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야설

광기를 길들이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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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밍키넷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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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파혼



“.”


눈을 뜨는 순간 윤재는 생각했다. 더러운 꿈을 꿨다고.


몸을 뒤척여 일어나 시계를 확인하니 아직 새벽 4시다.

아직 출근까지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


어젯밤 자기 전에 조금 열어 놓은 창문에서 빗소리가 들렸다.

늦장마가 시작된다고 일기예보에서 떠들더니 어젯밤 잠든 이후에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 틀림없다.

저 빗소리 때문에 예전의 꿈을 꾼 것일까.


9년 전의 꿈을 꿨다. 정수혁이 나오는 꿈이었다.


‘정수혁.’


그 이름을 떠올린 것은 오랜만이다.

아주 오래 그 이름을 잊고 살았다. 아니, 일부러라도 잊으려고 애쓰며 살아왔다.

절대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윤재는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들어갔다.

수전에 물을 틀어 놓자 맑은 물이 고였다.

거울에 비치는 제 모습을 쳐다보며 윤재가 9년 전을 마지막으로, 연락을 끊은 남자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정수혁.


딱 6개월 동안 가족이었던 남자다.

진짜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처럼, 적어도 남들이 보기에는 가족처럼 보였던 정수혁.


‘짜악-!’


아직도 그날 맞은 뺨이 얼얼한 기분이 든다.

윤재가 손을 들어 왼쪽 뺨을 만졌다.


그때, 그 일요일. 막 집에 돌아왔던 부모님에게 정수혁과 하고 있던 것을 들켰던 그 날, 새어머니가 뺨을 때렸다.


‘미친년!’


새어머니는 흥분해서 연거푸 뺨을 때렸고, 그 손목을 붙잡은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정수혁이었다.


‘그만하세요. 제가 억지로 하자고 한 거니까.’

‘수혁아!’

‘싫다는 애, 제가 억지로 한 건데 왜 얘를 때려요? 얘가 만만해서 그래요?’


진짜 기억하기도 싫은 날의 기억이다.

허둥지둥 2층으로 달아날 때 뒤에서 들려오던 새어머니의 고함과 수혁의 화난 목소리. 그리고 자신을 소리쳐 부르던 아버지의 목소리까지.

그때보다 더 최악이었던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정수혁은 그날 집을 나가 월요일 시험 시작 전에 교실에 모습을 나타냈다.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내내 정수혁이 신경이 쓰여서 그 반 근처를 기웃거리다가 수혁이 교실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겨우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상황은 상황이었지만 시험을 망칠 수는 없었다.

시험을 치는 사흘 내내 부모님과는 집에서 마주치지 않았다.

일부러 12시가 넘어서 집에 들어갔지만 부모님은 집에 계시지 않았다.

충격을 받은 와중에 두 분이 잠시 집을 떠나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런 내용에 대한 메모는 당연히 남기지 않았다.

화가 나서 집을 나간 것이니 평소에도 안 남기는 메모를 굳이 남길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사흘이 지났다.

물론 시험 기간 동안 정수혁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동안의 집은 마치 무덤처럼 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시험이 끝나던 날, 교무실로 불려 가서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부모님이 사고를 당하셨대. 돌아가셨다고 경찰이 전화를 해 왔어.’


담임선생님이 그렇게 말하는 것이 무척이나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병원에 가 봐야겠다. 혼자 가기 힘들면 내가 같이 가 줄까?’


같이 가 주겠다는 담임의 배려를 거절하고 혼자 병원으로 가는 내내 드는 생각은 정말일까? 하는 것이었다.

죽음이 충격적인 것보다는 이런 식으로 자유를 얻게 될 줄 몰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이없게, 이렇게 쉽게 자유를 얻게 되다니.

이럴 줄 알았다면 정수혁과 그런 거래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병원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계속 웃음만 나왔다. 기가 막혀서 웃는 웃음이었다.


두 분은 빗길에 미끄러진 차가 전봇대를 박으며 그 자리에서 즉사하셨고, 장례식은 정수혁과 윤재 자신이 상주가 되어 치러졌다.

얼굴도 잘 모르는 친척들이 장례식에 참석했고, 아버지의 직장 동료들, 그러니까 교수들과 교직원들 그리고 학생들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아버지를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윤재는 아버지의 어디가 좋은지 알지 못했다.

그저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로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 주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는 좋은 사람이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새어머니 쪽 친척들과 지인들도 장례식에 참석했지만 윤재는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렇게 장례식까지 끝내자 방학이 시작되었다.

방학이 시작되기 직전 윤재는 성적표를 받을 수 있었다.


전교 1등.


정수혁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문제를 틀린 것인지 아니면 부모님께 들켰던 그 상황 때문에 심적으로 흔들린 나머지 시험을 망친 것인지, 그 속사정을 아는 것은 정수혁 본인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장례식을 끝으로 수혁과는 더는 만나지 못했다.


‘불쌍한 것.’


윤재를 데리고 간 것은 아버지의 동생이자 윤재에게는 고모였던 사람이고, 수혁은 친아버지에게로 돌아갔다고 들었다.

그렇게 마지막에는 얼굴도 한 번 보지 못하고 헤어졌다.


헤어지면서 다행이라고 여겼던 것도 사실이다.

성적을 핑계로 거래했던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더는 가족이 아니라는 안도감, 그 맹수 같은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안도감.


방학이 지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갔을 때 수혁은 이미 전학 간 후였다.

친구들은 모두 수혁이 어디로 전학 갔는지 궁금해했지만, 윤재는 그것이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정수혁이라는 존재가 사라진 것이 그저 고마웠다.


가끔 창문 너머로 운동장에서 운동하는 아이들을 볼 때 정수혁의 그림자를 보곤 했다.

그러나 그것도 3학년으로 올라가며 끝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가 그렇게 입에 담던 좋은 대학에 수석 입학했다.

아버지가 남긴 유산이 있어 돈이 궁한 것은 아니었지만,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4년 동안 학교에 다녔다.


대학원으로 진학할까 하다가 대학에서 만난 동기와 연애를 시작하며 진로를 바꿨다.

같은 대학 같은 과의 동기였던 한기정이라는 친구와 3학년 때부터 연애를 시작했다.


기정이 군대에 다녀온 직후에 다시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대학의 남은 시간 동안 연애를 하다가 먼저 취업했다.

취업한 곳은 기정의 부친이 운영하는 회계법인이었다.


대학에서 경영학과, 그중에서 세무회계를 전공한 것을 살려 국내 5대 회계법인 안에 든다는 현진 회계법인에 입사했고, 기업 경영 컨설팅 부서에서 3년을 근무했다.

그리고 올해 졸업한 기정이 같은 부서에 입사했다.


아직도 기정과 연애 중이고, 여름 장마가 끝나는 8월이 되면 결혼할 것이다.

이제 결혼은 고작 한 달도 남지 않았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은 결혼하면 기정과 함께 살 집이다.

고모의 집에서 한시라도 빨리 나오고 싶어 했던 자신을 위해 기정이 미리 아파트를 구하는 것에 동의해 주었기 때문에 이 집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아파트는 윤재 자신이 절반 그리고 기정이 절반의 금액을 부담했다.


윤재는 꽤 많은 예금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가 물려준 유산을 거의 한 푼도 건드리지 않고 이곳저곳에 투자해 온 까닭에 유가증권을 꽤 가지고 있고, 보유하고 있던 현금으로 이번에 아파트를 구입했다.

모든 것이 순탄했다.


기정은 성격이 얌전하고 말이 없는 편이지만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는 편이다.

그런 편안한 성격이 윤재는 좋았다.


아버지처럼 그렇게 사람을 대놓고 무시하고 차갑게 외면하는 남자는 싫었다.

많은 것을 해 주지 않아도 자신에게 잘해 주고, 자신과 오래 시간을 보내 주는 남자면 충분했다.

그건 죽은 엄마가 바라던 것이기도 했다.


다정한 것. 그게 그렇게 힘든 것이었을까. 아버지는 왜 그렇게 엄마에게 냉담했을까.


성격 때문은 아니다. 새어머니에게는 그렇게 잘 대해 주었으니 말이다.

결국은 엄마가 싫었던 것뿐이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두 분의 결혼은 양가 집안이 정한 것이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했다.

등 떠밀리듯 한 결혼이 행복할 리가 없었고, 결국 파국으로 끝난 결혼의 폐해는 윤재 자신이 고스란히 감당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제 그 악몽도 끝이다.


“행복하자.”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며 윤재가 중얼거렸다.


기정과 결혼하면 이제 더는 과거를 돌아보지 말자. 행복할 일만 생각하고, 행복한 길만 걷자.

기정은 좋은 남자고 자신 역시 기정에게 좋은 여자가 되어 줄 수 있다.


씻고 나온 윤재는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은 8시에 약속이 있다. 출근이 조금 늦는다고 미리 양해를 구해 놓았다.

결혼을 얼마 앞두지 않은 상태라 부서에서도 이해해 주고 있다.


8시에 기정을 만나 드레스 숍에서 지난번에 맞춘 웨딩드레스의 가봉을 마치고 예물 반지만 확인한 다음 함께 출근하기로 했다.

힐끔 쳐다본 창문 너머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벌써 그쳤어야 할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것을 보며 윤재는 옷을 갈아입었다.

무척이나 습한 날씨였다.


*


약속이 갑자기 취소되었다. 불길한 일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미안. 오늘 같이 가지 못할 것 같아.]


기정이 보내온 문자는 그것이 전부였다.


급한 일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급한 일이 생겨 약속을 취소한 것이라면 다음에 가자는 내용이 붙어 있어야 했다.

그러나 문자는 ‘가지 못할 것 같아.’가 전부였다. 마치 다음이 없는 것처럼.


약속이 취소되었으니 회사에 출근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회사에 출근해서 책상을 정돈하고 하루 일정을 체크하고 있을 때 사무실로 들어오던 기정이 윤재를 보며 발을 멈췄다.

그 얼굴에 일순 떠오른 당황하는 기색을 윤재가 바로 알아차렸다.


윤재는 기정을 잘 알고 있다. 저 남자는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이다. 거짓말을 하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지금 기정의 표정이 딱 그랬다.

자신에게 뭔가 잘못한 것이 있어서 찔리는 그런 표정을 기정이 짓고 있었다.


*


“무슨 일인지 말해 주면 좋겠어.”


기정을 옥상으로 불러낸 윤재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기정은 윤재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한기정. 무슨 일이야?”


대체 무슨 일이기에 아침 약속도 취소하고 이런 식으로 자신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걸까.


“자꾸 이러면 나 화낼 거야.”

“미안, 미안해, 윤재야.”


그제야 기정이 윤재를 겁먹은 눈으로 쳐다봤다.


“뭐가 미안한데? 너 나 모르게 바람이라도 피웠어?”


바람피울 성격도 못 된다.


나중에 알았지만 기정은 1학년 때부터 윤재를 좋아했다고 했다.

군대에 다녀올 때까지 꼭꼭 마음에 품고 있다가 제대한 직후에 겨우 고백할 정도로 자신을 오래 짝사랑해 온 한기정이 바람피웠다?

다른 남자들은 그래도 한기정은 그러지 못하는 남자라는 걸 윤재는 안다.

그러면 뭐가 이렇게 미안한 것일까.


“그게 아니라.”

“말해. 속 시원하게.”


“우리 결혼.”

“결혼이 왜?”


“결혼 못 할 것 같아.”

“뭐?”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결혼을 못 해? 왜?


“결혼이 얼마나 남았다고 헛소리니? 결혼을 왜 못 해? 어른들이 좀 미루라고 하셔? 미루는 건 상관없지만 식장 예약도 변경해야 하고.”

“아니. 미루는 게 아니라 아예 결혼을 취소해야 할 것 같아.”

“지금, 파혼하자는 거니?”


윤재가 기가 막혀 기정을 노려봤다.


이건 파혼 통보다. 대체 왜?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파혼 통보를 받아야 하는 걸까?


이 결혼은 회사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

고모도 알고 있고 대학 친구, 선후배들에게도 전부 청첩장을 돌렸다.

그런데 인제 와서 취소?


“왜? 파혼할 때는 하더라도 이유는 좀 알자. 대체 왜 파혼을 하는 건데? 인제 와서 부모님이 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셔? 아니면 나보다 더 좋은 여자가 나타난 거야? 그런 거야, 한기정?”


“아니야. 그런 건 아니야, 윤재야. 나는 너 말고는.”

“그러면 왜!”


화가 난 나머지 윤재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직 모두가 출근하기 전이라서 다행이다. 상에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정말 흉한 꼴을 보여 줄 뻔했다. 물론 잠시 후면 파혼이라는 진짜 흉한 꼴을 보여 주겠지만.


“우리 회사, 최대 고객이 누군지 너도 알고 있지?”

“한경이잖아. 그런데 왜? 한경하고 우리 결혼하고 무슨 상관이라고.”


“한경에서 우리 회사와 거래를 끊겠다고 전해 왔어.”

“갑자기 왜? 그동안 거래 성실하게 잘 했잖아. 우리보다 더 완벽하게 회계 처리 해 주는 곳이 어디 있다고.”


한경은 국내 기업 서열 1위의 대기업이다. 그런 한경의 재무 회계 대리를 윤재가 다니고 있는 회계법인 현진에서 맡고 있다.

물론 다른 기업체들의 회계 업무도 대리하고 있지만 가장 큰 고객은 한경이다. 그리고 한경이 거래를 끊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다른 기업들도 손을 뗄 가능성이 높다.

한경이 손을 뗀 이유에 대해서 소문이 분분하게 돌 것이고, 부실한 회계법인으로 보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즉, 한경이 거래를 중단하는 것만으로도 회사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뜻이다.


“한경 비서실에서 회장님 직통 라인으로 연락이 왔어. 너하고 파혼하지 않으면 거래를 끊겠다고.”

“뭐?”


살다 살다 이런 미친 경우가 또 있을까.


윤재는 한경에 아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왜 한경에서 자신의 결혼을 두고 파혼을 하라 마라 하는 것일까.


“한경이 갑자기 미쳤대? 왜 생면부지 알지도 못하는 내 결혼을 걸고넘어지는 건데? 혹시 나 때문이 아니라 너 때문이니? 한경이 너 사위 삼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


자신이 아니라 기정이 이유라면 이해는 간다.


한경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한기정은 일단 현진의 창업주 손자이고, 현 사장의 아들에 지금 두각을 드러내는 인재이니 한경에서 한기정을 탐내서 이 결혼을 파혼시키려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 더 수긍이 간다.

자기가 뭐라고 한경에서 자기 때문에 한 회사의 사활을 걸어 가면서까지 파혼하라고 한단 말인가. 말이 안 된다.


“나 때문은 아니고, 더 깊은 속사정은 나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일단 이 결혼 없던 것으로 하자고 하시고, 그러니까 윤재야. 결혼 잠시만 미루자.”

“파혼이라며. 그런데 미루자는 건 뭐니?”


“일단 형식적으로 파혼하고, 2, 3년만 기다렸다가 결혼하자. 나는 그때까지 기다려도 괜찮으니까.”

“2, 3년 기다렸다가? 지금 장난하니?”


이건 갑작스러운 파혼보다 더 웃긴 이야기다.


파혼까지는 좋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해한다.

한경과 현진의 이해관계가 엮여 있고 자신이 왜 거기에 개입되었는지는 몰라도 파혼까지는 이해한다.

그런데 뭐? 형식적으로 파혼해 놓고 2, 3년 후에 결혼?


“만약 3년 지났는데 그때도 우리 결혼 못 하게 되면? 너희 아버지가 그때도 결혼 안 된다고 하시거나, 그때도 한경이나 다른 큰 거래처에서 파혼하라고 하면, 그때도 또다시 파혼하고 또 2년 기다리라고 할 거니?”


“윤재야, 나는.”


“나는 지금 내가 파혼해야 한다는 것도 웃기고 기분 나빠. 이건 내 결혼이야. 내 결혼인데 왜 남이 파혼해라 마라 하는지도 웃겨 죽겠는데, 내가 결혼하려고 했던 한기정이 그 이유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 더 기가 막혀. 적어도 남자라면 자기가 결혼하려는 여자와 왜 결혼을 못 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라도 알고 있어야 하지 않아? 바보처럼 아버지가 시키니까, 회사가 날아가게 생겼으니까 이유도 모르는 채로 덜덜 떨면서 꼬리 말고 무조건 파혼한다는 게 너무 우습지 않아? 넌 기분도 안 나빠? 넌 그게 참 엿같다는 생각도 안 드니?”


“윤재야, 내 사정 알잖아. 이 회사, 한경이 지분 빼면 그대로 무너지는 거. 나 때문에 회사를 망하게 할 수는 없는 내 입장도 이해 좀.”


“이해해. 충분히 이해해. 그럴 수 있어. 회사가 망하게 생겼는데. 여기 망하면 여기 직원들 다 같이 길거리에 나앉는 건데 난 사장님 결정 충분히 이해해.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하지만 넌 다르지. 넌 적어도 3년 후에 다시 결혼하자, 이 말은 하지 말았어야지. 지금 못 하는 결혼 그때 한다는 보장도 없는데 넌 앞으로 날 3년 더 묶어 둘 생각이니? 내가 너 때문에 3년을 그냥 기다려야 해? 수절하면서? 너 아니면 결혼할 남자가 없어서? 그러다가 3년 후에 못 하면 또 3년 기다리고, 또 3년 기다리고, 평생 기다려야 해? 내가 미쳤어?”


윤재가 화가 나는 이유는 이것이다.


이 파혼을 주도한 것이 한경이라면 기정이나 기정의 부친에게 화를 내야 할 이유는 없다. 한경에 화를 내면 된다.

그러나 지금 굳이 기정에게 화를 내는 이유는 결혼을 밀어붙일 자신도, 책임질 능력도 없으면서 3년이나 기다리라고 한 것 때문이다.


물론, 기다려 줄 수 있다. 그렇게까지 결혼에 환장한 건 아니다. 혼자서 3년? 10년도 더 살 수 있다.

하지만 의지할 수 없는 남자를 믿고 그렇게 기다려 주고 싶지는 않다.


한기정의 장점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하나의 장점이 사라졌으니 한기정과 굳이 결혼할 이유는 없다.


“아파트, 네 돈은 빼 줄게.”


윤재가 바로 냉정하게 계산했다.


전공이 전공이라 그런 것인지 계산은 항상 빠르다. 그리고 이런 순간에 감정적으로 냉정해질 수 있다는 것이 윤재의 성격이다.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해서 울고불고하지는 않는다. 아닌 것 같으면 바로 정리하는 편이다. 그게 윤재가 세상을 사는 법이다.


“계좌 문자로 보내 줘. 현금 가진 거 없으니까 아파트 내놓은 후에 나가면 네 몫은 네 계좌로 보내 줄게.”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는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혼자 살기에는 너무 넓다.

그걸 내놓고 다시 예전에 살던 작은 원룸을 알아봐야 할 것이다.


“이제 일하러 가야겠다.”

“윤재야.”


“왜? 또 무슨 할 말이 남았어?”

“아마 오늘 안으로…… 너 해고 통지 갈 거야.”


“뭐?”


아주 가지가지 한다. 파혼에 해고?


“해고 사유는 뭐니? 정당한 사유 없이 해고가 가능하다고 보니? 나 고소할 수 있어.”

“미안. 부탁할게. 해고 통지 가기 전에 네가 먼저 사표 내 주면 안 되겠니? 회사 차원의 퇴직금 말고 아버지가 네게 따로 위로금 챙겨 주신다고 하셨어.”


“위로금?“

“그래. 위로금.“

“돈 많아서 좋겠다, 한기정.”


할 말이 없다.


이건 무슨 완전체도 아니고, 어쩐지 오늘 새벽같이 눈이 떠지더라.

어쩐지 9년 동안 꾸지 않았던 정수혁이 꿈에 다 나오더라.


정수혁이 꿈에 나오기에 어디 가서 죽었나 싶었는데, 이런 기가 막힌 난장판이 제게 벌어지려고 그런 꿈을 꾼 것이다. 아주 똥 밟은 날이다.


“위로금 주려면 100억 정도 주시고, 그 정도 못 주실 거면 그냥 넣어 두시라고 해. 회사 살리는 데 보태셔야지.”


그렇게 말한 윤재는 기정을 두고 옥상에서 내려왔다.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더 말해 봤자 입이 아프고, 더 들어 봤자 귀가 더러워진다.


사무실로 돌아온 윤재는 책상을 정돈했다.

맡고 있던 일들의 서류를 정리하고, 서랍 안의 개인 물품들을 꺼내서 작은 쇼핑백에 넣고, 복사용지에 크게 ‘사직합니다’라고 써서 부장의 책상 위에 잘 보이게 올려 뒀다.

그러고는 미련 없이 사무실을 나왔다.

정말 아무런 미련도 없었다.


엘리베이터에 탈 때 막 출근하는 같은 부서 직원들이 인사를 해 오자 생긋 웃으며 답인사를 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구차하지 않는 것, 윤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게 전부였다.


“잘 먹고 잘 살아라.”


그 말이 회사 건물을 나오며 윤재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그렇게 서윤재는 스물일곱 살에 졸지에 백수가 되었다.


*


현진을 그만둘 때만 하더라도 재취업 걱정은 없었다.

3년이긴 하지만 현진에서의 경력이 있고, 대학 시절에 만들어 놓았던 스펙이 있었다.

일명 명문대 수석 입학에 4년 연속 A 플러스로 가득한 만점 성적표까지, 다른 회계법인에서 구미가 당길 조건은 다 갖췄다.


실제로 현진에 근무할 때도 몇 번이나 동종 업계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스카우트들이 몇 번이나 명함을 주며 좋은 조건을 제시했지만, 어차피 기정과 결혼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다른 회사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래서 현진에 사표를 내고 나오며 다른 회계법인에 재취업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정확하게 한 달 만에 산산조각 났다.


이력서를 넣은 모든 회사에서 거절당했고, 전에 명함을 건네주던 스카우트들도 연락을 회피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자신의 사방을 막아 버린 것처럼, 그렇게 고립되었다.


“한경인가?”


이 상황에서 윤재가 생각할 수 있는 단 한 곳은 한경 외에는 없었다.


한경 본사 건물에 가 본 적도 없고, 임원진을 만나 본 적도 없고, 거래처여도 한경 직원들과 직접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윤재는 현진을 그만둔 지 한 달이 된 지금 한경의 본사 건물 로비에 발을 들여놓았다.


‘위압감 하나는 죽여주네.’


한경 본사 건물은 한 개 동이 아니라 세 개 동의 건물로 나누어져 있었다.

각각 40층이 넘는 세 개의 빌딩이 모여 하나의 본사 건물을 이루는 것을 보면 한경이라는 이 기업이 얼마나 대단한 공룡인지 충분히 알 수 있다.


무작정 찾아왔지만 누굴 만나야 하는 건지는 알 수 없다.

대체 누굴 만나야 ‘왜 나한테 이럽니까?’라고 물어볼 수 있는 것일까.

다짜고짜 찾아와서 ‘회장님 좀 뵙겠습니다.’ 이러면 누가 만나게 해 줄까. 쫓겨날 것이다.


사실 윤재가 이 빌딩까지 찾아온 것은 고작 현진에서 쫓겨나고 재취업의 길이 막혔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 달 사이에 윤재에게는 많은 일이 일어났다. 파혼이나 사표의 문제가 아니라 일신상의 문제였다.


일단 고모가 운영하던 작은 사무실이 부도 위기에 처했다.

고모 내외는 반도체의 부품을 공급하는 작은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일명 중소기업이다.

그런데 이번에 주 거래처에서 거래를 중단하는 것과 동시에 다른 거래처들이 동시에 어음 결제를 요구해 온 것이다.


어음 결제가 한 번에 몰리면 그건 감당할 방법이 없어진다.

거기에 가장 큰 거래처가 더는 거래를 못 하겠다고 나오면 부도는 피할 수 없다.

그 속사정을 들어보니 배경에 한경이 있었다. 또 한경이었다.


고모와 그다지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지만, 고아가 되었던 자신에게 어쨌거나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보호자가 되어 주었던 분이다.

부도가 나서 길거리에 나앉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그 이유가 자신이라면 더더욱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이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파혼, 회사에서 잘린 것 그리고 막힌 재취업, 고모부의 공장 위기. 이 모든 것 뒤에는 웃기지도 않는 우연처럼 한경이 있었다.

이쯤 되면 바보라고 해도 한경이 자신을 의도적으로 막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래서 지금 윤재는 한경 본사 건물을 찾아온 것이다.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나 들어보고 싶었다.

자산 총액이 380조에 달하는 엄청난 괴물이 전 재산이 고작해야 몇 억에 불과한 자신에게 왜 이러는지 그 이유를 반드시 듣고 싶다.


이상한 일은 윤재가 로비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일어났다.

마치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늘씬한 정장 차림의 여성이 다가와 그녀의 이름을 부른 것이다.


“서윤재 씨 되시죠. 기다렸습니다.”


물론 윤재는 처음 보는 여자였다.


“따라오시면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 회사 높은 분의 비서 정도 되는 것처럼 보였다. 비서나 비서실장. 그 정도.


위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는 VIP용이었다.

중간에 멈추는 것 없이 44층까지 올라가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44층에 멈춘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엘리베이터 앞의 유리 벽에 붙은 ‘회장실’이라는 세 글자였다.

점점 더 궁금해졌다.


한경의 회장을 만날 기회가 일생에서 몇 번이나 있을까. 보통의 경우에는 단 한 번의 기회도 없을 것이다.


사는 세상이 다르다.

44층, 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한경의 회장과 아래쪽에서 뛰어다니는 자신이 우연이라도 부딪힐 일은 없다.


“들어가시죠.”


단정한 말투의 여성의 안내를 받아 윤재가 회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진짜 회장 집무실이었다.


바깥의 비서실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공간으로 안내받은 윤재의 뒤에서 문이 닫혔다.

회장 집무실은 3면이 전면 유리였다.


저곳에 서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어떤 것일까.

그러나 지금은 그 풍경보다 윤재의 시선을 더 먼저 사로잡은 것이 있었다.

그 창 앞에 서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었다.


190cm에 가까워 보이는 키, 넓은 어깨와 쭉 뻗은 다리가 어디서 모델을 데려온 것 같지만 모델일 리는 없다.


‘어디서.’


그런데 저 뒷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눈에 익었다.

한경과 인연이라고는 조금도 없는데 왜 저 뒷모습이 눈에 익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설마.’


조금씩 불길한 예감이 윤재의 등을 타고 올라왔다.


한 달 전에 정수혁의 꿈을 꿨다.

9년이다. 정수혁을 마지막으로 보고, 다시 보지 않은 것이 9년이다.

열여덟의 여름에 마지막으로 봤고 지금은 스물일곱 살의 여름이다.


‘정수혁은 아니겠지.’


정수혁이 설마 한경의 회장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설은 상상도 할 수 없다.


한경은 그룹 역사가 50년이다.

창업주가 1970년대부터 키워 온 기업이다.


9년 전에도 한경은 국내 최고였다.

그리고 윤재가 아는 한 그 9년 사이에 회장이 바뀌지는 않았다.


한경의 회장은 정혁진 회장이다.

경제지에서 자주 얼굴을 볼 수 있어서 만난 적은 없어도 얼굴은 기억하고 있다.

적어도 정수혁은 아니다.


‘정수혁. 정혁진.’


그런데 이건 우연일까? 둘이 똑같이 정 씨라는 것은?


불길한 예감은 잘 들어맞는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윤재는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천천히 돌아서는 남자는 윤재가 아는 얼굴이었다.

9년이 지나도 얼굴이 그대로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자신의 얼굴은 9년 동안 꽤 변했다. 그런데 정수혁은 그때의 얼굴 그대로였다.

다만 조금 더 어른스러워졌을 뿐, 그 인상 깊은 눈매는 그대로였다.


그 눈빛.

자신을 바라보던 그 맹수의 눈빛은 9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그때처럼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정수혁.”


이 이름을 다시 부르게 될 줄은 몰랐다.


“잘 지냈어?”


다정한 인사말이지만 그 말을 건네는 목소리는 조금도 다정하지 않았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걸어온 정수혁이 주머니 안에서 꺼내 윤재에게 건넨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청첩장이었다.


“청첩장도 만들고.”


역시 정수혁이다. 모든 것의 배후에는 정수혁이 있었다.

정수혁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 것인지 그건 몰라도 그 모든 원인은 정수혁이었다.


“누구 허락을 받고 결혼하려고 했을까?”

“내가 네 허락받고 결혼해야 하니?”

“아니.”


윤재가 받지 않는 청첩장을 수혁이 허공에 픽, 날렸다.

그리고 그 손으로 윤재의 이마를 꾹 눌렀다.


“나 외에는 결혼 못 해.”


키가 큰 남자가 허리를 숙여 이마를 붙여 오자 윤재의 얼굴이 구겨졌다.

짙은 혐오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예전에도 이랬다. 정수혁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혐오감이었고, 짜증이었다.

정수혁은 한 번도 자신에게 있어서 호감이었던 적이 없다.

모두가 정수혁에게 미쳐 빠져 있을 때조차도 윤재는 그가 싫었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정수혁이 싫다. 9년 전보다 지금이 더 싫다.


적어도 9년 전에는 자신의 앞길을 막으려 들지는 않았다.

시험 성적을 미끼로 거래하자던 열여덟 살의 정수혁은 그래, 차라리 귀여웠다.


“누구 맘대로? 내가 언제 너하고 결혼한다고 했어?”

“그런 짓까지 해 놓고, 인제 와서 딴소리야?”


“무슨 짓?”

“서윤재.”


나른하게 속삭여 오는 이 목소리의 톤까지 그대로다.

마치 시간이 9년 전에 멈춘 것처럼 정수혁은 그대로다.


“너하고 한 짓들, 기억 안 나?”


“9년 동안 그것만 기억하고 있어야 해? 나 그렇게 한가하게 살지 않았어.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만 기억하지, 가치 없는 건 굳이 기억하지 않아.”


“그러면 다시 기억나게 해 줄까?”


수혁의 손이 윤재의 어깨를 꽉 쥐었다.

양손으로 어깨를 꽉 쥔 채로 금방이라도 키스하려는 것처럼 가까워지는 얼굴에 윤재가 입술을 꽉 다물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수혁의 뺨을 후려쳤다.


쫘악-!


매서운 소리와 함께 수혁의 뺨에 붉은 자국이 남았다.


“허튼짓하지 마. 성희롱으로 고소당하기 전에.”

“해 봐.”

“넌 무서운 게 없지, 정수혁?”


항상 짜증이 났다.


정수혁.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는 인간. 세상에 거칠 것도 없는 인간.

항상 잘났고 항상 이기고 항상 웃는 이 징글징글한 얼굴.


“무서운 거? 있어.”

“신기하네. 네가 무서운 것도 다 있고. 그래서, 이유를 좀 말해 볼래? 남의 인생 망친 이유.”


“너를 되찾으려고 한 것뿐이야.”

“되찾아? 뭘 되찾아? 내가 언제부터 네 것이었다고 되찾는다는 말을 하고 그래? 네가 네 것이었어?”


“거래했잖아.”

“무슨 거래.”


“내가 네게 1등 양보하면 네가 내 것이 되는 거래.”

“이제 사기도 치니? 언제 네 것이 되는 거래였어? 만지게 해 준다는 거래였지.”


“기억하고 있으면서 시침을 뚝 떼는 너는 사기꾼 아닌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내가 기억 못 한다고 대충 넘어갈 생각이었니? 언제부터 그렇게 허술했어?”


“우리 그때의 거래, 이제 새로 갱신할 시점이 된 것 같아.”

“왜? 난 이제 네게 받을 게 없는데? 난 더는 1등 할 필요가 없거든.”


그때는 왜 그렇게 꼭 1등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을까.

꼭 1등을 해서 아버지의 얼굴에 보기 좋게 성적표를 던져 주고 싶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1등 하면 독립하게 해 준다는 그 약속 때문이었을까.

그래 봤자 아버지는 성적표를 보지도 못하고, 약속도 지키지 못하고 죽었는데 말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늘 웃음이 났다.

그래서 사람을 가리켜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바보라고 한다는 것을 윤재는 그때 깨달았다.


“그러면 왜 여기 찾아왔지?”


수혁은 여전히 여유 있게 웃고 있었다.

뺨을 맞고도 웃을 여유가 있다는 것이 그저 우스웠다.


“더는 내게서 받을 것이 없다면, 정말 그런 거라면 왜 굳이 여기 온 거냐고 묻는 거야, 서윤재. 네 성격에 받을 것이 없으면 찾아올 리가 없잖아.”


빌어먹을 정수혁이다. 자신에 대해 너무 잘 안다.

자신은 정수혁에 대해 아직 모르는 것이 많다.

그러나 정수혁은 자신이 그를 아는 것보다 자신을 더 많이 알고 있다.


‘계속 봐 왔거든.’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계속 봐 와서 잘 아는 것이다. 자신에 대해서.


“싸움 걸고 싶으면 나만 건드려. 나 파혼하게 하고, 멀쩡하게 잘 다니던 회사 그만두게 하고, 다른 회사에 취업할 수 없게 한 것까지는 좋아. 상관없어. 그런데 왜 관계없는 다른 사람들까지 건드려?”


“누구? 아, 고모부?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내 고모부가 될 뻔했지. 물론 그랬더라면 우리는 아직까지 남매였을 테고.”

“말꼬리 돌리지 마.”


“내가 그런 것 아니야.”

“뭐?”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일까?


“내가 그런 것이 아니라고.”

“그러면 누가 그랬는데? 너 말고 누가 그런 짓을 한다는 거니?”


“우리 아버지라는 사람?”

“뭐?”


“친부 말이야. 생물학적 아버지. 정혁진 회장. 그 유명한 사람.”


역시, 그런 것이다.

한경의 회장, 경제계의 거물 정혁진 회장. 역시 그 사람이 수혁의 친부였던 것이다.


“나는 다만 부탁만 했지. 서윤재 그 여자, 내 앞에 데려다 놓으면 원하는 대로 다 해 주겠다고. 그랬더니 그 영감님께서 너를 내 앞에 이렇게 딱 데려왔잖아. 실력 좋네, 그 영감.”


“뭐?”


기가 차서 이번에는 손도 올리지 않았다.

뭐 이런 미친 새끼가 다 있단 말인가. 미친 아들에 미친 아버지인가?


자신을 데려오라는 아들이나, 아들이 그런다고 온갖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해서 자기를 기어이 여기까지 오게 한 아버지나. 똑같다. 역시 피는 못 속인다는 것일까.


“나도 실은 궁금했어. 그 영감이 어떤 식으로 널 내 앞에 데려올지. 네가 과연 네 발로 순순히 오기나 할까 그런 것이 궁금했는데, 오늘 딱 왔네. 이제 그 영감이 원하는 대로 다 해 주는 수밖에.”


“딴소리하지 말고. 지금까지 방해한 것 전부 원래대로 해 놓고, 다시는 고모부 회사 건드리지 마.”

“그런 것 정도야 해 주겠지만, 대신 넌 여기 있어야 해. 내 옆에.”


“웃기지 마.”

“그러면 나도 못 도와줘.”


“정수혁.”

“내가 널 도와주게 하려면 너도 내게 주는 것이 있어야 공평하잖아.”


“애초에 네가 일으킨 일이야. 그러니까 네가 수습하는 건 당연하지 않아?”


“서윤재. 네가 똑똑하다는 건 알겠는데, 지금 그런 논리를 펴기에는 네 입장이 급하지 않을까? 나는 급할 것이 없지만 너는 꽤 급한 거로 아는데. 네 고모부 회사가 얼마나 더 버틸까? 일주일? 열흘? 아마 일주일도 못 버틸걸?”


“대체 나한테 왜 이래?”

“9년 전에 말했잖아. 널 보고 있다고. 남자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


“날 좋아한다는 거니?”

“아주 많이.”


“그런데 어쩌니? 내가 너 싫어하는데?”

“좋아하게 될 거야.”


“그건 스토커들이 하는 말이지. 미친놈이나 스토커들.”

“미친놈이라는 말은 동의해. 내가 좀 미쳤지. 특히 서윤재에 얽힌 일이라면 아주 많이 미친 편이지.”


윤재가 알 수 없는 것은 도대체 왜 정수혁이 자신에게 이렇게 집착하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정수혁 정도면 여자가 넘쳐날 것이다.

그런데 왜 굳이 자신일까.


당장 조금 전의 그 비서만 보더라도 자신보다 훨씬 미인이다.

그런데 왜 굳이 자신에게 이러는 것일까.


“정혁진 회장님, 만나게 해 줘.”

“만나서 뭘 하려고?”


“지금 회장님께서 하시는 일이 얼마나 부당한지 말씀드려야지. 그리고 이렇게 해도 난 절대로 정수혁이라는 미친 인간 곁에 있지 않을 거라는 말도 덧붙여서 해 드릴 생각이야.”


“네 말을 들어줄까?”

“정수혁.”


윤재의 입술에 그제야 조소가 피어올랐다.


윤재는 이제 상황 파악이 끝났다. 적어도 정수혁에 대한 파악은 끝났다.

이유는 몰라도 정수혁은 자신에게 9년째 집착하고 있다.

이런 인간에게 통하는 방법은 한 가지다.


“만나게 해 주지 않으면 나는 오늘 집에 돌아가는 길에 약국을 열 곳 정도 들러서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는 수면제를 최대한 많이 구입한 다음 그것을 전부 씹어 먹은 후에 침대에 누워 얌전하게 잠을 잘 거야. 그렇게 잠이 들면 편해지겠지. 

더는 별로 왕래도 없는 고모부의 회사 부도에도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고, 더는 재취업에 목을 매지 않아도 되고, 더는 정수혁이라는 미친놈의 괴롭힘을 당하지 않아도 되고. 얼마나 편하겠어.”


“누가 그렇게 내버려 둘 것 같아?”

“그래? 막을 수 있겠어? 무슨 수로? 날 가두기라도 하려고? 날 어떻게 가두려고?”


자신만만한 윤재의 미소에 수혁이 슬쩍 미간을 찡그렸다.


내내 잘난 척 웃고 있던 그 얼굴이 조금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윤재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 얼굴이 보고 싶었다. 이 잘난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고 싶었다.


보고 싶었지만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이 얼굴, 이 표정. 일그러진 표정을 보는 순간 귓불이 짜릿하게 울렸다.

이건 아마도 통쾌하다는 감정일 것이다.


“그러니까, 만나게 해 줘. 지금 당장.”


지금의 윤재는 더 잃을 것이 없다.

최악의 경우에는 고모부의 사업이 부도나는 것에 불과하다.


부도. 그래, 날 수도 있다.

부도가 나면 자신의 유가증권을 전부 팔아서 고모부 가족이 살 집 하나 마련해 주면 된다.


작은 가게 하나 차려 주면 그것으로 할 도리는 다한 것이다.

대신 자신이 빈털터리가 되겠지만 상관없다. 어딜 가더라도 자기 한 몸 먹여 살릴 수는 있으니까 말이다.


더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은, 다른 말로는 더 두려운 것이 없다는 뜻이다.

정수혁이 실수한 것은 자신의 사방을 전부 막아 버렸다는 것이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 막다른 벽에 몰리면 무서운 것이 사라진다.

전부 빼앗겼다면, 더 쉽다.

더는 빼앗길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사람은 무서운 것도 없고 거리낄 것도 없으니까.


지금 윤재 자신의 상태가 그랬다.


사회적 체면? 아는 사람들과의 관계?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 올린 커리어? 앞으로의 미래? 

전부 다 이미 정수혁에게 저당 잡힌 것이나 마찬가지다.


정수혁이, 아니 정혁진 회장이 마음만 먹는다면 주가를 뒤흔들어서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유가증권들을 폭삭 주저앉힐 수도 있을 것이다.

하루아침에 알거지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더 마음이 홀가분했다.

여기서 더 잃어 봤자 뭘 더 잃겠는가.


하지만 정수혁은 다르다.

아직 정수혁은 잃을 것이 남아 있다.

그건 바로 자신이다. 서윤재, 자기 자신. 정수혁에게서 빼앗아 버릴 수 있는 단 하나.

동시에 정수혁에게 가장 치명상을 안길 수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윤재는 알고 있다.

그게 그녀가 무서울 것이 없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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