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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섬야설) 인도에서 만난 남자 - 7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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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이 짜이 짜이 짜이 짜이........"


짜이 짜이 거리는 소리가 짜증스럽게 들려와 새벽 선잠을 깨운다.

도대체 짜이가 뭔데? 어쩌라고?

아침이라고 일어나니 배가 아프다. 

휴지를 찾다 짐을 쌀 때 백 깊숙이 넣어둔 게 기억이 나서 다른 사람에게 빌리려니 다들 곤하게 자고 있어 깨우기가 미안하다.


"여기 휴지요."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케이가 휴지 두루마리를 들고 서 있다.

여전히 싱글거리는 표정에 어이가 없어졌다. 난 어젯밤 고민하느라 밤새워 뒤척였는데.


"어떻게?"

"어떻게 알았냐고요? 간단하죠. 이른 아침. 안절부절못하는 태도. 불안한 표정. 뻔하죠"


케이의 말에 힘이 빠져 더욱 화장실이 다급해졌다.

생리현상은 내 고민과 상관없이 정직하다. 뒤처리를 주의 깊게 하고 있는데 기차가 멈추어 선다.

벌써 바라나시에 도착한 것인가 싶어 재빨리 객칸으로 돌아가니 아직 다들 자고 있다.

케이를 찾으려 둘러보니 창문 밖으로 은혜와 벤치에 앉아 있는 케이의 모습이 보인다.


"짜이 드실래요?"

"?"


케이는 내 대답과 상관없이 짜이 장수를 불러 짜이를 주문한다.

엉겁결에 짜이 잔을 받아서 든 나는 의문스러운 얼굴로 케이를 바라보았다.


"뭐 2루피밖에 안 하는 데 부담 느끼시진 마세요"


옆에서 은혜가 말을 돕는다.

둘 사이는 어느새 더욱 가까워 보인다.


"새벽에 기차에서 내려. 시골 역에서 마시는 짜이와 담배가 나름대로 흥취 있죠."


케이는 벤치에 앉자 짜이를 한 모금 마시더니 눈을 감고 담배를 태우기 시작한다.

순간 그런 케이가 굉장히 염세적으로 느껴지고 나에게도 전염이 되어오고 있는 걸 느꼈다.

은혜마저 담배를 태우기 시작하자 나도 흡연 욕이 갑자기 올라왔다.

주머니를 뒤지니 담배가 없었다. 기차 칸에 두고 온 것 같다.


"저기. 담배 한대만."

"오루피요."


언젠가 들었음직한 가격이 그의 입에서 흘어나왔다.


"나중에."


케이에게 얻은 담배를 피워물고 짜이라는 차를 음미해본다.

부드럽고 달짝지근한 게 새로운 맛이다.


"괜찮군."


눈을 감고 시골의 새벽공기와 부드러운 짜이의 감촉과 황홀한 니코틴을 느끼고 있는데 옆에서 일어서 걸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기차 출발해요."

".........."


케이의 여전히 쾌활한 목소리다. 새벽에 들으니 그 저음이 더욱 감미롭군.

담배 짜이 새벽공기와 더불어 케이의 목소리의 여운까지 즐기려는데 기차의 경적소리가 들린다.


엥?

눈을 뜨니 기차가 서서히 움직이고 있다.

다급히 서둘러 기차에 뛰어 올라가니 은혜가 `픽`하고 웃으며 핀잔을 준다.


"홀로 카타르시스에 빠져 계셨어요? 기차 출발한다는 데도 넋 놓고."

"뭐 잠시 졸았나 보지."


내가 남자의 목소리를 감미롭게 즐기고 있었다는 것은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

분명 저음의 듣기 좋은 목소리이긴 하지만.


*********************


일곱 시가 다가오자 케이는 사람들을 깨워 정리시키고 짜이를 한 잔씩 대접했다.

부산한 가운데서도 내 눈은 은혜를 쫓고 있는 걸 스스로 알고 있었다.


"뭐 읽냐?"


은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서는


"아! 아저씨. 이거는 류시화의 "하늘호수로 떠난 여행"이요"


물론 들어본 이름에 들어본 책 이름이다. 그러나 읽어본 적은 없다. 내가 알고 있는 이름이니 꽤 유명한 책인가 보다.

그러고 보니 독서를 해본 지도 꽤 오래되었군,

요 몇 년간은 서류나 뒤적거리고, 문화생활이라곤 인터넷으로 뉴스를 검색하거나 영화를 내려받아 보는 일이 고작이었던 것 같다.

뭐 가끔 우리 이쁜이와 비디오도 빌려 보지만.


"이름은 들어 봤다."

"피~ 요즘 인도나 네팔 여행하러 오는 사람들은 거의 이 책 읽고 와요."

"그런가? 나는 그냥 우리 마누라가 가라고 해서 가방만 하나 들고 왔지."


어색하다. 어제 케이와의 대화 이후에 은혜를 마주 대하는 게 아주 부자연스럽다.

그럼에도 내 눈은 계속 은혜를 쫓고 있다.


"일종의 암시죠."

"?"


케이가 불쑥 끼어들어 뜬금없이 한마디를 던진다.

이 빌어먹을 녀석이 한마디를 던질 때 마다 걱정이 앞선다. 이번엔 무엇으로 나를 흔들어 놓을까?


"내가 너의 이름을 불렀을 때 너는 내게로 와 나의 꽃이 되었다."

"? "


김춘수 님의 "꽃"이 왜 갑자기?

도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건지.


"생뚱맞아요."


은혜가 불만에 찬 목소리로 설명을 요구한다.


"여행지에서 친절한 사람에게 의지하고픈 마음이 생기죠. 그것이 호감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죠.

그런데 누가 묻습니다. 그를 좋아하느냐고. 그럴 때 자기 행동을 되짚어 보죠.

많은 사람이 이 경우 자신이 호감을 가지고 있는 걸 숨기지 못하죠.

그리고 그때부터 그 사람을 유심히 관찰하게 되죠.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그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생각하죠, 나는 저 사람을 좋아하는구나.

일종의 자기 암시죠. 뭐 여행지에서 흔히 걸리는 마법이기도 하고요. 심심하면 실험해 봐요.

재미가 쏠쏠하죠."


그렇게 말하고는 또다시 사라지는 케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픽`하고 웃고 만다.

그렇군, 내가 은혜를 계속 지켜봤던 건 암시 때문이었군.


마음이 편하다. 줄곧 아내만을 보고 지내온 내가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빠져드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안해 마누라.

그러고 보니 화가 나네. 저 빌어먹을 녀석이 나를 실험 도구로 가지고 놀았다는 거 아냐?

그렇게 화나 날 찰나 은혜의 실망스러운 얼굴이 보였다.


"그런 건가? 이건 좋아하는 게 아닌 건가?"


순간 은혜가 미치도록 처량해 보였다.

미안한 감정이 가슴속에서 퍼져나갔다. 케이가 나를 가지고 장난을 쳤다면

나도 은혜를 가지고 장난친 셈이 되었다. 비록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은혜의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뭔가 사죄를 해야 할 것만 같다.


"짜이 한잔 마실래?"


빌어먹을 케이 개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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