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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야설) 난 나쁜 놈이다 -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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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밍키넷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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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토요일이다. 최종 결과가 나올 때까지 4일이 남았다. 웬만하면 붙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결과가 나오기 전까진 알 수 없어서 긴장이 된다. 계속 붙을까 안 붙을까만 생각하니 시간이 가질 않는다. 온종일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 여자 친구가 있었으면 그런 건 잊고 여자 친구에게 집중할 수 있었을 텐데. 이상한 곳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나다.


사실 난 지금 혜미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지 않다. 외로움을 타는 지금에도 전 여자 친구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는다.

지금 내가 떠올리는 사람은 혜미와 헤어지던 날 처음 만났던, 그전까지는 인연조차 없었던 여자다.

처음 만났을 때 울음으로 화장이 번져 있던 그 얼굴은, 나의 넋을 빼놓았던 그 눈웃음은, 아직도 뇌리에서 잊히지. 않고 있다.


전화해볼까.


전화번호는 있다. 아까부터 갈등이 계속 생겼지만, 선뜻 전화할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외로움에 못 이긴 짧은 만남이었다. 이미 상대는 잊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시 느꼈던 짜릿한 쾌감과 배덕감은, 상대에겐 이제 한순간의 열정 정도로만 기억되고 있을지 모른다.

전화를 받지 않을까 두렵다. 차라리 전화를 안 받으면 낫다. 전화를 받는 순간 난처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릴까 봐 두렵다.

연애 초기에 느끼는 풋풋한 설렘도 아니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다. 그냥 혼자 있기 외로워서 아무 여자에게나 연락할 생각이면서.


정혜는 직장인이니까 일하고 있을까. 아니, 토요일이니까 쉬고 있을 것이다. 지금 전화하면 전화를 받을까? 받는다고 해도, 만나자고 하면 만나줄까?


“아오!”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연애할 때도 전화하기 전 이렇게 고민한 적이 없다. 좋아하는 사람도 아닌데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좋아 더 이상 망설이지 말자. 그냥 전화만 하는 건데 뭐.

핸드폰으로 저장된 번호를 찾았다. 그때 송수신목록에 남아있던 번호를 저장해뒀었다. 전화벨이 울린다.

어디선가 들었던 음악이 컬러링으로 나온다. 전화를 안 받는다.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가려고 하자 전화를 끊었다.

그래, 받을 리가 없지. 어쩐지 허탈해졌다. 핸드폰을 침대 구석으로 던져 놨다.

지금까지의 모든 고민과 방황이 쓸데없는 짓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한없이 스스로가 부끄럽다.

그때 내 핸드폰에서 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난 잽싸게 핸드폰을 집어 수신번호를 확인했다.

정혜다. 바로 전화를 받았다.


“아, 저기. 전화했네?”

“어, 어, 응.”

“자다 일어나서 못 들었어. 미안해.”

“아니야 괜찮아.”


이게 무슨 연애 초기 또는 시작 직전의 커플 같은 전화란 말이냐.


“무슨 일로 전화했어?”

“그냥.”


혼자 집에서 죽치고 있으려니 외로워서 전화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혹시 만날 수 있나 해서.”


말을 해놓고도 깜짝 놀랐다.


“근데 역시 바쁘겠지?”

“아, 아니야! 나 안 바빠. 오늘 쉬는 날인걸.”


내가 한발 물러서자 정혜가 다가왔다. 정혜도 지금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생각해도 되겠지. 기분이 좋아졌다.


“그럼 오늘 만날 수 있을까?”

“아, 응. 괜찮아.”



정혜가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

“그럼 몇 시쯤에 볼까? 같이 저녁 먹을래?”

“어, 응. 먹을래.”

“그러면 7시쯤에 보면 될까?”

“응!”

“그러면, 장소는.”



“아들아.”

“네.”

“슈퍼에서 계란 좀 사 와라. 계란이 다 떨어졌네.”

“알았어요. 한 판 사오면 돼요?”

“아냐. 두 줄 사와.”


어차피 지금 계란을 사 온다고 약속에 늦을 건 아니다. 얼른 슈퍼에 갔다 와야겠다. 방에서 점퍼를 껴입고 나갈 준비를 했다.


“근데 너 취직은 어떻게 되는 거냐?”

“지금 최종결과 나와야 해요. 4일 남았어요.”

“붙을 거 같아?”

“몰라요.”


웬만하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거다. 확신하면서 말을 할 수가 없다.

집에서 나와 마당을 걸었다. 대문을 여는데 핸드폰 벨 소리가 들렸다.

핸드폰을 꺼내면서 밖으로 나오자, 낯익은 얼굴이 앞에 서 있다.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는 여자. 승희다.


“아. 마침 나왔네요. 오빠.”


승희가 핸드폰을 끊고 핸드백에 집어넣었다. 내 핸드폰 벨 소리도 멈췄다. 승희가 전화하던 중이었나 보다.


“너 진짜 매일 우리 집에 올 생각이냐?”

“네. 전 했던 말은 꼭 지켜요.”


그런 말은 안 지켜도 되는데. 정말 끈질기다. 승희가 이런 애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155 정도의 아담한 키. 귀여운 얼굴. 약간 날카로운 눈매는 귀여운 얼굴에 도발적인 매력을 더한다.

공부도 잘하고, 틈이 나면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등 성실하고 착한 이미지가 있다. 그런 애가 이렇게까지 남을 집요하게 괴롭힐 줄 몰랐다.


“안 오면 안 될까?”

“싫어요. 근데 오빠 지금 어디 가요?”

“어머니 심부름. 슈퍼에 계란 사러 간다.”

“그럼 저도 따라갈게요.”

“따라오면서 날 괴롭히겠다고?”

“설득하는 거예요.”


설득이라는 이름을 한 괴롭힘이다. 승희를 뿌리쳐보려고 빠르게 걸었다. 난 걸음이 빠른 편이라 속도를 내면 여자들이 잘 못 따라온다.

그러나 승희는 뒤처지지 않았다. 맞다. 얘 운동도 잘했지.


“너 원래 힐 신고 다니지 않았니?”

“이럴 줄 알고 단화로 신고 왔어요.”


준비가 아주 철저하다. 걸음 속도를 놓쳤다. 어차피 달려가지 않는 한, 승희를 따돌릴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달려간다고 해도 승희는 그냥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된다.


승희는 슈퍼에도 따라 들어왔다. 계란을 고르는 동안에도, 계산하는 동안에도 계속 내 옆에 서 있다.

슈퍼 주인아줌마가 “총각 애인이야?”하고 능글맞게 물었다. 난 그냥 “친척이에요. 놀러 왔어요”하고 대답했다.

계란 두 줄이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집으로 향했다.


“오빠 정말 혜미를 만날 생각이 없는 거예요?”

“없다니까.”

“어째서요?”

“만나고 싶지 않으니까.”


그리고 만난다고 해도, 나보고 무슨 말을 하라는 거냐. 있지도 않은 사랑이란 감정을 꾸며가며 혜미를 속이라는 거냐? 그런 짓은 못 한다.

이미 혜미에게 잘못할 만큼 잘못했다. 더 이상 죄를 늘려가고 싶지는 않다.


“여자 친구잖아요?”

“전 여자 친구야.”

“혜미는 그렇게 생각 안 할걸요.”

“그렇게 생각할 거다.”

“안 해요.”


승희는 절대 지지 않았다. 정말 고집쟁이다. 예전에 내 동기 중 한 명이 승희를 꼬시려고 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며칠 후 “걔는 고집이 너무 세. 한번 아니라고 하면 진짜 끝까지 아니더라고. 걔랑은 사귀라고 해도 못 사귈 거야.

아마 싸움이라도 나면 진짜 끝장을 볼 걸?”이라고 말하며 승희를 포기했다.

그때는 몰랐다. 여자애가 고집이 세면 얼마나 세겠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내 생각이 얼마나 안이했는지 지금 깨달았다. 이 애의 고집은 이길 수가 없다.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제발 내일은 찾아오지 말아라.”

“싫어요.”


뜻을 절대로 굽힐 생각이 없는 승희. 난 한숨을 쉬며 문을 닫았다. 마당을 지나 집으로 들어왔다. 

내일도 또 찾아오겠지. 혹시라도 내일 전화 오면 절대 나가지 않을 거다. 굳게 다짐했다. 집에 들어오니 어머니는 여전히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계시다.


“엄마, 계란 어디다 놔요?”

“그거 냉장고에 그냥 넣어놔.”

“네.

냉장고를 열어 계란을 넣었다. 계란을 가지고 오는데 썼던 비닐봉지는 비닐봉지를 모아두는 자루에 넣었다. 

이제 나갈 준비를 할 차례다. 오후 3시 반이 조금 안 된다. 시간은 충분하다. 천천히 준비하고 나가면 되겠다.


샤워를 했다. 온몸을 구석구석 깨끗이 씻었다. 이상한 기대를 하는 건 아니다. 더러운 이미지를 보여줄 수는 없잖아. 정말 그런 이유 때문이다.

세수도, 양치도 깨끗하게 했다. 이 정도는 원래 사람을 만나기 전에 하는 기본적인 행동이다.

딱히 뭔가 특별한 의도가 있는 건 절대 아니다.


샤워를 마치고 옷을 입었다. 어떤 식으로 입어야 괜찮을지 조금 고민했다. 원래 심플하고 캐주얼한 복장을 선호하고, 대부분 가지고 있는 옷이 그런 종류다.

어떤 것과 같이 입어도 부자연스럽지 않다. 그렇다곤 해도 어떤 옷을 입을지 고민이 됐다.

그렇다고 절대 어떤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원래 사람을 만나기 전에 하는 기본적인 행동이다.


외출복을 준비하고 침대 위에 꺼내두었다. 아직 약속 시간까지 한참 남았는데 벌써 옷을 입을 생각은 없다.

컴퓨터를 켜고 그 앞에 앉았다. 인터넷으로 저녁 식사를 해결할 곳을 찾고 있다.

그리고 그다음엔 술집인가? 그건 너무 뻔한가? 영화관이라도 갈까? 그게 더 뻔하진 않을까? 핸드폰을 집었다. 그리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혹시 영화 좋아해?”


문자를 보내고 몇 분이 흘렀다. 몇 분 후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응, 좋아해! 영화 볼 거야?”

“어. 영화 보려고. 어떤 게 좋아?”

“난 아무거나 다 좋아.”


아무거나 다 좋다는 말. 남자에게 가장 곤란한 말이다. 내가 가진 센스와 능력을 시험해보겠다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정말로 아무거나 골랐다가는 모든 게 끝날 거다.


“로맨스 영화도 괜찮을까?”

“응.”


좋아, 로맨스 영화로 해야겠다. 남녀가 영화를 보는데 액션 같은 걸 보는 것보단 그래도 사랑이 있는 편이 나을 것이다.

좋아, 저녁을 먹고, 영화를 보고, 가까운 술집이나 다른 곳을 찾아보면 되겠다.

어느 정도 데이트 예정을 짜고 세부 사항을 찾아보다 보니 약속 시간까지 6시가 조금 넘었다. 약속 시간까지 1시간도 안 남았다.


시계를 보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 여기서 시내로 나가는 버스는 거의 10분 간격으로 지나간다.

시내까지 버스로 20분 정도. 이제 옷 입고 대충 준비를 마치고 버스에 타면 시간이 딱 맞을 것이다.

입기 위해 준비해놨던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서둘러 버스를 타고 나가야겠다. 적어도 10분 전에 약속 장소에 도착하기 위해선 최대한 빨리 나가야 한다.


옷을 입고, 지갑을 챙기고 핸드폰을 챙겼다. 뭔가 더 챙길 게 있는지 고민했다.

오늘 날씨가 추우니까 목도리도 챙겨가야겠다. 장갑도 낄까. 장갑은 관뒀다. 이 정도면 되겠다 싶어 집을 나섰다.


“엄마, 나 약속 있어서 나가볼게요.”

“밥은?”

“밖에서 먹을 거예요.”


집에서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빠르게 걸었다. 일부러 속도를 냈다기보다는 어쩐지 속도가 저절로 났다.

들떠 있는 걸까. 여자 친구를 사귀었을 때도 이렇게 들떠 있던 적이 있었나. 어쩐지 내 모습이 웃기다. 이제 두 번째로 만나는 여자에게 이런 마음을 느끼다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아까부터 날 지배하고 있던 설렘이란 감정이 약해진 것은 아니다. 난 오히려 윤리적으로 개운치 않은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선뜻 맞다고 할 수는 없지만, 선뜻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버스가 금방 도착했다. 버스카드를 찍고 버스에 올라탔다. 시간을 확인했다.

6시 30분. 버스에서 내리고 약속 장소까지 가면 적어도 5분 전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다행히도 오늘 차가 막히지 않아서 버스가 금방 목적지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약속 장소까지 빠른 속도로 걸었다.

47분. 딱 10분 전에 약속 장소에 도착할 수 있겠다. 길 건너에 백화점이 보였다. 우린 백화점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만나기로 했다.

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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