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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야설) 바닷가 여관방에서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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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이 인식되기 시작했다.

바닷가에서 우연히 만난 우진이라는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은 단순히 삼십 대 남자라는 것뿐이었다.

열아홉의 처녀와, 삼십 대의 남자가 한 방에서 잠을 잔다고 해서 반드시 섹스를 해야 된다는 법은 이 세상에 존 재하지 않기는 하지만…

그러나 우진이 가출한 아내를 찾으러 묵도란 이 섬에 왔다는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그가 이성으로 와닿기 시작했다.


우진은 피식 웃는 것으로 답을 했다.

현지라는 여자에게 자신의 아픈 과거를 말해 준 것이 후회가 됐다.

엄밀한 의미가 아니더라도 아내가 가출한 것은 자신과 아내와의 문제 일뿐이지 현지는 제삼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거짓말이죠?"


현지는 우진의 말이 진실인 줄 알면서도 다시 한번 물었다.

그건 난 이 남자에게 처녀성을 주고 싶다는 자의식에 대한 반문이기도 했다.


"많은 여자들은, 많은 이유를 들어서 가출을 해. 그리고 난 가출한 아내를 둔 많은 남자들 중의 하나일뿐이야."


우진은 얼굴 근육으로만 웃으며 현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매가 서늘했다.

긴 머리카락 안으로 선이 고운 콧날 하며 투명한 입술, 둥그스름한 턱이 창문에서 들어오는 달빛에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니에요. 여자들은 여간해서 가출을 안 해요…"


현지는 말꼬리를 흐리며 우진의 시선을 피했다.

이게 웬일일까.

우진 앞에서 발가벗겨진 몸으로 앉아 있는 자기 모습이 그려지기까지 했다.

아니라고 고개를 흔들고 싶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누운 자세로 맥주를 마셨다.

그러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여전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바다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갑자기 숨을 멈추었는지 들려오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지.

소라 껍데기 속에는 아름다운 세상이 숨어 있는 걸까?


아랍인을 연상케 하는 우진의 얼굴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알코올에 붉게 물든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왔다. 까칠하게 자란 수염이 자신의 얼굴에 닿으면 따가울 것 같았다.

날 안아 줘요.라고 다가서면 우진은 푸른 달빛이 쏟아져 내리는 자작나무 숲에서 늑대 울음소리를 내며 도망치고 말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만 두 자. 모든 것은 지나간 일이니…"


우진이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는 바닷가에서 만난 현지라는 열아홉의 여자에게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이야기한 것은 그놈의 바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 청잣빛 바다의 서늘한 유혹에 넘어가서 자신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는 현지에게 가출한 아내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분을 사랑하나요?"

"지금도?"

"네. 진한 커피 향처럼 그윽하게, 핫케이크처럼 뜨겁게 사랑하고 있나요?"


현지가 갈망하는 눈짓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이상했다.

불결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도 자꾸 우진에게 이끌리고 있는 자기를 발견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섹스를 할 수 없다는 의지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몸은 자꾸 우진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우진에게서 남자의 향기를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가출한 아내를 둔 우진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는 것도 아니었다.

그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기에는 그녀 자신도 하루하루의 삶이 황무지에 핀 수선화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 그까짓 처녀성.

아이스크림처럼 차가울 때 먹지 않으면 저절로 녹아 버리는 거야.

도대체 처녀성이라는 게 뭐야.

내 인생을 책임져 주는 것도 아니잖아.

처녀성을 간직하고 있다고 해서 백마를 탄 왕자가 다가오는 것도 아니잖아.

무엇보다 간직한다는 것은 부담스러워.

난 그냥 살아가기에도 벅차.

나는 이 남자를 좋아해야 돼. 아니 나는 오늘 이 남자가 좋아.

내일은 생각하지 말자.

어쩌면 나는 이날을 맞기 위해 발걸음을 터미널로 향했고 바다로 가는 버스를 탔는지도 몰라.

그래 그건 맞는 말이야.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어.

아내를 사랑하기 전에 난 늘 바빴거든.

그리고 내가 아내를 사랑하고 있는지 되돌아보려고 했을 때,

이미 아내의 자리는 비어 있었어."


현지가 갈등하고 있을 때 우진이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담배 연기가 푸른 달빛에 영혼의 빛으로 피어 올라가고 있는 게 보였다.

창문밖에는 별들이 엎드려 있었다.

크게 한숨이라도 내쉬면 그 많은 별들이 우수수 떨어져 버릴 것 같았다.


"부인과 섹스를 할 때도 사랑한다는 생각을 가져 본 적이 없나요?"

"섹스?"

"네."

"난 섹스를 하면서 아내를 사랑한다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

그냥 아내를 보면 섹스를 하고 싶었어. 그러면 좋았고…

다른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 일 거야.

만약 인간의 이성이 사랑하는 사람끼리만 섹스를 할 수 있도록 조정되어 있다면

이 세상의 모든 희망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우진은 열아홉의 이 발랑까진 아가씨가 꽤나 까다롭게 군다는 생각에 직설적으로 말해 버렸다.


"그럼 지금 저를 사랑해 줄 수 있나요?"


현지가 불쑥 말하고 나서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까지 규칙적으로 잔잔하게 들려오던 파도 소리가 갑자기 거친 해일처럼 밀려오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랑?


우진의 동공이 확대되고 있었다.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현지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껄껄 걸 웃어 젖혔다.

갑작스러운 우진의 웃음소리에 창유리를 뚫고 들어와 방안을 비추던 푸른 달빛이 박살 나고 있었다.

웃음 끝에 마른 눈물 한 방울이 배어 나왔다.

다시 파도가 밀려왔다.

파도가 무너지는 소리에 아리 한 아픔이 무너지고 있었다.


사랑이란 것은 나에게 어울리지가 않아.

난 그저 살아왔어.

열심히 살아왔고, 많은 날 들을 노력했어.

그러나 아내는 날 싫어했어.

인생은 낭만이 있어야 한다며 통장을 가지고 나갔지…하지만 난 아직까지 낭만이 뭔지 몰라.


우진은 옅은 어둠 속에서 재떨이를 끌어당겨서 담배를 눌러 껐다.

푸른 담배 연기가 주저앉으며 그 자리를 달빛이 채워 버렸다.

천천히 현지가 누워 있는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현지가 가까이 오려는 기척을 보이자 얼마 정도의 거리를 두고 누웠다.


"농담이… 지나쳐."


우진은 이불을 끌어당겨 벽 쪽을 향해 돌아누우며 눈을 감고 나서, 갈대가 속삭이는 것 같은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농담이 아니에요. 난 삼촌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삼촌?"

"그래요. 아저씨를 삼촌이라고 부르겠어요. 그냥 아저씨라고 부르긴 싫어요. 그럼 내가 천박해지거든요."

"날 삼촌이라고 부르는 것은 괜찮아. 그러나 그런 농담은 듣기가 거북해."

"난 지금 진실을 말하고 있는 거예요.

만약 내 가슴이 유리로 되어 있다면,

삼촌에게 굳이 내 말이 진실이라고 말하진 않을 거예요."


현지는 진지했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우진에게 처녀성을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처녀성을 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으로 변해 갔다.

마치 마음에 드는 물건을 처음에는 지나가는 생각으로 사고 싶다,라고 생각하다가

결국은 사지 않으면 안 될 숙명 속에 사로잡히는 그런 기분이었다.


"지금 제정신이야, 아니면 파도 소리 때문에 미쳐 버린 거야?"


우진은 현지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화가 났다.


"물론 제 이성은 무너지지 않았어요. 그리고 전 열아홉 살이라고요. 세상을 볼 줄 아는 성년이란 말이에요."

"넌 아직 어려."

"그만! 눈을 감으세요. 그리고 가만있어야 해요."


현지가 우진의 입을 손가락으로 막았다. 우진이 뿌리치려고 하자 얼른 가슴을 밀착시켰다.


"아무 말 하지 마세요. 그냥 숨만 쉬세요. 만약에 단 한 마디라도 한다면 난 오늘 밤바다로 뛰어들지도 몰라요."


현지가 주술을 외우듯 나직하게 속삭였다. 우진은 최면에라도 걸린 것처럼 스르르 팔을 내리고 눈을 감았다.

그렇다고 현지가 섹스를 하자는 말 때문은 아니었다.

오직, 그녀가 밤바다로 뛰어들겠다는 말 때문이었다.


밤바다!


그때 제주에서 일곱 시에 출발했으므로 제주항이 보이지 않을 때쯤에서 어둠이 내려앉았다. 

이윽고 제주가 한 점 붉은 점으로 사라지면서 시야에 펼쳐지는 것은 짙푸른 어둠뿐이었다. 

갑판으로 나갔다. 

출렁이는 파도가 뽀얀 속살을 내 보이며 뛰어내릴 것을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 아무도 보지 않으니 빨리 제 품에 안기세요. 어서요!


검은 장막을 펼쳐 놓은 것 같은 바다는 그렇게 유혹하고 있었다. 

그때 아내를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리려고 떠난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내와의 결혼 생활을 뒤돌아보면 아차 하는 순간보다 짧은 순간이었다.


우진이 외진 음지에서 자라난 보잘것없는 잡초였다면, 아내는 봄바람을 타고 날아온 홀씨에서 갑자기 성장해 버린 화려한 꽃이었다.

그 점이 우진을 좌절케 하고 분노하게 만들었다.


인간의 기억력이라는 것은 편리하고 유익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좋지 않은 것은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리려고 해도 불씨처럼 살아 있고, 좋은 점은 쉽게 잊힌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진도 마찬가지였다.

아내를 잊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기억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암담함이기도 했다.

잊어야 하는데 잊지 못하고, 세월이 가도 잊히지 않는다면 아내를 찾아야 하는데 찾을 길이 없었다.

그 암담함은 설탕 맛을 본 사람이 씀바귀 뿌리를 씹으며 살아야 하는 절망이기도 했다.


"밤에는 출입 금지라는 걸 모릅니까?"


우진은 뒤에서 들려온 승무원의 거친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밤바다의 다디단 유혹에 빠져들었을지도 몰랐다. 

당혹감을 감추고 선실로 들어갔다. 

2인용 선실의 상대편 침대에 누워있던 중년 남자가 입을 쩝쩝거리며 돌아눕는 게 보였다. 

비로소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좋아요. 그렇게 가만히 있어야 해요."


현지는 우진에게 주술사처럼 감정 없는 음성으로 속삭였다.

가슴에 손을 밀어 넣었다. 

탄탄한 근육질의 가슴에 까실한 감촉의 털이 나있었다. 

가슴이 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덩달아 현지의 가슴도 뛰기 시작했다.


"후…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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