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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야설) 기억 - 2부. 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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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밍키넷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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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2"를 읽기 전에 "기억"을 먼저 읽으셔야 해요.


버스 계단을 내려서는 다리에 힘이 없어서 넘어질 뻔했다.

생각보다 저녁 공기가 차갑게 얼굴을 때리지만 상기된 얼굴과 몸을 식히지는 못한다. 화장실로 들어가시던

이모님이 돌아서시더니 어디 아프냐고 물으셨다.


그저 멀미가 좀 있다고 대답했지만 처음 느낀 다른 사람의 손가락이 내 몸으로 들어오는 느낌은 나를 쉽게 가라앉혀 주질 않는다.

내 뒤를 따라서 오시는 엄마를 의식하며 휴게실 화장실로 들어간다.


아직 브라의 후크를 잠그지 못한 상태라서 앞이 좀 허전하다.

카디건을 입었지만, 혹여 블라우스 너머로 열린 것이 드러나지나 않을까 봐 화장실 안으로 들어서며 문이 조금 열린 곳으로 잰걸음으로 들어 왔다.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하나?


우선 나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카디건 앞 단추를 풀어보니 블라우스는 많이 구겨져 있고 주름 가지 말라고 조심히 앉은 치마도 사정은 비슷하다.

치마를 올려 내려본 팬티는 버스 안에서 느낌처럼 아랫부분이 젖어 있고 유쾌한 느낌은 아니었다.

생리가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그런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지만

가끔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나 선생님을 깊이 생각할 때 느꼈던 비슷한 느낌이라 불쾌하지는 않았다.


소변이 우선 급해 변기에 엉덩이를 좀 떼고 힘을 주는데 시원하지 않게 조금씩 흐르기만 한다.

그러면서 아래가 따끔따끔 아려온다. 문득 아까 그 남자의 손가락이 들어 왔던 걸 기억해 낸다.

그 알 수 없는 고통의 느낌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혼란의 상태에서 들어왔던 손가락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나쁘지도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오줌이 조금씩 시원하게 나온다.

물로 닦아야 한다는 생각은 했지만, 방법이 없다.

다시 나가서 휴지에 물을 묻혀 오기에는 엄마와 이모 눈치가 걱정된다.


오줌을 주고 나니까 좀 시원한 것 같기도 하고 아려오는 것도 없어진 듯하다.

화장지로 두어 번 찍어내듯 닦고 무의식적으로 가방에서 라이너를 꺼내다 멈추었다.

지금 정도의 젖은 상황이라면 라이너를 착용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왜 멈춘 것일까? 내가 지금 뭘 기대하고 있는 것일까?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지워 내려 하지만 손에 쥐었던 라이너는 다시 가방으로 들어가고 있다.


휴지로 팬티의 젖은 부분을 훑어 닦아 낸다. 그리고 팬티를 입는데, 젖은 느낌은 여전하다.

아까 버스에서 열린 브라의 후크를 닫기 전에 가슴을 살짝 잡아 보았다. 젖꼭지가 아프다.

그의 타액이 남아 있는 듯하여 휴지로 살짝 닦아 내 본다.

휴지에 물을 좀 묻혀. 들어 올 걸 하는 후회가 또 한 번 밀려온다.


블라우스와 치마를 다시 정리하고 카디건을 입는다

말고 치마의 허리 부분을 한번 접어 본다. 아까보다 한 1인치쯤 치마가 올라왔다.

내 속에 뭔가에 대한 기대가 있나 보다.


옷 정리가 끝나고 변기에 다시 다리에 힘을 풀고 털썩 앉아 보았다.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콩닥거린다.

나쁜 사람은 아닐 거로 생각하지만, 나에게는 첫 패딩 경험이라 쉽게 마음이 가라앉질 않는다.

그리고 아까 버스에 탈 때부터 경험을 생각해 보았다.


착해 보이는 얼굴의 대학생으로 보이는 사람의 옆자리에 앉은 생각,

창가로 옮겨 앉은 생각, 잠시 잠들었던 생각,

그리고는 내 몸으로 그의 손가락이 들어왔던 생각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다시 한번 얼굴이 상기 된다.


전체적 느낌은 한편 따뜻하고 한편 뜨거웠다는 느낌뿐이다.

정신을 가다듬으며 밖으로 나왔다.

엄마와 이모가 보이지 않는다. 거울 앞으로 가서 손을 씻으며 얼굴을 보았다.

생각처럼 잔뜩 상기되어 있고 귀밑이 붉게 물들어 있다. 얼굴의 당김이 느껴졌다.

그의 타액 때문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세수를 시작했다. 비누로 깨끗하게 씻었다.


그의 느낌이 조금 사그라든다.

가방에서 로션을 꺼내 가볍게 바른다. 그렇지만 미끄럽지 않게 휴지로 찍어 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손을 말리며 잠시 후 벌어질 일들에 대해 생각하려 했지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화장실을 나서며 잠시 멈추었다.

조금 떨어진 버스의 문 앞에서 그가 담배를 피우고 있다. 키는 그다지 커 보이지 않았다. 175정도,

정장을 깔끔히 입은 모습에서 서울 사람이라는 티가 물씬 풍긴다.

단정하게 깎은 머리에서 반듯한 사람일 거라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뭐 하는 사람일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을 때 엄마가 날 부르신다.

거기서 뭐 하고 서 있냐며 커피 한잔을 권하신다.

이모가 그 옆에 서 있다.


내일부터는 이모 집에서의 생활이 시작된다.

통영의 집을 떠나 이모 집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작년, 대입 시험을 보았지만 높은 내신에도 불구하고 난 내가 원하는 서울의 학교에 진학할 수가 없었다.

부모님은 내 모교의 수준을 질책하셨고 난 아무런 변명도 할 수가 없었다.

지역 은행에 다니시는 아빠의 권고로 서울의 학원에서 재수하기로 결정이 되었고

엄마는 이모를 불러 내려 이 일을 상의한 결과 보험 일을 하시며 혼자 사시는 이모님의 승낙으로 난 엄마, 이모와 함께 이 버스에 오르게 되었다.


엄마와 이모는 뭔 얘기가 그리 많으신지 대화가 끊이지 않으신다.

커피를 한잔 손에 들고 휴게소를 나오는데 그가 보이지 않는다.

한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앞을 지나 버스를 탈 용기가 나질 않았다.

남자를 사귀어 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기껏 손잡고 다니거나 남의 눈을 피해 입맞춤을 하는 정도였다.

통영은 지역 사회라서 데이트만 해도 소문이 짜하다.

그래도 모범생을 자부하던 나로서는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었다.


상경하는 것에 대해 기대를 하고 있기는 했지만, 버스 안에서 이런 경험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버스 계단을 오르면서 마음이 덜컹했다.

내가 결정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 자리에 계속 앉을 것인가? 잠시 멈칫했고 뒤를 따르시던 이모와 엄마가 재촉하신다.

순간적으로 많은 갈등이 나를 멈칫거리게 했다.


난 엉거주춤한 걸음으로 원래 자리로 와서 앉는다.

그의 향기가 아직 자리에 남아 있었다.

엄마가 뭐라 안 하실까 하는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엄마는 자신들의 옆자리로 오라는 손짓을 하신다.

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이모님이 싱긋 웃으신다.

저 웃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모가 엄마에게 뭐라 말씀하시고 두 분의 웃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너무 창피하다. 그렇지만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는 느낌이 내 가슴 한구석에서 날 위로 한다.


난 아까처럼 카디건을 벗어 목까지 덮고 앉았다.

치마를 펼치고 앉는 것도 아까와 같다.

그러면서 정말 난 내 속에 내가 아닌 또 다른 누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난 그를 기다리고 있다.

창밖으로 그가 오는지를 보려 했지만, 거기에는 내 얼굴만이 있었다.

쑥스러웠다. 버스를 오르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고 그사이에 그의 얼굴이 보였다.


눈을 감았다. 그를 정면으로 볼 자신이 없었다.

그렇지만 난 그 짧은 시간에 그의 많은 모습을 보았다.

아까와 달리 넥타이가 보이지 않았고 셔츠의 맨 윗단추가 풀려 있었다.

상의는 벗어서 손에 들고 있었고 다른 손에 뭔가가 들려 있었고 나의 전체적인 생각은 마르지 않았고 단정하다는 정도로 요약되고 있었다.


난 그가 내 옆에 와서 앉으리라 확신했다.

눈을 감은 상태에서 그가 덥석 내 옆에 앉는 느낌을 받았다.

살짝 눈을 떠 보았더니 그의 상의가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고 여성스러운 두 손이 그 위에 살짝 놓여 있다.

이쁜 손을 가졌다고 생각하는데 앞자리의 이모의 웃음소리와 이야기 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오고 엄마가 살짝 돌아보시는 듯하다.


눈을 꼭 감아 버렸다. 옆자리에서 기침 소리가 들린다. 가벼운 기침 소리. 그도 쑥스러운가 보다.

암튼 엄마와 이모의 묵인 아닌 묵인 속에 난 그와 남은 몇 시간을 다시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가 뭔가 말을 걸면서 내게 귤 하나를 건넸던 생각이 난다.

난 사양하지 않았지만 먹을 수도 없었다. 왠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암튼 그는 자기 학교와 전공을 얘기했던 것 같았고 나에게 몇 학번이냐고 묻는 듯했다.


난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다. 학번이라는 말 내게는 생소했다.

난 그냥 작은 목소리로 서울로 공부하러 간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내 자존심이 내가 재수하러 서울 간다는 말을 허락하지 않았다.


난 잠시 말을 이을 수가 없었고 이내 눈을 감았다.

버스가 출발했고 우리의 대화는 여기서 멈추었다.

고개를 창가로 돌리고 실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거기에 또 내가 있었다.


내 얼굴 뒤로 그의 어깨가 언뜻 보인다.

다시 눈을 감으려고 할 때 실내등이 꺼졌고 내 가슴은 다시 콩닥거린다.

그가 내 옆으로 조금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주무세요?"


그의 침착한 목소리가 내 귀에 낮게 들려 왔지만 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카디건 속의 맞잡은 두 손에 힘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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