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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야설) 그그녀는 겨울의 바다를 닮았다 - 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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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밍키넷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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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청량리역에는 많은 사람이 붐볐다.

역사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윤재도 그중 한 명이었다.

윤재가 손목시계를 보았다.

시침이 8자 부근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지선과 약속을 한 시간은 아침 7시.

한 시간이 이상이 지났음에도 그녀는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착잡해진 윤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겨울의 절정으로 향하는 12월 중순이었다.

차가운 아침 공기에 윤재의 입김이 흩뿌려졌다.

윤재는 생각했다.

역시 안 오려는 모양이다.


약속은 아니었다. 사실 일방적인 통보였다.

이별을 고한 여자친구를 한 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아니 붙잡기 위해 마음대로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올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일말의 기대를 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 기대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윤재는 연락을 해볼까도 싶었지만 금세 마음을 접었다.

그녀가 이별을 말한 후 자신의 모든 연락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젠 잊어야겠지. 이십 대 후반에서 서른두 살이 될 때까지 함께한 여자친구를.

윤재는 그렇게 생각하며 코를 훌쩍였다.

추워서인지 다른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윤재는 코를 훌쩍이며 역사 안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혼자서라도 떠날 요량이었다.

시원하게 펼쳐진 겨울 바다를 보고 오면 좀 괜찮아지리라 생각하며.


*


“정동진역 한 장이요.”


윤재는 정동진행 기차표를 하나 샀다. 그리고는 뒤이어 기차표를 구매하는 여자를 지나쳐 기차를 타러 갔다.

기차는 버스나 지하철과 달리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들뜨거나 설레는 마음이랄까? 하지만 지금의 윤재에게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조용히 앉아 착잡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잠시 후 기차가 출발했다.

서울을 벗어나자 겨울의 쓸쓸한 풍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눈이라도 쌓였으면 눈부신 설경이 장관이었겠지만, 지금은 바싹 말라 얼어붙은 논밭과 앙상한 나무들이 을씨년스러웠다.

기차가 출발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윤재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창밖을 바라보는 모습 그대로 말이다.

하지만 정동진까지는 거의 6시간을 가야 했다. 아무리 울적한 기분의 윤재라도 6시간 동안 그 자세 그대로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윤재는 기차 카페에 가보기로 했다. 주전부리가 담긴 카트가 다니던 시절은 이미 오래전의 이야기였다.

카페 칸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아이 두 명을 데리고 앉아 있는 부부와 맥주를 마시고 있는 아저씨 한 명이 다였다.

아저씨는 맥주에 오징어를 먹고 있었다. 그 모습에 윤재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기차에서 차창 밖을 바라보며 마시는 맥주는 술을 좋아하는 윤재에겐 굉장한 유혹이었다.

윤재가 직원에게 다가갔다.


“맥주 하나랑 오징어 하나 주세요.”


결국 윤재도 맥주와 오징어를 구입해서 남아 있는 자리에 앉았다.

맥주 캔을 따자 시원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윤재는 이 소리를 언제 들어도 짜릿했다.

소리뿐이랴. 맥주를 한 모금 크게 넘기고 오징어를 씹을 때의 그 쾌감! 윤재는 이별에 대한 아픔도 잠시 잊고 맥주 맛에 취했다.

그때 카페 칸에 들어온 여자 한 명이 직원에게 가서 맥주를 구입했다.


“맥주 하나요.”


맥주를 달라는 이야기에 윤재의 고개가 자기도 모르게 돌아갔다.

씹을 거리도 없이 맥주만 구입한 여자는 남아 있는 자리에 가서 창밖을 바라보며 맥주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윤재는 그런 여자의 분위기가 꽤 근사하다고 느꼈다.

게다가 평소였으면 흘깃거릴 정도의 미모였지만 이별의 아픔이 남아 있는 그에겐 그럴 여유가 없었다.

윤재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 맥주 캔을 들어 입에 가져갔다. 하지만 맥주는 어느새 다 떨어져 있었다.

오징어도 약간 남아 있고 해서 윤재는 맥주를 한 캔 더 사기로 했다.


“저기 맥주 하나만 더 주세요.”


윤재는 다시 맥주를 사가 지고 와 홀짝이기 시작했다.


*


윤재는 맥주도 마셨다.

의자에 앉아 깊은 잠도 잤다.

핸드폰도 만지작거렸다.

하염없이 풍경도 바라봤다.

윤재가 그러기를 여러 차례 반복한 후에야 기차는 정동진역에 도착했다.

6시간은 꽤 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정동진역에 내린 윤재는 눈앞에 겨울 바다가 펼쳐지자 그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꼈다.


흔히 정동진역을 바다에 가장 가까운 역이라고 말한다.

그 표현 그대로 정동진역과 바다 사이에는 넓지 않은 모래 해변만이 위치했다.

윤재는 해변에 가보기로 했다. 토요일이었지만 그리 맑은 날씨도 아니었고 바람도 꽤 많이 불었다.

그런 날씨 탓일까? 역에서부터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사람들이 많지 않으면 특정 인물이 눈에 쉽게 띄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 여자가 윤재의 눈에 들어왔다.

여자는 갈색의 롱코트를 입고 자주색 목도리로 얼굴을 칭칭 감아 반쯤 가린 상태였다.

하지만 윤재는 목도리 위로 드러난 그녀의 눈매만으로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기차 카페에서 홀로 맥주를 마시던 여자였다.

윤재는 혼자서 역사를 빠져나가는 여자를 보며 생각했다.


‘혼자 여행 온 건가? 멋있네.’


기차 카페에서도 그랬고, 홀로 걷고 있는 그녀의 지금 모습에서도 분명 어떤 고고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윤재는 그녀의 그런 분위기가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호감이 간다는 표현이 옳았다.

하지만 윤재는 금세 고개를 흔들어 그런 잡념을 떨쳐버렸다.


남자란 얼마나 간사한 생물인가.

연인과 헤어져 죽을 만큼 힘들어도 마음에 드는 여자가 나타나면 눈이 돌아가는 게 남자란 생물이다.

윤재는 적어도 오늘만큼은 그런 생물은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일이 마음먹은 대로만 풀릴 리 없다.

역사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이 이리저리 흩어지는 와중에도 그녀는 윤재와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해변으로 향하는 윤재와 행선지가 같은 모양이었다. 

물론 함께 해변으로 향한다고 해서 지금 상황이 특별하지는 않았다. 

그녀 외에 다른 사람들도 있었고, 이 길은 그저 공통의 목적지로 향하는 경로일 뿐이었다.

어쨌든 윤재는 그녀에게서 최대한 신경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겨울의 해변에 도착하게 되었다.


“아.”


윤재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했다.

시린 옥빛의 겨울 바다.

잿빛 하늘과 어울리게 맞닿아 섬뜩하리만치 고고했고, 마치 흰 눈이라도 흩뿌려놓은 것처럼 부서지는 파도는 경외감을 느낄 정도로 장엄했다.

순간적으로 윤재의 머릿속에 모든 생각이 사라졌다.

희로애락이란 기본적인 감정이 잠깐이나마 느껴지지 않은 것이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윤재는 그 짧은 순간에도 충분한 만족을 느낄 수 있었다.

여자친구와 헤어져 힘들고 괴롭던 마음이 잠시나마 잊혔기 때문이다.

번쩍임과 같았던 순간이 지나고 윤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생각했다.

역시 보러오길 잘했다. 여기라면 그녀를 잊을 수 있을.


찰칵! 찰칵! 찰칵!


해탈과도 같은 경지에 올라 들떠있던 윤재의 생각을 방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메라의 셔터 소리였다.

살짝 못마땅해진 윤재는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기차에서 홀로 맥주를 홀짝이고, 해변까지 걸어오며 유독 눈에 띄던 그녀였다.

그녀는 윤재가 쳐다보는 동안에도 분주히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댔다.

여자의 얼굴을 반쯤 감았던 자주색 목도리는 어느새 턱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윤재가 기차에서도 보고, 걸어오면서도 봤던 여자이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그것도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카메라 뷰파인더에서 가끔 눈을 떼며 모니터를 확인하는 그녀에게서 윤재는 가장 먼저 이렇게 느꼈다.

하얗다.

그녀의 피부는 정말 말 그대로 하얗다. 이것저것 수식어를 더할 것도 없었다. 그냥 하얗다.

새하얀 피부에 빼앗긴 정신이 돌아오자 다음으로는 그녀의 이목구비가 윤재의 눈에 들어왔다.

옆모습인지라 역시 오뚝한 콧날이 제일 먼저 보였고, 그다음은 무심하게 모니터를 바라보는 눈, 마지막은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이었다.


윤재는 그녀를 잠깐 바라볼 요량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분명 강렬하게 사람을 끌어들이는 그런 매력, 아니 마력이 있었다.

그러다 문득 윤재는 생각했다.

왠지 범접지 못할 그녀 특유의 분위기가 저 겨울 바다를 닮았다고.

특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저 무심한 눈빛이.


“응?”


윤재는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소리 냈다.

어느샌가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고, 자신도 얼결에 그녀의 눈을 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황을 깨달은 윤재는 무안한 마음에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녀가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은 한 동안 계속되었다.

윤재는 바다에 최대한 신경을 집중한 채 그녀를 무시하며 민망한 상황을 견뎌냈다.

잠시 후 카메라의 셔터 소리가 다시 들리고 나서야 윤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윤재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떠올랐다.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힘들어서 겨울 바다를 보러 온 건데, 그 와중에도 다른 여자에게 눈길이 쏠린 자신이 우스웠기 때문이다.


‘난 다를 줄 알았는데 여느 남자들과 똑같은 새끼구나.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네. 이렇게 잊을 수 있으니.’


“저기요.”


다시 감상에 젖으며 열반의 경지에 들려는 윤재가 또 방해받았다.

이번엔 카메라 셔터 소리도 아닌 여자의 목소리였다.

게다가 소리가 난 쪽은 바로 옆쪽이었다.

겨울 바다를 카메라에 담던 그녀에게서 말이다.

왜 쳐다봤냐고 자신을 질책이라도 하려는 걸까?

윤재는 쓸데없는 걱정에 최대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특유의 무심한 눈빛으로 윤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 압도당한 윤재는 자기도 모르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요.?”


윤재의 어리숙한 되물음에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카메라를 내밀었다.

상대의 의사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윤재가 얼결에 카메라를 받아서 들자 여자는 몇 걸음 물러나 바다를 등지고 섰다. 찍어 달라는 의미였다.

윤재는 카메라와 여자를 번갈아 보며 이 상황에 대해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사진 촬영 부탁은 여행지에서 흔한 일이라 생각은 길지 않았다.

카메라를 들고 뷰파인더 안에 여자의 모습을 담았다.


‘진짜 예쁘게 생겼구나.’


겨울 바다를 등지고 서 있는 여자의 모습에 윤재는 새삼 느꼈다.

바람에 흩날리는 검고 긴 머리칼을 쓸어 넘길 때는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바다를 배경으로 여자의 사진을 한 장 찍은 윤재는 카메라를 건네주려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여자는 카메라를 받기는커녕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뭐예요?”

“예? 카메라 돌려드리는 건데.”


여자는 잠시 어이없다는 눈길로 윤재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아니. 겨우 한 장 찍은 거예요? 이리저리 여러 장 좀 찍어주세요.”

“아. 네.”


윤재와 여자의 거리가 다시 멀어졌다.

윤재는 여자를 카메라 뷰파인더에 재차 담으며 투덜거렸다.


“아니. 내가 자기 사진기사야 뭐야.”


물론 여자에게 들릴 만한 목소리 크기는 아니었다.

여자는 바다를 바라보거나 하늘을 바라보는 등의 자연스러운 자세를 취했다.

투덜거리던 윤재도 매력적인 여자의 모습에 넋을 잃고 셔터를 눌러댔다.

잠시 후 꽤 여러 장의 사진이 찍히고 윤재는 카메라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여자는 카메라를 받아서 들고 찍힌 사진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윤재는 그런 그녀의 앞에 서 있기도 뭐해서 슬쩍 고개를 까딱이곤 자리를 뜨려 했다.

하지만 윤재의 뒤에서 또다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요!”


윤재가 돌아보자 여자가 다가와 카메라를 보여준다.


“아니. 사진이 이게 뭐예요. 전 작게 찍고 배경만 잔뜩 찍어놨네.”

“예? 아. 제가 사진 찍는 스타일이 원래 그래서.”

“아니. 그쪽이 뭐 프로 사진작가예요? 무슨 본인 스타일을 따져요. 저를 찍어달라고요. 저를.”


여자가 카메라를 윤재에게 들이밀었다. 다시 찍어 달라는 의미였다.

윤재는 뭐라고 따지지도 못한 채 다시 카메라를 받아 그녀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이번엔 그녀의 요구대로 상반신 위주의 구도였다.

그 와중에도 윤재는 무언가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그러다 뷰파인더 안에 담긴 그녀의 모습에 그 이질적인 느낌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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