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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야설) 노트북의 그녀 - 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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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던 담배를 비벼 껐다. 이놈의 컴퓨터가 또 말썽이었다. 거의 한 시간 넘게 작업한 글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나는 혀를 끌끌 차며 멈추어버린 컴퓨터를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인터넷이나 쓰고 메모장이나 열 줄 아는 컴맹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마치 옛날 티브이를 다루듯이 본체 위를 몇 번 두드리는 것뿐이었다.


리셋버튼을 눌러서 다시 켜진 컴퓨터. 역시나 아까 작업한 내용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비록 이 컴퓨터가 아무리 구현이라고 해도 워드프로세서 소프트가 안 돌아갈 정도의 구형은 아니라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메모장이 좋았다.

이곳저곳의 잡지와 신문에 글 나부랭이를 적어가며 먹고 사는 직업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글 대부분을 메모장에서 작업했다.

아무런 가식 없이 텍스트 그 자체로만 적히는 느낌이 좋았다.


나한테 이 컴퓨터를 사다 준 김군은 그런 나를 별종으로 취급하며 자동 저장 기능이 있는 프로그램을 쓰라고 그렇게 권고했지만

내 귀에는 그다지 와닿지 않았다.

아무튼, 나의 이상한 메모장 사랑은 이런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였고 나는 죄 없는 담배만 뻐끔거리며 낡은 컴퓨터의 성능을 탓할 뿐이다.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연다. 컴퓨터 가격 비교 사이트를 검색하여 들어간다.

아무래도 내가 돌아버리기 전에 이놈의 컴퓨터를 갖다버리고 새로 사는 게 더 나을 듯 싶었다.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내 눈에 제대로 들어오는 게 없다.

CPU에 코어가 들어갔고 어쩌고 램이 얼마고 저쩌고....

온갖 기술적 설명이 나열된 그 글들을 보고 있자니 뼛속까지 문학도인 나로서는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우연히 중고 거래 게시판까지 오게 되었다. 여기도 아까의 페이지들과 별 다를 바 없다.

자기 컴퓨터 성능에 대해서 구구절절 늘어놓는다. 이 세상에 컴퓨터 잘하는 인간들은 왜 이렇게 많은 건지.

그러다 내 눈을 확 잡는 간결한 문구 하나를 발견한다.


『노트북. 문서작업 전용』


이거다 싶었다. 게시물을 클릭하여 들어가 보니 설명도 간결하다.


『1년 사용. 문서작업용으로 손색이 없음. 40만. 010-oooo-xxxx』


마치 한 줄의 잠언처럼 간결하고도 그 자체로 완성된 문장. 바로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건다. 신호가 몇 번 가더니 뚜우- 하고 끊어진다.

잘못 걸었나 싶어서 다시 걸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뭐야. 연락하라고 연락처를 올려놓았으면 전화를 받아야 할 것 아냐!

짜증을 내려고 하는 순간 내 검은색 핸드폰이 부들부들 떤다. 문자가 왔다.


『수업 중입니다. 문자로 해주세요』


학생인 모양이었다. 수업 중이라 전화를 받지 않고 끊어버린 모양이다. 덕분에 나는 익숙하지도 않은 핸드폰 문자질에 도전해야만 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게시판에서 노트북 파는 것을 보았다. 사고 싶다. 어떻게 입금하면 물건을 보내줄 수 있느냐는 메시지를 전하는 데 성공했다.

답변은 바로 왔다.


『직거래만 할 겁니다. 요즘 사기가 많잖아요』


그러고 보니 그렇다. 개인 간 거래라고 하니 딱히 무슨 보호장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노트북이라고 하니 본체만큼 무거운 것도 아닐 테니 들고나와서 서로 거래를 할 수도 있을 성싶었다.

나는 응하겠고, 돈은 바로 준비할 수 있으니 언제 어디서 보면 좋겠냐는 답변을 했다. 물론 끙끙거리면서.


『테스트도 해보시고 해야 하니 카페에서 만나죠. 서울이시죠?』


그렇다.


『명동 파스구찌에서 오후 8시요.』


좋다. 그럼 그때 보도록 하자.

나는 은행에 나가 돈을 찾는다. 통장의 잔액이... 아주 넉넉한 편은 아니지만 몇 달 술 먹고 밥 먹고 집세 낼 돈은 남아있었다.

은행 봉투 하나에 40만 원을 담고 안주머니에 갈무리한다.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지만, 집에 머물러 있기는 싫었다.

한 시간 작업분이 날아간 것을 핑계 삼아 외유를 한다. 모레가 마감인 잡지 담당자가 들으면 기겁할 소리이기는 하지만 내 몸과 머리는 휴식을 바라고 있었다.


광화문으로 나가 대형서점 순례를 한다. 세 군데나 모여있는 대형서점은 온갖 책과 활자와 팬시 상품이 소모되는 곳이다. 그곳에서 트렌드를 읽는다.

글을 쓰고 그것을 팔아 입에 풀칠하는 나는 대중에 영합해야 한다.

그 선택은 까다롭고 신중하다. 베스트셀러란에서 요즘 잘 나간다는 일본 작가의 작품 하나를 선택한다. 이것이 그 까다로운 선택이라는 것이다.


쳇. 값을 치르고 이제 명동으로 향한다. 이동하는 지하철 내에서 특유의 속독으로 다 읽어버렸다.

대체로 일본 작가들의 글을 말랑말랑한 것이 특징이다. 빠르게 읽힌다.

빠르게 읽히는 만큼 많은 사람이 많은 책을 사다가 읽어야 한다. 그러니 출판사가 좋아할 수밖에.


명동 파스구찌에 들어가서 커피 한 잔을 시킨다. 커피 한 잔에도 말랑말랑한 이름이 우르르 붙어있는 요즘이다.

대충 적당한 것을 하나 시켜 들고 2층 창가 자리 하나를 찾아가 앉는다. 그리고 들고 있던 책을 정독하기 시작한다.

핸드폰이 울린다. 꺼내어보니 낮의 그 판매자였다.


『명동역에 거의 도착. 어디 계세요?』


파스구찌 2층에 혼자서 책 읽고 있는 중년 남자가 있다고. 찾아보라고 답문한다. 전화 한 통화 하면 간단할 것을... 퍽 문자를 좋아한다.

고개를 돌려 계단 쪽을 보고 있다. 노트북을 들고 올라오는 녀석이 누굴까 지켜보고 있다.

저녁 시간, 대한민국에서 가장 번화하기로 소문난 이 카페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날락하고 있었고 또한 그중의 태반은 20대 아가씨들이었다.

저희 아버지 세대들이 한 끼 식삿값으로 내는 돈을 커피 한 잔에 소모하는 그녀들의 주된 아지트인 이곳이기 때문이다.


불쑥.

일출을 본 적이 있는가. 일출 시 태양은 서서히 솟아오르지 않는다. 바다 전체를 걸쳐 붉은빛을 고고히 품고 있다가,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안달이 날 때쯤 해서 그 모습을 삽시간에 드러낸다.


그녀가 나타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신기할 정도이다. 노트북이 보인 것도 아니고 눈이 마주친 것도 아니고. 계단의 뒤쪽이었던 나로서는

그녀의 뒷모습과 옆모습의 중간쯤이 보인 것뿐인데, 나는 직감적으로 그녀가 판매자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짙은 흑발이 매끄럽게 정수리부터 등의 한 가운데까지 드리워져 있고 단정한 차림의 블라우스는 정갈한 여대생의 느낌을 전해준다.

다소 짧은 편이지만 그리 천박하게 보이지 않는 A라인 스커트의 밑으로 뻗은 다리는 윤기 있으면서도 탄탄해 보였다.

힐의 뒤축까지 모두 보이고 나서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 역시 나를 한 번에 알아보았다. 또각거리며 걸어와 내 앞에 앉는다.


"문자 주신 분 맞죠?"

"예. 접니다."


직업이 글쟁이인 나는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며 분석하는 버릇이 있다. 마치 셜록 홈즈 처럼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단서 삼아 그를 추측하는 것이다.

나이는 이십 대 초중반. 어림잡아 스물둘에서 아무리 많아도 다섯은 넘지 않을 것이다. 화장은 옅은 편이지만 눈썹부터 피부까지 깔끔하게 유지하고 있다.

귀걸이가 요란하지 않지만, 색상으로 보아 윗옷과의 매치를 고려해서 단 것이 분명하다. 다소 눈매가 가늘기는 하지만 전형적인 중국 남방 미인도의 상이다.

허락한다면 입술 옆에 미인 점이라도 하나 찍어 미인도의 화룡점정을 완성하고 싶었다.


"이거예요."


그녀는 옆에 메고 온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그것을 열어 안에 든 노트북을 끄집어낸다.

S사의 S 모델. 컴맹이기는 하나 신문은 빠짐없이 구독하는 나이다. 내 기억력이 정확하다면 이건 작년 말에 대대적으로 판매하던 모델이었다.

빨간색의 커버가 특이해서 더 기억에 남는다.


"빨간색이라. 남자분이 쓰시기에는 좀 그렇지만 성능은 좋거든요. CPU는 ..."

"아아, 어차피 설명해도 전 잘 못 알아듣습니다. 그냥 쓰기 편한지. 어떤지만 좀 알려주세요."


그녀는 의아하다는 듯이 나를 본다.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가장 자주 쓰는 프로그램은 메모장입니다. 인터넷 잘 되고 메모장 잘 열리고. 그 뭐냐, 윈도우 다운만 안 되면 전 괜찮아요."


그녀는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이 살짝 미소를 짓는다. 꽃에 비단이 더해진 느낌이다. 그녀는 노트북을 열고 부팅시키더니 화면을 내 쪽으로 돌려준다.


"여긴 무선랜 잡히니까. 인터넷은 뭐, 잘 되고요. 메모장이야 이렇게. 예, 잘 열리네요. 포맷은 했고 윈도우만 깔아두었어요.

메모장 쓰신다고 했으니까. 바로 가져다가 쓰시면 되겠네요."


나는 이것저것 만져본다. 노트북에는 마우스가 달렸지 않고 조막만 한 터치패드가 달려있었다. 거기에 손가락을 놓고 움직이자 마우스 커서가 움직인다.

딱히 어디 눌러본다고 내가 컴퓨터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을 리는 만무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에게 준비한 돈을 건넨다.

그녀는 돈을 세어보지도 않고 주머니에 넣는다. 세어보지 않느냐고 권하자,


"맞겠죠. 딱 보기에도 인상이 좋아 보이시는 데요. 그럼 잘 쓰세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망가지거나 고장 난 부분을 제가 숨기고 팔았다고 생각되면 연락해주세요."


그쪽도 인상이 좋기는 만만치 않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에게 악수를 청한다.

그녀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섬섬옥수를 내밀어 내 손을 가볍게 잡고 흔든다. 부드럽고 여리여리한 촉감이 전해져온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 밖으로 나간다. 창밖을 향해 시선을 돌려 그녀가 돌아가는 모습을 살핀다. 적당하게 흔들리는 뒤태가 아름답다.


익숙하지 않은 터치패드를 작동해 메모장을 열어본다. 화면이 조금 작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

배터리가 어느 정도 작동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들고 나가서 야외작업을 해도 문제가 없을 듯싶다.

이곳저곳을 눌러보다가 문득 탐색기에서 이상한 부분을 발견한다. CD 드라이브에 "백업"이라는 볼륨이 붙어있다. 노트북에는 CD가 들어있었다.

탐색기에서 CD를 선택한다. 폴더가 열리고 몇 개의 파일이 보인다. 익숙한 아이콘. 동영상 파일이었다.


왠지 모르게 침을 삼킨다.

마치 누군가의 은밀한 속을 들여다보는, 어린 시절, 친하게 지내던 여자아이가 잠자고 있던 틈을 타서 그 옷자락을 들춰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파일에는 순서대로 번호가 붙어있었다. 이은지1.avi, 이은지2.avi. 그렇게 8번까지 있었다.

1번을 클릭해서 실행한다. 갑자기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린다. 노트북에 달린 외장스피커로 확 들리는 소리에 깜짝 놀란다.

얼른 볼륨을 낮춘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날 주목하고 있지는 않다.

주머니에서 MP3플레이어를 꺼내어 이어폰을 분리했다. 노트북에 끼우고 귀에도 꽂는다.

아까 내게 노트북을 건네고 돌아간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폰을 타고 들려온다.


"정말 찍는 거야?"

"응. 가장 자신 있는 표정을 지어봐."

"자신 있는 표정?"

"아니면 섹시한 표정을 짓든가."

"어우~ 저질!"


티셔츠와 블루진. 캐쥬얼한 차림의 그녀가 이쪽, 카메라를 쳐다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핸드헬드 카메라인 듯 화면은 고정되지 않고 무척이나 흔들렸다.

찍고 있는 남자의 목소리와 그녀가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를 하면서 그 동영상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4분가량. 다 보고 나니 조금 김이 샜다.

난 대체 뭘 기대한 건지.


맥이 빠진 상태로 앉아있자니 자동으로 2번 파일이 열린다. 아마도 동영상 재생기의 자동 목록기능인 듯. 2번도 마찬가지였다.

대충 두 사람이 돌아다니면서 풍경과 여자를 찍은 것 같았다. 여자의 이름은 파일에 쓰인 대로 이은지였고 남자의 이름은 성은 모르겠지만 승우였다.

숫제 남의 연애 놀음 구경꾼이 되어 실없이 앉아있다.


그렇게 3번 파일이 되고, 4번 파일이 되었을때.

노트북을 확 덮어버렸다.

그리고 황급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핀다. 조금 전 내 눈앞에 펼쳐졌던 살색 영상을, 또 누군가가 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말이다.

이 사람 많고 혼잡한 명동 바닥의 카페에서 이상한 동영상이나 보고 앉아있는 중년으로 비치는 것은

내 사회적 위신이라든가 뭐 암튼 그런 것을 고려할 때 위험한 일이다.


노트북을 서둘러 쟁여 넣고 카페를 나온다. 가방을 둘러메고 지하철에 올라 동네로 돌아온다. 돌아오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예상대로. 그 CD는 두 사람의 은밀한 행위를 기록한 동영상을 담고 있었다.

카페에서 차마 계속 보지 못한 그 영상에서, 그녀는 신음하고 있었고 벌거벗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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