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야설

(3섬야설) 인도에서 만난 남자 - 6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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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델리역은 마치 6·25 때의 피난민들을 보는 듯한 광경이 이어졌다.


"역에서 사진은 찍지 마세요. 경찰이 시비 걸 수도 있거든요. 그리고 기차 내에서 흡연과 음주는 안 됩니다.

특히 아저씨 트리오 분들. 좌석은 sleeper 칸으로 예약이 되어 있습니다.

꼭 자물쇠를 채워 분실에 주의하시고요. 중요 품은 특히나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성분들 누군가에게 추행을 당하면 소리를 질러 저에게 알려 주세요. 제가 처리하죠. 뭐 성질나면 그 자리에서 때려도 됩니다.

여성분들만요. 남성분들이 주먹다짐하면 문제가 커질 수도 있거든요. 바라나시는 내일 아침 7시 도착 예정입니다."


저 녀석 케이는 남들보다 훨씬 큰 짐을 걸어가면서도 말하는데 거침이 없군. 젊어서 그러나? 쩝 부럽기 짝이 없다.

나도 나름대로 한 힘 하는데 이 백은 왜 이렇게 무거운 거야?


"잠깐만요. 좀 더 다정하게 붙어 서세요. 거기 아저씨 트리오 분들 좀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어필해 봐요."


낯익은 카메라다. 케이는 우리 이쁜이가 늘 명기라고 추켜세우던 니콘제 FM2를 들고 포즈를 요구하고 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일일이 이름을 불러가며 표정이라든지 서 있는 위치를 조정해 주고 있다. 실없는 놈.


칸으로 들어서자 케이가 좌석을 일일이 지정해 주고, 중간 침대를 펴는 법과 짐들이 자물쇠로 잘 채워졌는지를 확인하는 둥 수선을 피운다

역무원이 지나가자 냉큼 뒤를 따라가더니 뭐라 뭐라 이야기한다.

한참을 이야기하더니 한숨을 쉬고 주위를 살피더니 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내어 슬쩍 질러주고 싱긋 웃는다. 저게 뭐지?


"달걀 좀 드세요. 저. 여기 좀 끼어 앉아 있어도 되죠?"


세 명의 아저씨 트리오가 나란히 앉아 있는데 케이가 비집고 들어오면서 싱글거린다. 신기하게도 이 녀석은 언제나 싱글거린다. 가벼운 놈.


"왜? 자리 없어?"


철재 형이 묻자 케이는 한자리가 웨이팅이 걸렸다고 이야기한다.

웨이팅이 뭐냐는 반문에 지금은 자리가 없고 나중에 자리가 나면 처리해 주는 우리나라 입석 같은 거라고 한다.

뭐 돈 좀 찔러 줬으니 곧 해결되지 않겠느냐고 되묻고는 여전히 싱글벙글한다.

이 녀석은 우리나라에서 터부시되는 대가성 뇌물공여를 꺼리지도 않고 잘도 주절댄다.


"인도잖아요, 인도에선 인도의 룰을 따라야죠."


뭐 이런 놈이 다 있는가. 한국에서는 부패 척결 어쩌고저쩌고 난리가 나는데. 내가 저 나이 때에는 사회적 정의감으로 몸부림쳤건만.


"집에 전화는 자주 하세요?"


물론이다 매일 전화를 하고 우리 이쁜이 목소리를 듣는다.


"핸드폰으로 하지 말고 집 전화로 해보세요."

"왜?"

"그냥 그게 싸거든요."

"피 얼마나 차이가 난다고"


그때 비어 있던 앞 좌석에 세 명의 여자가 와서 앉는다.


"일본 애들인가 봐"

"어. 씨발 옷 열라 야하게 입었네. 케이는 저렇게 입지 말라고 하던데"

"내버려 둬. 어차피 재들 목적이 섹스 관광일 거 아냐?"


죽이 맞은 형님들이 쑥덕거린다.


"관심 있어요?"


케이가 슬쩍 묻는다.


"어? 조금"


형오 형님의 말에 케이가 씩 웃더니 일본 애들에게 말을 건다.

처음에 익숙한 곤니찌와로 시작하더니 자기들끼리 쑥덕거린다.

일본어와 영어를 썩어가면서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우리를 돌아보고는 우리의 긴장된 눈초리를 느끼고 또 한 번 씩 웃는다.


"저 녀석 일본어도 잘 하는군. 분명 여자 꼬시려고 배웠을 거야."


27살 두 명. 한 명은 28살. 사는 곳은 오사카고요 직장인이래요. 외국 여행은 처음이고. 뭐 얘들도 바라나시로 가고요.

일정이 맞으면 하루 정도는 같이 노는 게 싫진 않다고 하네요. 일정은 맞춰 드려야죠.

내일 자유시간을 줄 테니까 잠시 쉬다가 점심 먹고 얘네들 숙소 가서 만나서 같이 관광을 다니세요.

너무 노골적인 것은 좀 속 보이죠. 저녁은 시내에 *********에 가시면 인도 카레 먹을 만 해요. 머쉬룸이랑 토마토 커리 나쁘지 않아요. 

그리고 술은 제가 준비해 드리죠. 얘네들 숙소에서 술 먹고 놀다 보면 더 이상은 아저씨들 능력에 달려 있다고 봐야죠"


우리를 잠시 응시하다 다시 싱글거린다.


"매너가 아주 중요해요. 특히 잠자리 매너가요. 혹자는 일본 애들이라고 거기에 소형 태극기 꽂고 애국가 불렀다고 하는데 그러시지 말고요.

좀 잘해서 국위 선양하세요. 아. 그리고 술값은 바라나시가 금주 도시라 조금 비싸요. 그럼 지금부터 몸으로 부딪쳐 보세요"


그리고서는 일본 여자애들과 몇 마디를 나누다가 우리를 보고 윙크하며 사라진다. 도대체 저놈은 일본어는 어디에서 배웠을까?


"침대 위에서 배운 일본어도 쓸만하네요. 한번 배워보세요."


갑자기 되돌아와서 한마디 툭 던져 놓고 사라지는 케이의 뒷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인다.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니 어느새 형님들은 안되는 영어와 보디랭귀지로 서로 간의 친밀도를 높이기에 열중이다.

내 앞에 앉은 일본 애를 보니 그냥 얼굴이 참 하얗다고만 느껴진다.


"넌 뭐해? 관심 없어? 케이 불러서 물러줘? 예비 군바리 녀석들 침 흘리며 달려 올 텐데?"


그 말을 듣고 나 또한 언제 망설였냐는 듯 손짓, 발짓이 주가 되는 커뮤니케이션 행위에 동참했다.


*************************


시간이 늦어 주위가 조용해지자 우리도 손끝으로 느끼는 커뮤니케이션을 잠정적으로 중단하고 자기로 했다.

짬밥 순으로 상중하 중에 맨 아래 칸을 쓰게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서열 짓기. 줄 세우기를 참 좋아한다.

한참을 누웠다가 소변도 마렵고 또 바지 속 복대에 들어있는 것들이 걱정되어 화장실에 가려고 보니

아직 반항기 처자들과 예비 군바리들은 아직도 한창 재밌게 놀고 있다.


소리 없이 엄지손가락만을 이용한 게임. 침묵의 제로다.

이 게임. 은근히 서로의 손을 통해서 전류를 느끼게 해주는 나름대로 농밀한 게임이다.

잘못하면 피를 튀기는 게임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근데 분위기상 농밀한 쪽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눈으로 재빨리 은혜를 검색하자 혼자 맨 위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왠지 우울해 보인다.


"같이 놀지. 너 혼자 뭐하냐?"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라서 혼자 책이나 좀 읽으려고요."

"분위기?"

"케이가 게임을 하자고 주동해서 분위기가 저렇게 되었는데 언니들이랑 예비 군바리들이랑 죽이 잘 맞아서. 계속 끼어있기 미안하더라고요?"

"케이는 어쩌고?"

"분위기만 주동하고 저쪽으로 옮겨 갔어요."


은혜의 시선을 따라가니 아니나 다를까 케이가 웬 백인 여성 둘하고 시시덕거리고 있다. 예의 그 싱글벙글 과 함께.

씨발. 여자라면 국적 인종 불문이구먼.

은혜가 우울한 이유가 저것 때문이었나? 그래 마음 푸는 데는 뒷담화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지.


"바람둥이 자식!"


슬쩍 반응을 떠보기 위해 한마디를 내뱉었다.


"케이가 왜 바람둥이예요?"


은혜가 반문한다. 왠지 케이 역성을 드는 분위기인걸? 여기서 꿀릴 수는 없다. 나도 서른 네 해를 살면서 산전수전 다 겪은 몸이라고.


"아무 여자한테나 껄떡거리는 게 바람둥이 아니냐?"

"흠. 일반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지만요, 실제로 바람이란 파트너 이외의 사람을 만나. 아저씨 표현대로 껄떡대는 것 아닌가요? 

그렇게 보면 케이는 파트너가 없는데 바람이라고 표현하기는 좀 그렇죠.  오히려 아저씨들이 바람둥이 아닌가요? 부인들도 있으면서?"


허걱. 이 처자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남들이 보면 오해하겠네. 혹시.


"봤냐?"


어색함을 감추고 능글맞은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네. 아주 난리이던데요? 케이가 달걀만 주고 소금을 안 주고 왔다길래 분위기도 그렇고 해서 소금도 가져다줄 겸 아저씨들이랑 수다나 떨려고 왔는데"


스고이, 스고이


"난리이던데요? 뭐가 그렇게 대단해요. 그녀들의 뽀얀 살결 아님. 부드럽고 탱탱한 가슴?"

"이 애가 무슨 소리를 한다느냐? 그 애들이 네팔에서 왔다길래 여행 사진 좀 구경하느라. 그리고 형님들이 주로."

"남 탓하지 말아요. 인호 아저씨도 사진 구경하면서 슬쩍 가슴 더듬느라 정신이 없던걸요? 사람이 와서 기다리는 것도 모르고.

엉큼한 중년 아저씨들 같으니라고. 케이는 파트너 두고 딴짓은 안 한다고요."


인정. 완전히 K.O로 졌음을 인정. 이 녀석은 너무나 솔직하고 직설적인 것 같다.

흔히 사회 물을 조금 먹었다 싶으면 상대방에게 어느 정도 맞춰서 완곡 적으로 이야기하기 마련인데 이 녀석은 그런 배려가 없다.

거기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니. 미안하우. 이쁜이 마누라.


"너 몇 살이냐?"


원래 나이가 어리다 싶은 사람에게 위축이 되면 으레 사람들은 그의 나이를 물어본다.

유치하게. 어린 너와 나이 든 나의 사회적 경륜을 재인식시켜 주는 장치이다.

나도 어느새 그런 유치한 전철을 답습하고 있다. 빌어먹을.

나도 진정 아저씨가 되어 가나?


"열아홉 살이요. 생일이 빠르고요. 일학년 마치고 휴학했어요."

"열아홉 살? 더 성숙해 보이는데?"


깜짝 놀랐다. 스물네다섯 정도로 봤는데. 그러고 보니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나이 들어 보인다고 내뱉으려다 슬쩍 말을 고친다.


"제가 키가 커서 원래 나이보다 나이 들어 보이나 봐요."


그러고 보니. 나는 슬쩍 은혜의 몸을 훑어본다. 그러고 보니 170은 될 듯하다. 게다가 꽤 글래머이기 까지도.

헉. 내 눈이 은혜의 가슴을 응시하고 있자 은혜의 뾰족한 다그침이 들린다.


"어딜 보는 거예요? 변태 중년 같으니라고."


내 잘못이니 할 말은 없다. 그런데 변태라니. 사나이 서인호 서른넷 인생에 처음 들어보는 소리다.

언제나 점잖니, 혹은 좋은 사람이니 하는 소리를 들었어도 변태라니. 억울한 마음에 최후의 역공을 하기로 했다.


"은혜 너 케이 좋아하지?"


실수다. 이게 뭔 소리야. 이성을 잃고 못 할 소릴 했구먼. 이런 참하고 귀여운 아가씨를 어디다 가져다 붙이는 거야?


"미.."

"예. 조금. 그런 것 같아요."


가슴이 철렁했다. 실수를 사과하려는 순간 은혜가 케이를 좋아한다고 부끄럽게 속삭였다.

은혜의 수줍어하는 모습은 처음이다.


갑자기 내 가슴이 아련하게 졸아드는 것 같다.

맥박도 빨라지고. 고혈압인가? 무안해진 내가 안색을 숨기려고 주위를 향해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아직 백인 여성들과 이야기를 하던 케이와 눈이 마주쳤다.

케이가 싱긋 웃는다. 마치 승리자의, 골을 넣고 난 스트라이커의 세레모니처럼 느껴졌다.

욕지기가 올라왔다. 그러나 나는 노련한 사회인이다.

대충 수습하고 화장실에 들러 일을 보고 손을 씻고 있는데 케이가 다가온다.


"변태. 일본어로는 헨타이. 중국어로는 변따이라고 하지요."


싱글거리고는 손을 씻는다.


"이..."


자존심이 상한 내가 뭔가 내뱉으려는 순간


"인호 씨. 은혜 좋아하죠?"

"........"


갑작스레 내게 물어온다.

여전히 싱글거리는 얼굴로. 크로스 카운터를 맞은 복서처럼 세상이 빙글거리고 나는 멈춰있다.

케이는 뭘 알았다는 건지 고개만 몇 번 끄덕이고는 다시 싱글거리면 객칸으로 돌아간다.


"후......"


나는 한참 후에야 긴 숨을 내쉬고 물을 틀어 세수를 한다. 내가 은혜를? 내가?


"케이 개새끼?"


다시 케이를 대상으로 한 이유 모를 분노와 격정, 두려움이 치밀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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