜이의 가슴에 떨어지는 내 눈물을 핥았다. 이쁜이는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난 나 아닌 다른 남자가 네 몸 만지는 것 참을 수 없어. 그 누구도. 넌 내 것이야. 머리부터 발끝까지."

"네."


그렇게 나는 이쁜이의 몸 위 곳곳에 눈물을 흘리고 그 눈물을 혀로 닦았다.


***


"제 친정 삼촌 칠순 잔치래요. 이번 일요일에."

"백수가 뭔 볼일 있다고 경사스러운 곳에 가나?"

"그래도 얼굴은 보여야죠."

"일없어."


한 달을 집에서 빈둥거렸다. 아직 많지 않은 나이라고 생각했지만, 일자리는 쉽게 구할 수 없었다.

그렇게 집에서 빈둥대는 내가 한심하고 아내에게도 면목이 없었다.

그런 내가 무슨 면목으로 처삼촌의 칠순 잔치에 가서 그녀의 친척들을 대한단 말인가?


"저기 온라인 게임회사 하시는 제 사촌형부 알죠?"


이쁜이는 처삼촌의 잔치에서 돌아오더니 내 눈치를 보며 이야기를 꺼낸다.

나는 또 친정에서 비교라도 당했나 싶어 속상하고 무안한 마음을 감추며 퉁명스레 말을 한다.


"알지. 왜?"

"그곳에서 일하던 팀장 중에 한 명이 곧 독립해서 나간대요. 당신만 괜찮으면 면접을 한번 보자는데.

당신은 장사한다고 하지만 그 방면으로는 경험도 없고, 알아보기도 쉽지 않은 것 같아서."


화가 나려 한다. 나 자신에게.

친정에 가서 남들은 서로 신랑 자랑에 바쁠 터에 남편 직장을 알아보려 어깨가 움츠러들었을 이쁜이를 생각하니 그렇게 마음이 아플 수가 없다.

자존심 강한 이쁜이가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

거기서 일하든 안 하든 이쁜이의 마음이나 풀어주어야겠다.


"면접 한번 보지."


사촌 동서는 인상이 좋았다.

호남형의 얼굴에 그 서글서글함이란. 가까운 친척끼리 편하게 와서 일하라며 룸살롱으로 데려간다.

마누라들에게는 비밀이라며.


그 집안 여자들이 바가지가 심한데 사촌처형은 그중 제일이라며 엄살을 떤다.

출근은 두 달 후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두 달 동안 이쁜이랑 뭘 하며 놀까?

다음날 이쁜이와 오랜만에 외식하면서 어제 면접 본 이야기를 했다.

이쁜이는 역시 남자는 일을 해야 당당해 보인다면서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이쁜이가 기분전환이나 하고 오라며 배낭 가방을 싸준다. 여행사에는 신청해 두었다면서.

이 나이에 무슨 배낭여행이냐 했더니 뭐 어떠냐면서 서운한 표정을 짓는다.

이쁜이는 최근에 새로 맡은 프로젝트로 바쁘다.

함께 가면 좋을 거라는 나의 말에 이쁜이는 웃으며 다음에 더 좋은 데를 같이 가자고 한다.


공항까지 차를 태워준 이쁜이는 나에게 입맞춤을 하며 사랑한다고 속삭인다.

이쁜이가 사랑한다고 말해준 것은 처음이다.

이쁜이의 흐뭇한 미소가 배낭 가방을 둘러멘 내 등으로 전해져 온다.


***


"아저씨 ?"


눈을 뜬다. 불편한 좌석에 앉아 한참을 잤더니 허리와 엉덩이가 뻐근하다. 현정이가 여전히 나에게 안긴 채 피식거린다.


"아빠라고 불러야지."


내가 잠이 들깬 목소리로 농담을 하자 현정이는 킥킥댄다.


"무슨 잠꼬대를 그렇게 실감 나게 해요?"

"내가?"

"예. 자면서 제기랄. 예쁜아. 제기랄. 예쁜아. 킥킥. 이쁜이가 누구예요?"

"너희 엄마."

"아~"


귀엽게 소리 내는 현정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주위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다. 다 왔나?


"점심시간이래요,"

"완행버스에 무슨 점심시간이 있어?"

"여기는 있나 보죠. 계란 드실래요?"


버스는 다시 출발하고 염소 소리와 닭 소리는 여전하다.

드디어 목적지인가 보다. 조뜨뿌르 어쩌고 하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릭샤를 잡아타고 트레인 스테이션을 외친다.



케이가 바닥에 신문지를 넓게 펴고 깔고 앉아 왼손엔 짜이잔을 들고 오른손에는 담배를 든 채 신문을 보고 있다.

이상하다? 저 녀석이 왜 이렇게 반갑게 느껴지지?


"오느라 수고 많았어요."


케이가 싱글거린다.


제기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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